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에게 간은 없었다
토끼에게 간은 없었다
이미지 출처: ChatGPT 생성형 AI — 실제 인물이 아닌 긴 귀를 가진 ‘상징적 인물’의 표현입니다.
[문은 안쪽으로 무겁게 열렸다.]
그 문이 바깥으로 열린 적은 없었다. 소리와 냄새, 기록은 모두 안쪽에서 닫혔다. 오늘도 줄은 복도 끝에서부터 이어졌다. 번호가 불리고, 발걸음이 문턱을 넘었다. 형광등이 한 번 떨고, 철제 침대 위 하얀 천이 펼쳐졌다.
방 안에는 대야 세 개가 있었다. 한쪽엔 물, 한쪽엔 장갑, 마지막엔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대야에서 장갑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을 밀어 넣자, 얇은 고무막이 살에 밀려 올라갔다. 장갑은 젖은 듯 번들거렸고, 피임고무 냄새가 눅눅하게 스며들었다.
긴 귀를 가진 그녀가 철제 침대에 눕혀졌다.
갓 피어난 꽃잎처럼 고운 얼굴, 아직 앳된 볼은 두려움에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젖은 머리칼이 뺨에 달라붙어 그 아름다움을 가렸지만, 가늘게 떨리는 눈매와 앙상한 어깨는 여전히 꽃다운 나이를 말해주었다.
흰 천이 몸 위로 덮였다.
다리가 벌려졌고, 몸은 눌려 움직일 수 없었다. 차갑고 낯선 장갑 낀 손이 마치 장기를 꺼내듯 그녀의 살을 뒤졌다.
복도에 줄을 선 군인들이 차례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汚い朝鮮女." (더러운 조선년.)
각자의 차례가 오면, 같은 말이 반복되었다. 가슴은 거칠게 쥐어짜였고, 다리는 강제로 벌어졌다. 흰 천 아래에서 그녀의 숨은 점점 얕아졌다. 천이 들썩일 때마다 방 안 공기는 눌려 내려앉았다.
금속 기구가 부딪히는 소리, 장갑이 벗겨지는 소리, 군화의 발소리. 소리들은 차례대로 겹쳐졌다. 방 안의 시간이 잠시 끊겼다. 그녀의 배에서 열이 올라왔고, 빈 대야에는 검붉은 조각이 얕게 고였다. 벗겨진 장갑은 물이 든 대야에 버려졌다. 고무막이 젖어들며 번들거렸고, 물 속에는 누런 액체가 천천히 퍼졌다.
그녀의 간은, 끝내 빼앗겼다.
용궁—붉은 햇발로 바다를 물들인 욱일의 제국은 군인들을 위한 간이 필요했다. 자라는 검은 섬에서 그녀들에게 약속했다. "일자리가 있다." "섬을 건너면 돈을 준다." 때로는 말도 없이, 긴 귀를 움켜쥐고 끌고 갔다. 방은 늘 차 있었고, 장갑에는 마찰이, 천 아래 마지막으로 흔들리던 긴 귀를 가진 그녀의 숨만이 바닥 틈새에 깊숙이 남았다.
"엄마가… 기다릴 거야…"
긴 귀를 가진 그녀는 그 말만 가슴속에서 되풀이했지만, 어느 순간엔 그조차 소리 없는 메아리로 흩어졌다. 새벽이 다가오자, 스위치가 내려가듯 천이 다시 덮였다. 대야가 비워지고, 금속기구가 제자리를 찾았다. 곧바로 다음 절차가 반복됐다.
기록하는 손은 막다른 복도 끝에 있었다.
그 손은 그녀의 이름을 적지 않았다. 그저 소모된 장갑과 군화의 수, 교대 시간만을 채웠다. 다음 번호가 문턱을 넘어오면, 방의 공기는 다시 같은 높이로 가라앉았다. 흰 천은 다시 펼쳐졌고, 같은 순서가 다시 시작되었다.
검은 획이 종이 위로 조용히 걸어갔다.
한 줄, 아주 짧은 문장.
간은 없었다.
그러나 벽과 바닥,
그 숨죽인 공간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아빠, 위안부가 뭐야?"
올해, 열 살이 된 첫째 딸이 물었습니다. 아내는 아직 감당하기 어려운 주제라며,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말해 주자고 했습니다.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라고도 했지요. 그러나 제 안에는 의문이 남았습니다. 정말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까요. 저 또한 위안부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지만, 왜 그분들이 지금도 아픔 속에 계신지, 왜 여전히 우리 사회의 상처로 남아 있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한라대학교 정문 앞, 작은 공원에는 소녀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길을 자주 지나치면서도, 저는 한 번도 그 앞에 멈춰 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딸의 물음과 다음 작품을 떠올리던 날,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앞에 섰습니다.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은 걸까?“
그 뒤로, 그 앞에 설 때마다 발걸음을 멈추고 조금씩 글에 물음을 담아 보려했습니다. 그분들의 고통을 제 언어로 옮기는 일은 여전히 두렵습니다. 이 글이 피해자와 유족께 불경이 되지는 않을지, 전문 작가도 아닌 제가 감히 다뤄도 되는 주제인지 망설였습니다.
그럼에도 잊혀서는 안 될 이 비극을 제 안에 먼저 새기고, 읽는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흔적 하나라도 남기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소설은 ‘위안부’라는 아픔을 배경으로 하되, 동시에 ‘한 남자’의 이야기로 현재를 비추려 합니다. 상처를 응시하는 한 사람의 시선을 통해, 먼저 저 자신에게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나는 무엇을 빼앗긴 채 걸어오지 않았는지 묻고자 합니다.
이 작품은 잊히지 말아야 할 역사의 상처를 기억하며 쓰였습니다. 그러나 작품 속 인물과 사건은 모두 허구이며, 동화적 모티브는 고통을 미화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비극을 드러내는 반(反)동화적 상징과 은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