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덧은 신이 내린 시험이었다.
충남대병원 산부인과 일반 병실에서 아내는 일주일을 보냈다. 그동안 나도 병원 식사를 신청해, 식사 때마다 아내와 마주 앉아 미역국을 떠먹었다. 아내의 몸은 빠르게 회복해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복도를 걸었고, 나는 틈틈이 병원을 오가며 아이를 보러 갔다. 신생아 면회 시간에 맞춰 유리창 앞으로 갔다. 갓 태어난 아이들 사이, 가느다란 다리에 아내의 이름이 적힌 팔찌를 찬 아이가 있었다. 처음 만난 날엔 흡입기로 당긴 탓인지 머리 모양이 특이했는데, 며칠 사이 훨씬 가라앉았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곤히 잠든 그 아이를 불렀다.
"봄춘."
아이의 눈가가 살짝 찡그려졌다. 탯줄 없이도 스스로 숨 쉬는 아이를 보자, 기특함과 뭉클함에 가슴이 뜨거웠다.
아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내의 뱃속에서 탯줄에 의지해 살았다. 어느 봄날, 아내가 두 줄이 선 작은 막대를 들고 와 말했다.
"임신했나 봐."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러나 두 달쯤 지나 아내는 깊고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햇빛조차 허락되지 않는 방. 불은 켤 수 없었고, 창은 두꺼운 커튼으로 가렸다. 냄새와 소리, 그 사소한 것들까지 모두 아내를 괴롭혔다. 밥 냄새는 멀리서도 감지되었고, 이불이 스치는 부스럭거림조차 숨을 막게 했다.
나는 곁을 지키려 했다. 가끔 아내가 먹을 수 있다면 냄비째 음식을 받아 왔다. 플라스틱 냄새가 덜 밴 음식이라면, 아내는 조금씩 입에 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몸은 말라갔고, 침묵은 길어졌다. 그 방 안에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끝내 빛을 찾아 문을 나섰다가도, 멀리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저,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고 문 앞에 머물렀다.
입덧은 신이 내린 시험 같았다.
아내는 곰이었다. 마늘과 쑥 대신, 속을 뒤집는 위산과 침묵 속에서 살았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마늘을 먹으며 인내하던 곰처럼, 자신 안에 새로운 생명을 품기 위해 몸과 마음을 깎아내고 있었다. 오래 참고 버티던 그 끝에서, 마침내 문이 열렸다. 아내는 그 문턱을 넘어 봄을 들고 나왔다. 바깥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이름, 자기 시간을 해석해 얻은 첫 목소리였다.
태명은, 봄춘(春)으로 할래.
입덧이 지나가자 배는 산처럼 불러왔다. 똑바로 누울 수 없어 옆으로 몸을 말고 자던 밤들, 나는 그 옆에 누워 아내의 배를 감싸 안고 함께 잠들었다. 우리는 배 속의 아이를 자연스레 '봄춘'이라 불렀고, 마침내 긴 진통과 많은 출혈을 지나 아이를 맞을 준비를 했다.
다행히 아내의 몸은 퇴원할 만큼 회복됐다. 우리는 퇴원 절차를 마치고, 아이가 머물러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그때 문득 스쳤다. 아내는 왜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려야 했을까. 그 물음은 자꾸만 나를 뒤돌아보게 했다.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사이렌 소리를 쫓아가며 무력한 손끝으로 붙들던 질문들을, 아내와 아이가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로 놓아주기로 했다. 이제는 살아 있는 둘에게 집중해야 했다.
우리는 예정보다 오래 병원에 남아 있던 아이를 품에 안고, 셋이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기저귀를 갈다, 우리는 멈칫했다. 아이의 엉덩이가 벌겋게 헐어 있었다. 우리는 그 작은 몸을 물티슈 대신 따뜻한 물로 살살 씻겨 주었다. 물티슈는 빠르고 편리했지만, 그 빠름이 아이의 여린 살에 남긴 흔적을 보자, 얼른 데려오지 못한 미안함이 마음을 찔렀다.
나는 아내에게 자주 말했다.
"괜찮아. 조금만 더 참아 보자."
그 말은 어쩌면 물티슈로 닦듯, 너무 빠르고 가볍게 스쳐 갔을지 모른다. 아이를 씻기고 조심스레 눕힌 뒤, 나는 말 대신 아내를 안았다.
"무슨 일이야?"
나는 아내에게 대답하지 않고 품을 조금 더 조였다. 그제야 아주 작은, 아내의 '첫 숨'이 느껴졌다. 쉽게 내뱉는 위로 대신, 천천히 씻어 내리듯 오래 안아 주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의 시작은 말이 아니라, 숨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