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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2)

토끼에게 간은 없었다

by 봄해

이미지 출처: ChatGPT 생성형 AI — 실제 인물이 아닌 ‘상징적 인물’의 표현입니다.



잔 안의 얼음이 미세한 금을 내며 부서졌다.


짧은소리가 그녀의 긴 귀를 스쳤다. 귀가 살짝 떨렸다. 내 손끝의 물방울은 녹은 얼음인지, 그녀의 말이 흘린 흔적인지 알 수 없었다.


커피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자, 유리 표면을 훑던 내 손끝에 냉기가 달라붙었다.




"봄 터졌소"

스피커를 타고 도지사의 목소리가 광장 쪽으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등지고 차를 돌렸다. 비는 잦아들었지만, 거리엔 젖은 냄새가 남아 있었다. 관덕정 쪽에서 북소리가 멀어졌다.


"순대국밥 먹을까요?"

시장 골목에서 이수가 말했다.


점심을 마친 뒤, 골목 모퉁이에서 낡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흰 페인트가 벗겨진 철판 위, 글씨만 또렷했다.


동화여관.


문을 밀자 라탄 의자와 화분, 밝은 조명이 보였다.


이수가 전화를 걸자 '공용 세면장' 문이 열렸다. 나온 사람은 예상과 달리 중년의 관리자가 아니었다. 머리를 길게 풀어 내린 젊은 여인이 섰다. 젖은 머리칼 조금이 뺨에 붙어 있었다.


나는 무심코 시선을 멈췄다.


연올리브 가디건 아래로 어둡게 물든 청빛 원피스가 흘렀다. 소매는 가볍게 접혀 있었다. 그녀가 우리 쪽으로 다가와 고개를 낮췄다.


"소방 점검이시죠?"

목소리는 차분했다.


"네. 잠깐만 확인하겠습니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그냥 같이만 봐주시면 돼요."


그녀의 뒤를 따라 로비 안쪽으로 들어갔다. 수신기를 살폈다. 경종이 습기를 먹은 듯, 종소리 대신 '드드드—'하는 진동만 났다. 이수가 수첩에 '경종 불량'이라 적었다.


이수는 수첩을 덮고 주위를 둘러봤다.

"저기. 세면장, 들어가 봐도 될까요?"


그녀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이수가 먼저 공용 세면장 문을 열었다. 타일에서 배어 나온 소독약 냄새와 비눗물 향이 섞여 있었다. 노란 벽등 아래,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안쪽의 작은 탕에서는 습기가 피어올랐다. 두세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로 하늘색 모자이크 타일이 흐린 빛을 반사했다.


우리는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복도는 좁고, 문들은 가깝게 붙어 있었다.


"빈 객실이 있을까요?"

나는 잠시 그녀와 눈길이 마주쳤다가 이내 흩어졌다.


"지금은 손님들이 다 계세요. 끝에 하나 있긴 한데"

입술 끝에 묘한 주저가 스치듯 했으나, 곧 차분히 말을 이었다.


"거긴 객실로 사용하지 않아요. 그래도 보시겠어요?"


이수가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열리지 않자, 힘을 주어 안쪽으로 밀었다. 안쪽은 텅 빈 방이었다. 시멘트 맨바닥엔 먼지가 얇게 내려앉았고, 습기가 벽 군데군데에 스며 얼룩을 만들었다. 창문은 작고 높게 나 있어 바깥 풍경 대신 흐린 빛만 들어왔다. 공기는 무겁고, 오래 닫혀 있던 냄새가 은근히 코를 찔렀다.


구릿빛 금속 대야가 놓여 있었다.

낮은 받침대 위에 얹힌 채, 대야의 표면엔 오래된 물때가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나는 시선을 그녀에게 옮기며 말했다.

"나중에 객실로 사용할 생각이라면, 피난 방향에 맞춰 문을 고쳐 주세요."


그녀의 눈꺼풀이 짧게 떨렸다. 입술이 스스로에게 들려주듯 낮게 중얼거렸다.

"이 문은밖으로 열린 적이 없어요."


그녀가 고개를 조금 돌리는 동안, 흘러내린 머리칼이 빛을 끌어당겼다. 어둠 속에서 흰 윤곽이 길게 떠오르고, 빛이 그 선을 따라 얇게 번졌다. 위로 길게 선 귀가 드러났다. 실내등을 받은 귀끝이 한 번, 느리게 떨렸다. 내 발끝이 바닥에 붙고, 들이쉰 숨이 가늘게 멈췄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조심하세요, 문턱이 높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계단을 내려왔다. 복도의 공기는 여전히 눅눅했고,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습한 냄새가 조금씩 희미해졌다. 로비의 불빛이 보이자, 그제야 숨이 조금 가라앉았다.


"커피 드릴까요?"

그녀는 이미 갓 내린 커피를 따르고 있었다.


"혹시 차갑게도 될까요?"

금속 집게가 딱 하고 울리고, 얼음 몇 개가 유리벽을 스치며 찰랑 떨어졌다.


잔 안의 얼음이 '쩍' 하고 갈라졌다. 짧은소리가 그녀의 긴 귀를 스쳤다. 이수는 조사서의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날짜를 적고, 서명을 가리켰다. 나는 무심히 그녀의 머리 위를 스치듯 바라보았다.


이수가 마지막 서명란을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는 조용히 펜을 들어 이름을 적었다.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올리자, 흰 선이 또렷해졌다. 이수는 그저 기한 내 경종을 고쳐달라고 할뿐이었다. 그녀가 조사서를 건넸다.


"이제… 끝인가요?"

그녀는 펜의 윗단을 눌러 딱 하고 닫았다. 어딘가 차가운 여운이 남았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시장 골목은 이미 사람들로 분주했고, 아케이드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혼란스러운 내 머릿속 어딘가를 따라 두드려댔다.


혀끝에 걸린 질문이, 비 소리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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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잊히지 말아야 할 역사의 상처를 기억하며 쓰였습니다. 그러나 작품 속 인물과 사건은 모두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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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