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에게 간은 없었다
이미지 출처: ChatGPT 생성형 AI — 실제 인물이 아닌 ‘상징적 인물’의 표현입니다.
그날, 관덕정 광장은 북소리와 굿판의 장단으로 출렁였다. 흰 옷을 입은 심방들이 신구간을 마치고 돌아온 신을 맞이하듯 춤을 추었고, 사람들은 우산을 펼친 채 봄을 여는 굿판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 무리 속에서 한 여인이 서성였다. 우산 끝에서 떨어진 빗물이 발치에 먹빛을 번지 우고 있었다. 그녀가 우산을 기울이며 고개를 숙이자, 머리 위로 긴 귀가 빗물에 젖어 느리게 늘어졌다.
지하 복도를 지나 옷장에서 근무복을 꺼냈다. 피부에 닿는 거친 천의 감촉이 아직은 어색했다. 낯설던 구두만큼은 제법 발에 익었는지, 계단을 오르는 걸음은 조금 가볍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익숙한 인사가 흩어졌다. 나는 서류를 챙겨 가방에 넣으며 하루 일정을 머릿속에 그렸다.
"비 올 것 같아서 조금 일찍 나가볼게요."
이수가 차 키를 들어 올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차에 오르자 와이퍼 자국이 남은 유리 너머로 잔비가 번졌다. 조수석에서 서류철을 펼치니 첫 장에는 오늘 조사할 건물의 현황이 보였다. 운전은 이수가 맡았다. 나보다 어리지만, 내근 경력은 그가 더 오래였다.
"오늘 표본 대상은 작으니, 오래 안 걸릴 겁니다."
이수가 방향지시등을 넣으며 속도를 눌렀다.
「동화여관, 사용승인일 1944년 3월 21일」
서류 첫 장, 맨 위에 적힌 건물명이 눈에 들어왔다. 광복이 오기 직전까지 허가가 난 건물이란 뜻일까. 허가일 숫자 몇 자리에 오래된 한기가 번져 나오는 듯했다.
"증축이나 변경 흔적은 없어. 불법 컨테이너만 없으면 좋을 텐데…"
내가 중얼이듯 말하자, 이수는 웃으며 핸들을 툭 쳤다.
"그러게요. 근데, 어제 행사 점검을 못 해서… 먼저 하고 갈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철을 덮었다.
차창 밖으로 바람이 매달려 흘렀고, 우리는 관덕로를 따라 동문시장 앞 모퉁이로 접어들었다. 관덕정 광장에는 흰 천막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자 빗줄기가 가늘게 흩뿌렸다.
"이수야, 펌프실 어디 있지?"
이수는 주위를 살피다 목관아 한켠의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처마 그림자와 기와의 등줄기가 다른 건물과 비슷했다. 녹슨 자물쇠를 풀고 문을 젖히니, 좁은 실에 붉은 펌프와 배관이 각을 세운 채 얽혀 있었다.
오래된 벽에 새긴 글자의 획처럼, 굵고 꺾인 선들이 한 방향으로 모였다. 나는 압력계 눈금을 따라 시선을 눌러 옮겼다.
"펌프만 도는지 볼까요?"
이수가 스위치를 수동으로 돌리고 버튼을 눌렀다.
'윙—' 금속이 낮게 깨어났다. 나는 평소처럼 펌프의 움직임을 살폈다.
"이제 자동으로 돌릴게요."
펌프를 정지시킨 뒤, 스위치를 자동으로 넘기자 멈춰 있어야 할 펌프가 계속 돌아갔다. 기계음이 점점 높아지며, 좁은 공간 안이 진동했다. 나와 이수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쇳소리가 울리며 관이 떨렸다.
"우우웅— 쿵! 쿵!"
철과 물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서까래와 기와를 타고 번져갔다. 단순한 기계음이 아니라,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그 소리에 놀라 몸을 뒤척이는 듯했다. 압력계 바늘은 한동안 떨리기만 하다, 간신히 멈췄다.
펌프의 울림이 잦아들자, 우리 둘의 숨이 동시에 빠져나갔다.
"후우… 배관 터지는 줄."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니, 싸늘한 공기 사이로 북소리가 스며들었다.
광장으로 나가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정자 안에는 흰 떡과 과일, 꽃이 올려진 제상이 놓여 있었고, 그 앞에 무복을 입은 심방들이 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북과 징이 번갈아 울려 퍼졌고, 탈을 쓴 무리들이 동선을 맞추며 몸을 풀고 있었다. 웃음 섞인 목소리로 박자를 맞췄다.
장단이 빗방울을 끌어안고 광장을 감쌌다.
발밑이 얕게 들썩였고, 돌담과 기와는 울림을 고이 받아냈다. 조금 전 펌프실에서 올라오던 진동이 북과 징, 빗소리와 포개져 되돌아왔다.
사람들 어깨 사이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우산 끝에서 물이 '뚝—' 떨어졌고, 머리 위로 긴 귀가 드러났다. 귀 끝이 북소리에 맞춰 가늘게 떨렸다.
나는 이수를 팔꿈치로 건드렸다.
"저기. 저 여자… 긴 귀, 보여?"
이수가 시선을 좇아 눈을 작게 떴다.
"네? 무슨 귀요?"
가슴이 물러앉듯 둔탁해졌다. 눈을 비벼도 귀는 그대로였다. 나는 사람들 틈을 살짝 가르며 앞으로 나섰다.
북이 한 박 먼저 놓고, 징이 뒤를 따라왔다.
탈을 쓴 무리들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그 물결 속에서 그녀의 귀가 길게 늘어났다가, 빗줄기와 섞여 아른거렸다. 탈처럼 보였으나 종이 질감은 없었다. 젖은 살결이 부드럽게 떨렸다.
내 시선이 그 귀에 걸려 풀리지 않았다.
뒤에서 이수가 불렀다.
"반장님! 지사님 도착하셨대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북소리가 잠깐 멀어지고, 우산들이 한쪽으로 일제히 기울었다. 다시 보았을 때,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엔 비만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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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잊히지 말아야 할 역사의 상처를 기억하며 쓰였습니다. 그러나 작품 속 인물과 사건은 모두 허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