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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보다 중요한 것

매의 눈이 웃는다

by moviesamm

공개수업 전날 밤, 나는 수업지도안 앞에서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

MOVIESSAM의 사본.png


'도입 5분, 전개 30분, 정리 5분'이라는 완벽한 3막 구조. PPT의 글꼴 크기를 0.5포인트 단위로 조정하며 생각했다. 이게 교사의 일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존재를 증명하는 일인가. 슬라이드 23번을 들여다보다 문득 짜증이 났다. 형식에 치우친 보여주기식 수업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지만 손은 이미 24번 슬라이드를 만들고 있었다.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노트북을 덮었다. 예상 질문과 예상답안 지도안 속 수업은 완벽했다.


공개수업 당일 아침, 교실은 평소의 교실이 아니었다.


분필가루는 증발했고, 걸상은 자로 잰 듯 정렬되어 있었다. 칠판은 새것처럼 반짝였고, 교탁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조차 긴장한 것처럼 먼지 한 톨 비추지 않았다. 교실이 숨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숨을 참았다.


1교시가 시작되고, 아이들은 스마트패드를 들고 고조선 유물을 찾고 있었다. 평소처럼 웃고 떠드는 것 같았지만, 아이들도 긴장함이 느껴졌다.


"선생님, 비파형동검이요. 이게 진짜 비파 모양이에요? 그럼 거문고 모양 칼도 있어요?"

민수의 질문은 언제나 이랬다. 엉뚱하되, 본질을 찌르는. 나는 웃으며 답했다.

"있었지만 발견 안 됐을 수도 있지. 땅 밑에는 우리가 모르는 게 더 많거든." 그때였다.

문이 열렸다.


공기의 밀도가 바뀌었다. 중력이 무거워졌다. 마치 법정에 판사가 입장하는 순간처럼, 교장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매의 눈. 뒤이어 교감 선생님이 손가락 끝으로 책상 모서리를 '쓱—' 훑으셨다. 그 손끝이 지나간 자리엔 보이지 않는 채점표가 생겼다.


청결도, 체크. 정돈도, 체크. 학습 분위기, 체크.


'오늘은 실수하면 안 돼. 학습목표 판서, 시간 배분, 학생 참여도.' 머릿속이 체크리스트로 꽉 찼다. 머리로 빠르게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준비한 멘트를 꺼냈다.


"자, 그럼 전시간에 배운 내용을 기억해봅시다."


그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지우가 손을 들었다. 평소엔 발표를 피하기 위해 책상 밑으로 시선을 숨기던 아이였다. 오늘따라 손이 높이 올라가 있었다.


"저는 지도 앱으로 고조선 영토 찾아봤어요!"

지우가 스마트패드를 번쩍 들어 올렸다. 화면엔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색칠된 지도가 보였다. 아이 표정이 상기되어 있었다. 평소라면 절대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오늘의 주인공은 아이들이다. 그들은 이미 긴장하고 있었다. 나보다 훨씬 더. 선생님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와, 지우야. 그럼 지금 우리나라 어디쯤이야?"

"평양이랑 함경도요!"


지우의 대답에 옆자리 현우가 거들었다.

"그럼 요동 반도도 우리 땅이었네요? 진짜요?"


"응, 그때는. 그런데 지금은 중국이지."

내가 답하자, 아이들 사이에서 "어?" 하는 탄성이 새어나왔다. 역사가 갑자기 생생해지는 순간이었다.


"선생님, 저번시간에 배운 8조법이요 "음... 도둑질하면 노비가 된다고 배웠잖아요? 그럼 요즘은요?"


"징역이죠."

수진이가 답했다. 그런데 정인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근데 선생님, 노비가 되는 게 나아요, 감옥이 나아요?"

교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정인이의 질문은 갑자기 철학이 되어버렸다. 뒤에서 지켜보던 교장 선생님의 팔짱이 살짝 풀렸다.


나는 웃으며 물었다.


"너희 생각은 어때?"

"노비는 평생이고 감옥은 몇 년이니까... 감옥이요?"

"그런데 노비는 밥이라도 주잖아요. 감옥은 나오면 취업도 안 돼요."


아이들끼리 토론이 시작됐다. 내가 준비한 PPT 어디에도 없던 장면이었다. 나는 그냥 지켜봤다. 아니, 같이 들었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준비한 지도안 속 '완벽한 수업'을 살짝 잊어버렸다. 아니, 잊어버린 게 아니라 필요 없어졌다. 내가 예상한 완벽한 흐름은 이미 아이들 손으로 넘어갔다. 언제나 그랬듯, 아이들이 살아 숨 쉬는 숨결이 수업의 완성이었다. 그 숨결이 교실을 가득 채웠다.


교장 선생님의 팔짱이 완전히 풀렸다. 교감 선생님의 손끝은 더 이상 먼지를 찾지 않았다. 두 분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마치 채점표를 내려놓은 사람처럼.


40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우리는 역사 속으로 몰입했다. 민수는 청동기를 찾아 헤맸고, 지우는 지도를 확대하고 축소했고, 정인이는 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토론했다. 현우는 영토가 바뀌는 걸 아쉬워했고, 수진이는 노비의 삶을 상상했다.

종이 울렸을 때, 나는 준비했던 '완벽한 정리 멘트'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오늘, 너희가 수업했구나."

아이들이 웃었다. 무슨 소리냐는 듯이.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교감 선생님이 다가오셨다.

"아이들이 참 살아 있네요."


그 한 마디가 가슴에 스며들었다. 칭찬도, 비판도 아닌, 그냥 관찰. 그리고 인정. 살아 있다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


나는 그제야 알았다.

책상 모서리에 숨어 있던 먼지보다, 아이들 눈에 반짝이던 호기심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것을. 먼지는 닦으면 사라진다. 하지만 호기심은 살아서 자란다.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을 낳고, 대답은 또 다른 생각을 부른다.


그날 저녁, 나는 수업지도안을 다시 펼쳤다.

도입 5분, 전개 30분, 정리 5분. 완벽한 구성. 하지만 거기엔 없었다. 민수의 엉뚱한 질문, 지우의 떨리는 목소리, 현우의 탄성, 정인이의 철학, 수진이의 상상력.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40분간의 살아 있는 시간. 나는 수업지도안을 덮으며 생각했다.

'보여주기'는 금방 사라진다. 남는 건 너희와 오늘 또 '함께 살아낸 하루'다. 그게 바로, 가르친다는 것의 진짜 의미일 거라고.


다음 날 아침, 교실엔 다시 먼지가 쌓여 있었다. 분필가루가 공중에 떠다녔고, 걸상은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먼지를 비췄다. 반짝이는 먼지들.


나는 웃으며 교실 문을 열었다.

교실은 오늘도 살아 숨 쉰다. 먼지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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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은 제게 가장 작은 세상이자 가장 큰 이야기의 무대입니다. 아이들의 웃음과 실수, 그리고 성장의 순간을 영화처럼 기록합니다. '무비샘'은 Movie와 샘(Teacher)을 더한 이름으로, 매일의 수업 속에서 피어나는 삶의 장면을 따뜻하게 담아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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