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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아내만을 탐했다

에필로그

by 봄해
그날 아침, 나는 당번 근무를 마치고 집 앞에 섰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집 안에서 아이들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현관으로 가지 않고 마당 쪽으로 돌아 걸어갔다. 아침 햇살이 내려앉은 데크 위에서 아내가 빨래를 널고 있었다. 세탁기에서 막 꺼낸 듯 축축한 옷가지들이 건조대에 빼곡히 걸려 있었고, 아내의 눈가에는 그늘이 옅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엔 땀이 배었고, 손끝과 어깨에는 육아와 집안일의 고단함이 어렴풋이 남았다.


아내는 나를 보며 짧게 웃었고, 나도 아침 인사를 건넸다.


"여보, 고생했어."


보통은 퇴근한 내가 들어야 할 말 같았지만, 정작 아내가 들어야 할 말이었다. 나는 아내 옆에 서서 함께 빨래를 널었다. 바구니에서 옷을 집어 들던 중, 고개를 젖힌 아내의 옆모습이 눈에 들었다.


축 늘어진 티셔츠 너머로 비치는 일상의 흔적과 지친 몸짓 속에서, 묘하게 편안하고 깊은 온기가 느껴졌다. 그 사이 아이들도 마당으로 나와 젖은 옷을 들고 함께 도왔다. 사실 우리 집엔 건조기가 있다. 그럼에도 아내는 늘 아침이면 빨래를 널었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해 온 사람답게, 아내는 익숙한 말투로 말했다.


"햇빛이랑 바람에 한 번 말리면, 더 잘 마르는 것 같아."




나는 유전자 정밀검사 결과를 아내에게 전했다.


몇 주 전 읍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조혈모세포은행협회에서 내 연락처를 찾고 있다는 말이었다. 스무 살 무렵 등록했던 조혈모세포 기증. 이후 협회에서 보내온 달력과 소식지를 무심히 흘려보내며, 기증은 내 삶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렇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 내 정보와 일치하는 환자가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연락처가 바뀌어 협회는 읍사무소를 통해서야 나를 찾아냈다. 아내와 상의 끝에 기증에 동의했고, 환자 측도 절차가 신속히 진행되길 원했다. 곧바로 채혈을 통해 정밀검사가 이어졌다.


어제 담당 코디네이터로부터 결과를 들었다. 주요 유전자 중 한 자리가 맞지 않는다는 통보였다. 단 하나라도 어긋나면, 이식은 곧 치명적인 위험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결국 환자 측은 이식을 보류했다.


그 순간, 나의 가슴에 무언가 흔들렸다.


건조대에서는 옷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작은 옷 하나가 건조대 끝에서 툭 떨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가볍고 허망하게 바닥으로 내려앉는 모습은, 간절한 마음으로 일치자를 기다렸을 환자를 처음으로 떠올리게 했다.


나는 단 한 번도 그 마음을 헤아린 적 없었다.


너무 쉽게 흘려보낸 내 삶이 순간 부끄럽고 미안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다시 걸었다. 바람에 흔들리던 옷이 제자리를 찾는 모습을 보며, 기증의 기회를 다시 기다려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환자의 마음으로. 그 결심을 조용히 마음속에 걸어두었다.






아이 둘을 피아노 학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왔다.


세탁실 안 건조기에서는 아침에 널었던 옷들이 달그락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얼마 전, 지인이 세탁기와 건조기를 선물로 보내주었다. 세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있어 건조기가 얼마나 절실한지 알았다는 그분은, 우리 집에 그것이 없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쓰였다고 했다. 직접 사주고 나니 오히려 본인이 편해졌다고 했다. 아내는 햇볕에 빨래 너는 걸 좋아했지만, 막상 건조기를 돌려보니 그 편리함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건조기를 볼 때마다 그분의 마음을 떠올리며 감사했다.


건조기 안에서는 속옷과 손수건, 아이 옷들이 바쁘게 돌았다. 아이 셋은 학원과 어린이집에 가 있었고, 막내만 방 안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우리는 부엌 싱크대를 지나 세탁실 앞, 좁은 바닥에 나란히 앉았다. 돌아가는 건조기를 마주 보며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결혼 후 십여 년, 나는 아내 곁에 있으면서도 기증에 대해 진심으로 간절해 본 적 없었듯, 아내에 대한 간절함도 잊고 지낸 것 같았다. 아내를 당연하게 여겨온 건 아닌지, 문득 마음이 아렸다. 나는 옆에 앉은 아내의 손을 잡았다. 아내는 말없이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 왔다.


우리는 마치 건조기에 넣지 못한 옷처럼, 하나둘 걸친 것들을 늦게나마 벗어 내렸다. 남루한 옷가지들이 바닥에 쌓였고, 그 사이 작은 틈으로 서로가 스며들었다. 건조기 안에서는 옷들이 부드럽게 얽히며 낮고 일정한 소리를 냈다.


그 울림은 두 사람의 숨결이 만나 만들어내는 떨림 같았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그 소리가 내 귀를 감싸며 오래 머물렀다.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수많은 길 가운데 오직 아내를 선택할 때 비로소 찾아오는 감정이었다. 여전히, 아내만을 탐할 수있는.


그것은 남편이 될 수 있는 자유였다.




안녕하세요. 봄해 작가입니다.

이번 작품을 준비하고 연재하며 매일 행복했습니다.


아내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고 믿었지만, 끝내 더 깊이 들여다본 것은 아내를 바라보는 ‘저’였습니다.


그동안 제 글을 읽어 주시고, 라이킷으로 마음을 건네주시며, 따뜻한 흔적을 남겨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가장 가까이에서 읽어 주고, 더 많이 웃어 주었던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다음에 어떤 작품으로 인사드릴지는 아직 모르지만, 계속 쓰고자 하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마주하며, 꿋꿋이 무언가를 눌러가며 써 내려가시는 작가님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 단단한 자세를 닮고 싶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행복하세요!”


지금까지 [나는 그때, 아내를 탐했다]를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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