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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완벽한 아이(2)

챕터2. 분기점

by 리들

러시아 북부, 늦겨울. 창가에는 아직도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날 아침, 테론 리들은 짐가방을 붙잡고 현관에 서 있었다. 겨우 여섯 살, 누나보다 두 살 어린 나이였지만, 이미 단정하게 매무새를 갖추고 있었다. 구두에 발을 맞춰 신으며 동생은 누나를 올려다봤다.

“영국은 따뜻할까?”
테론의 목소리는 낮게 떨렸지만, 금세 미소로 눌러 덮었다.
알렉산드라는 대답 대신 그의 가방 끈을 툭 건드렸다.
“너야 어디서든 잘하겠지. 원래 착한 애들은 다 받아주잖아.”

어머니는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다가, 짧게 덧붙였다.
“웰링턴 아카데미라니, 잘 어울리잖아.” 목소리는 담담했다. “착한 아이는 어디서든 받아들여지지. 영국은 네게 더 평탄한 길이 될 거다.”

테론은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난 착하기만 한 건 아닌데... 나도 잘할 수 있어.”

그러나 어머니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두 아이를 번갈아 보다가, 알렉산드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선 네 누나가 남는다. 러시아에서 살아남으려면 순한 성격보다는 날 선 고집이 더 오래가니까.”

문이 닫혔다. 바퀴가 눈을 갈아대며 멀어졌다. 그 소리가 끊기자, 집은 커졌다. 한 칸 비어버린 체스판처럼.


저녁, 서재.

샹들리에의 유리 장식이 미세하게 떨렸다. 빛이 흔들릴 때마다 책등의 금박 글자가 어두운 바닥에 또 하나의 문장처럼 내려앉았다. 어머니는 프린터에서 갓 나온 종이 묶음을 탁자 위에 펼쳤다. 잉크 냄새가 겨울 공기보다 짙었다.

“읽어봐.”
“뭔데요?”

“제스 연구실에서 나온 작년 논문. 네겐 버겁겠지만, 버겁다는 건 좋다.”


알렉산드라는 처음엔 글자를 읽으려 한 게 아니었다.

책상 위에 흘린 잉크 자국이, 수식의 한 부분을 지워버렸다.

그 자국을 채우려다 보니, 다음 줄과 맞지 않았다.

알렉산드라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긴 속눈썹 아래로 얇은 그림자가 생겼다. 그 그림자가 글줄을 하나 가리고, 다음 줄을 가만히 드러냈다.

“여기.”
손가락이 한 항을 짚었다.
“이거, 경계조건이 빠졌어요.”

어머니가 멈추어 섰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생각 아니고… 여기에서 이 값이 0이 될 수 있잖아요. 그러면 다음 줄에 쓰인 게 안 맞아요. 아예 다른 식으로 가야 해요.”

알렉산드라는 펜을 들어 옆여백에 짧게 썼다. 글씨는 아직 삐뚤었지만 방향은 똑바로 나아갔다. 잉크가 마르는 속도와 촛농이 떨어지는 속도가 이상하게 같았다. 어머니는 그 작은 여백을 한 번 더 읽고,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계속해.”
그 말은 칭찬도, 겅요도, 허락도 아니었다. 그냥 다음 문장이었다.


논문과 유리창 사이에서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겨울 눈은 두 번 더 내렸고, 두 번 더 녹았다. 샹들리에의 그림자는 해마다 같은 자리에 도착했지만, 책상 위의 공책은 더 두꺼워졌다.

동생의 편지는 오지 않았다. 대신 매일 새 논문이 도착했다.

밤이면 샹들리에가 시계를 대신했다. 그림자가 공책의 가운데를 차지하면, 한 번 눈을 깜빡였다. 쉬는 시간 없이 넘기는 유일한 동작.

어머니는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 관찰했다.
(경계조건을 스스로 고친다. 가정의 크기를 줄인다. ‘왜 여기선 사라지지?’ 같은 질문을 소리 내어 묻지 않는다. 좋아. 소리 없는 질문이 오래 간다.)


.

.

.


어머니는 알렉산드라가 읽고 있는 논문 위에 한 종이를 올려놓았다.

행정의 언어였다.
검은 잉크로 또박또박 적힌 안내문은, 학문이 아니라 행정의 냄새를 풍겼다.


<제스 원리학교 입학 심사 요강>

— 연령 제한: 17세 이상 혹은 이와 준하는 학문적 지식을 갖춘 학생
— 제출: 필기 · 연구 초록 · 구술 토론


알렉산드라는 잠시 눈길을 멈췄다. 숫자 ‘17’ 위에 손가락이 닿았다. 지금의 그녀는 아직 열 살이 채 되지 않았다.

“17세라...”
아이의 목소리가 흘렀다. 비웃음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단순한 호기심, 그러나 안쪽엔 묘하게 단단한 울림이 있었다.

어머니가 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내가 졸업한 곳이지. 제스는 러시아에 있는 모든 고등 연구기관 중에서도 가장 닫힌 원형이야. 안에 들어가면 스승도, 동료도, 모두 제스 출신뿐이다. 밖에서 경력을 아무리 쌓아도 그 문을 열 수는 없어.”

알렉산드라는 눈을 들었다.
“왜요?”

“그래야 그 안에서만 통하는 언어가 만들어지거든. 제스는 학교라기보다 폐쇄된 연구 생태계에 더 가까워. 열 여덟 쯤 된 학생들이 입학해서 곧장 연구 트랙에 투입된다. 교수들은 거의 예외 없이 그 출신이고. 거기선 혈통처럼 학맥이 이어져.”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머니는 딸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아주 짧게 덧붙였다.
“넌 아직 열 살이다. 하지만 열 살짜리도 문을 열 수 있다면… 그게 진짜 제스다.”

알렉산드라는 다시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연령 제한: 17...준하는...
그 문장이 마치 혼자만 열려 있는 틈처럼 보였다.

그녀는 연필을 들어, 안내문 여백에 얇게 한 줄을 새겼다.

“없음은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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