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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집(상)

by 봄해


아침 해가 창을 넘어 들자, 집 안은 서서히 깨어났다.





나는 욕실 문을 열고 샤워기를 틀었다. 물줄기가 머리끝을 두드리는 사이, 창 너머 데크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곧 칭얼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아이가 문을 벌컥 열었다.


"오늘, 소방서 가?"


그저께 일했으니 오늘은 가는 날이라고 말해 주자, 아이는 시무룩해져 돌아섰다.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말린 뒤, 아이가 열어 둔 문을 닫고 나왔다. 금세 돌아온 아이가 내일은 몇 시에 오느냐고 묻기에, 나는 아이를 가만히 안아 올렸다.


"내일은 빨리 올게."


싱크대 앞엔 아내가 서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재우다 함께 잠들었지만, 아내의 얼굴에는 피곤이 옅게 남아 있었다. 일찍 누웠어도 깊게 쉬지 못한 얼굴. 손에서는 막 지은 밥이 들러붙은 주걱이 들려 있었고, 그 주위로 아이들이 엉켜 들었다.


아이들은 책을 보다가도 어느새 울음으로 번졌다. 아내는 익숙한 목소리로 달래며 하나둘 식탁에 앉혔다. 나는 먼저 밥을 먹으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시끄럽고 정신없는 아침, 그 한가운데 늘 아내가 있었다. 조금은 지쳐 보였지만, 여전히 다정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아내는 매일 아침 무언가를 조용히 감당해 내고 있었다.





우리는 아이 곁에 머물며 환경이 되어갔다. 무언가를 가르치기 앞서, 곁에서 함께 걷는 동반자가 되자고 마음먹었다.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네 남매는 부딪히고 울고 웃으며 작은 공동체를 만들었다. 말보다 눈빛이 먼저 움직이고, 손짓이 언어를 대신하는 법을 배워 갔다. 더 시끄럽고 더 복잡했지만, 그만큼 단단하고 유연한 관계였다.


그런데 그 환경을 함께 만들면서도, 나는 서서히 곁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아내의 낮은 숨결, 매일 반복되는 하루가 문득 낯설어졌다. 몸과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고,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이유로 지쳐 갔다. 어느새 나는 내 몫의 하루를 버텨 내는 일에만 익숙해졌다.


그곳은, 아내의 집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흘려보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밥을 먹으며 눈은 작은 화면을 향했고, 아이들의 말에 건네는 대답은 점점 늦어졌다. 아내와 아이들 사이에 오가는 눈빛과 손짓이, 내겐 모르는 언어처럼 멀게 들렸다.


가끔 창밖을 서성이는 사람처럼, 아내의 집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그 창 너머로 나를 향한 시선이 닿을 때가 있었다. 아이가 내 이름을 부르거나, 아내가 식탁 위에 조용히 내 몫을 남겨둘 때면, 그 작은 무게가 유난히 오래 남았다.

어느 밤, 큰아이는 열감기로 끙끙 앓았다. 병원에서 받아온 해열제를 먹이고, 이마에 물수건을 얹어 주었다. 나는 곁에 앉아 물수건을 자주 갈아 주었지만, 내 손에는 내내 작은 화면이 쥐어져 있었다. 그러다 물수건이 아이 눈 아래까지 흘러내린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빠, 뭐 봐?"


아이가 희미하게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 말에, 숨이 잠깐 멎는 듯했다. 무심코 올려다본 아이의 얼굴. 열로 붉어진 그 얼굴 너머에서, 나는 나 자신을 마주한 것 같았다. 작은 몸을 지탱하며 시선을 건네는 아이를, 나는 외면하고 있었다.


물수건을 얹는 일 하나로 충분하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어딘가 크게 틀어졌다는 걸 알았지만,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아이 곁에 있었지만, 그 마음에는 닿지 못했다. 그날 밤, 아이들이 숨 쉬는 그 집에서 나는 가장 먼 곳에 서 있었다.


다음 날, 아이의 열은 조금 내렸다. 나는 조용히 곁에 앉아 물수건을 갈아 주었다. 그 얼굴을 들여다보는 내 마음이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아이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요구하지도, 꾸짖지도 않는 눈빛. 그저, 함께 있어주기를 바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가 내민 그림책을 함께 넘기고, 짧은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최대한 눈을 맞추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시간은 매일 밤 어둠 속에서 이어졌다.


불 꺼진 방, 나는 아이들을 위해 갓 지어낸 동화를 들려주었다. 아이들은 아침이면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 웃었다. 밤이 오면 또 들려 달라 졸랐고, 나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지어냈다. 그 웃음과 기대하는 눈빛이, 나를 다시 이곳에 살게 했다.


아무렇게나 벗어 둔 옷가지, 식탁 위 어질러진 그릇, 데크 끝에서 들리는 발소리. 그저 배경처럼 흘려보내던 것들이 이제는 내가 함께 엮여 있는 자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아이의 울음보다 아내의 어깨가 먼저 보였다. 아내의 피곤한 한숨은 나를 밀어내는 게 아니었다.


그건 내가 돌아오기를 오래 기다리는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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