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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꿈(상)

by 봄해
"그건 꿈이 아니야. 왜 그런 걸 꿈이라고 해?"


조금 전까지 교실엔 기대와 조금의 들뜸이 감돌았다. 꿈을 묻는 그분의 말에 교실 안에 아이들은 하나둘 손을 들고 자신의 꿈을 말했다. 그리고 아내의 차례가 되자, 잠시 머뭇거림이 있었다. 수줍음이 많은 아내는 사람들 앞에서 말을 꺼내길 어려워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작은 입술에서 의외로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그 순간, 교실 공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선생님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건 꿈이 아니야. 왜 그런 걸 꿈이라고 해?" 말끝은 날카로웠고, 몇몇 아이들이 눈치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아내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선생님을 향해 똑바로 눈을 들었고,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저는, 엄마가 되는 게 꿈이에요." 작은 어깨엔 떨림이 있었지만, 눈빛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선생님이 틀린 거라고, 당신이 잘못된 기준으로 꿈을 나누고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아내는 그 장면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단지 어린 날의 발언이 아니었다. 지금의 아내를 이루는 단단한 근거였다.


국민학교 시절, 교실 한복판에서 엄마가 되고 싶다고 말한 그 한마디. 어쩌면, 그 기억 하나로 지금의 시간을 버텨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네 번째 모유 수유 중인 아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함몰된 유두 탓에 아이의 입은 자꾸 미끄러졌고, 입을 맞췄다 놓기를 반복하던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다가도 다시 입을 벌렸다. 젖을 찾는 두 눈이 위로 향할 때, 아내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아이의 몸을 조심스레 감쌌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물 수 있도록 팔에 힘을 주었고, 그 사이 목덜미엔 땀이 맺혔다. 아내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오직 아이만을 바라보며, 그 작고 끈질긴 입술이 결국 제대로 젖을 물게 되는 순간을 기다렸다. 아내의 꿈은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도 아니고, 조직을 이끄는 누군가도 아니며, 세상에 오르는 일도 아니었다. 그건 아무도 그 가치를 재지 않는 일상에서 아내의 생애가, 네 남매의 웃음과 울음 속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엄마, 김치 좀 빨아줘." 다섯 살 무렵, 아내는 그렇게 말했다. 매운 김치를 먹기 어려웠던 어린 입맛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말속엔 또 다른 마음이 숨어 있었다. 아내가 기억하는 건 매운맛이 아니라, 엄마가 없으면 더는 김치를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이상한 두려움이었다. 그때의 상황은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어렴풋이 집 안의 공기가 무겁고 불안하게 흔들렸던 기억만큼은 또렷했다. 어린 마음에도 엄마와 헤어지게 될지 모른다는 앞선 감정이 스쳐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와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은 집 앞에 멈춰 선 택시에 오르게 되었다. 동생은 누군가 쥐여준 과자를 들고서 울지 않고 순순히 뒷좌석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어떻게든 차를 타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 차에 오르면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끝까지 버텼지만, 결국 작은 몸은 두 팔에 들어 올려져 택시 안에 실렸다. 창밖으로 엄마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아내는 차창을 통해 멀어지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그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떠올릴 때마다 아내의 마음을 젖게 했다.


몇 시간 뒤, 낯선 시골 마을에 도착했다. 멈춰 선 택시 앞에는 육십 대 노부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두 자매는 줄곧 할아버지와 할머니 곁에서 지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작은 논밭을 일구며 근근이 살아갔고, 아내는 어느새 모내기를 돕고 집안일을 익히며 자랐다. 할머니와 함께 장에 나가 농작물을 바구니에 담아 팔았고, 고모들은 안쓰러운 마음에 시골에 올 때마다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아버지가 가끔씩 내려와 딸들을 만나고 가곤 했지만, 다녀간 뒤엔 언제나 길고 선명한 뒷모습만 아내의 마음에 남았다.


그러던 어느 밤이었다. 아내의 몸이 점점 뜨거워졌다. 이마에서부터 목덜미,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기운이 없어 말조차 흐려졌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들이 자꾸 어긋나 있었다. 할머니는 거친 손으로 아내의 이마를 짚었다. 아내는 이상하리만치 헛소리를 중얼거렸고, 그 속에서 선명한 문장 하나가 튀어나왔다. "할머니… 나 그냥 죽여줘…" 작고 마른 아내의 몸에 오래도록 쌓여 있던 말 못 할 외로움과 두려움, 막막함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왔을까. 할머니는 어린것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며 당황했지만,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등을 쓸어내리며 밤새도록 아내의 곁을 지켰다.




엄마가 되고 싶다는 아내의 그 말은 단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사람이 되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품고 온 가장 오래된 바람이었으며 동시에 오래된 결핍을 이제 누군가에게 채워주고 싶다는 다짐이었다. 사람들이 바라는 좋은 꿈의 목록에 들어가지 않아도, 그건 어린 마음속에 가장 간절히 자리 잡고 있던 이름이었다. 그리고 아내는 밤마다 아이를 안고 재웠다. 젖을 잘 물지 못해 자꾸 입을 떼는 아이를 조심스레 품에 눕히고, 한밤중 열나는 아이 곁에 앉아 젖은 수건을 다시 덮었다. 누군가처럼, 말없이 아이의 등을 오래도록 토닥였다. 그때 아내는 할머니의 거친 손길을 떠올렸다. 그 손은 아내가 가장 오래 품어온 꿈이었다.


그리고, 그 꿈은 그 시절 자신에게 얼마나 엄마가 필요했는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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