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홀로 육지로 떠났다.
나는 세 아이를 돌보며 싱크대 앞에 섰다. 계란밥을 비벼 그릇에 나눠 담고, 수박은 먹기 좋게 잘라 반찬통에 눌러 담았다. 아이들 앞에 밥을 놓는 사이, 또 다른 아이 하나가 싱크대 쪽으로 다가왔다. 높이를 재듯 손을 뻗어, 살짝 튀어나와 있던 도마를 잡으려 했다. 나는 눈이 커진 채, 급히 다가갔지만, 이미 도마와 그 위의 칼이 동시에 바닥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아이를 얼른 안아 올려, 다친 곳은 없는지 서둘러 살폈다. 다행히 식칼은 아이를 비켜 바닥을 쳤다. 잠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제때 칼을 치우지 않은 내 잘 못이었다.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쉽게 위태로울 수 있는지, 그날 실감했다.
아내의 할머니는 의식 없이 요양병원에 누워 계셨다. 육지의 식구들이 하나둘 병원으로 모였다. 그 무렵, 아내는 넷째 아이를 품고, 출산을 석 달 앞두고 있었다. 무거운 몸보다 마음이 먼저 가라앉아 보였다. 어쩌면 이미 마음은 그곳에 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며칠 뒤, 아내는 내게 카드 한 장을 달라고 했다. 다음날 가방 하나를 챙긴 아내는 불러오는 배를 안고 천천히 일어섰다. 제주에 온 뒤 처음으로 아이들을 남겨두고 혼자 떠나는 길이었다. 아내는 복잡한 마음을 가만히 눌러 담았다. 걱정도, 그리움도, 미안함도. 그 모든 감정을 품은 채 천천히 집을 나섰다. 그날의 뒷모습은 손녀라기보다, 오랜 세월 곁을 지켜온 딸에 가까웠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묵은 사랑 앞에, 아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늦은 아침, 아내는 아이들에게 아침밥을 먹이고 짐을 챙겨 제주공항으로 떠났다. 뱃속의 작은 몸짓을 품은 채, 광주공항에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남원으로 갔다. 아내는 일부러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렸다. 창밖으로 스치던 익숙한 풍경을 천천히 걷고 싶어서였다. 중복이 지난 한여름, 한때 아이들 웃음으로 가득하던 냇가 주변에는 이제 빈집만 길게 이어져 있었다. 아내는 빈집 사이를 지나, 자신이 자라온 시골집 앞에 섰다. 대문 없는 입구를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자, 해질 무렵 밭일을 마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발걸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닳아진 신발을 끄는 소리, 아내를 부르는 낮은 목소리. 벽에 호미를 거는 소리가 들려왔고, 포대자루를 바닥에 내려놓는 둔탁한 울림. 곧이어 수돗가에서 흙 묻은 발을 씻는 물소리까지 겹쳐 왔다. 분명 아무도 없는데, 마당은 오래된 소리들로 가득했다. 아내는 불러온 배를 움켜 안고, 고개 숙인 채 울었다. 마당 가장자리에, 누군가 심어 둔 방울토마토가 햇빛을 머금고 붉게 매달려 있었다. 아이들 얼굴처럼, 그 작은 열매들이 묵묵히 아내의 울음을 바라보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 아내는 빨갛게 익은 열매를 하나씩 따 입에 넣었다. 오래된 그리움과 이별의 마음을 함께 삼키듯, 어린 시절의 신맛이 가슴을 서서히 감쌌다.
어느 여름날, 아내와 동생은 뒷산 밭 가장자리에서 소곤거리며 놀고 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잠시 쉴 때마다 담배를 피웠고, 담배 한 모금으로 숨을 고르고는 다시 고랑으로 들어가 밭일을 했다. 밭둑 위에는 담배 한 갑과 라이터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아내는 라이터를 작은 손에 움켜잡았고, 할머니가 하던 것처럼 몇 번 라이터 볼을 굴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 옆에 있던 마른 솔잎 위에서 작은 불꽃이 일었다. 하얀 연기가 오르더니 벌건 불길이 바람을 타고 번져갔다. 아내와 여동생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었다. 그때 밭에서 일하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다급히 달려와 주변의 소나무 가지를 꺾어 불길이 옮겨 붙은 곳을 쳐내며 불을 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불은 겨우 잡혔고, 두 분은 숨을 몰아쉬며 검게 그을린 숲 한가운데에 털썩 주저앉았다. 두 분은 아내를 다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라이터를 거기 두고 간 게 잘못이었다며 아무 말 없이, 두 자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다시 돌아본 그 집에서, 금방이라도 찾아올 이별 앞에 서 있는 듯했다. 스민 슬픔을 안고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면회 시간에 맞춰 도착하니, 병원 문 앞 복도에 침대 하나가 밀려 나와 있었다. 그 위에는 눈을 감은 할머니가 누워 계셨다. 코로나 방역으로 실내에 들어갈 수 없어, 아내는 반쯤 열린 문턱에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침대 너머 접수창구에선 직원들이 분주히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내는 잠시 망설이다 발을 안으로 옮겼다. 조심스레 할머니의 손을 감싸 쥐고, 천천히 불렀다. "할머니..." 그러자, 할머니의 손이 움직였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아내의 손을 되쥐었다. 의식은 멀리 있었지만, 몸은 아내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내는 말을 이었다. "우리 할머니..."
고생했어. 이제 편히 좋은 곳으로 가.
마지막 말을 전하자, 직원 한 분이 다급히 달려와 병원 안으로 들어오면 안 된다고 아내를 밖으로 밀어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아내는 할머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어릴 적, 다그치지 않고 그저 집 안으로 이끌어주던 거친 손을 아내는 마지막으로 붙잡았다. 이제는 할머니가 머물 더 넉넉하고 따뜻한 집으로 편히 가시길 바랐다. 그 순간, 아내의 오래된 꿈이 남김없이 눈물로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