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에게 간은 없었다
이미지 출처: ChatGPT 생성형 AI — 실제 인물이 아닌 ‘상징적 인물’의 표현입니다.
성폭력과 신체적 폭력을 다룬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제주소방서 고이운입니다."
수화기를 귀에 댔을 때, 먼저 작은 숨소리가 스쳤다.
말 대신, 종이를 넘기는 바스락 소리가 났다.
나는 경종 수리 확인차 다시 방문하겠다고 했다.
"오전 열한 시쯤 괜찮을까요?"
짧은 정적 뒤에 좋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통화를 끊자 사무실 소음이 다시 올라왔다. 나는 펜을 집어 들었다. 손이 한 번 움직이자 메모지 위에 곡선 두 개가 나란히 자랐다. 위로 길게 휘어 올라간 선 끝이 서로를 향해 살짝 모였다. 펜 끝이 그 자리에 잠깐 멈췄다.
시선을 모니터 쪽으로 옮겼다. 출장 신청서 결재 화면이 떠 있었다.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결재 상신 버튼을 눌렀다. 손을 떼고 의자를 밀어 뒤로 물러났다.
"팀장님, 출장 다녀오겠습니다."
키보드 소리가 멈췄다.
그가 고개를 들어 얼굴을 한 번 훑더니,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짧게 다녀오라 말하고도 몸을 의자 앞으로 조금 당겼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잠시 나를 보다, 비 오는 날이니 운전을 조심하라고 했다. 조사도 무리하지 말라는 말이 뒤를 이었다.
"그동안 답답했을 텐데… 요즘엔 얼굴이 조금 편안해 보여서, 다행이네."
대답이 막혀 목 안이 먼저 뜨거워졌다.
나는 인사를 짧게 건네고 서류가방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걸음을 떼자, 의자 바퀴가 살짝 밀리는 소리와 창문을 치는 빗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옆자리 직원 둘이 낮게 말을 주고받았다. 웃음 같기도, 한숨 같기도 한 소리가 섞여 흘렀다. 나는 걸음을 조금 더 재촉했다.
차 문을 열고 몸을 밀어 넣었다.
시트가 잠깐 내려앉으며 골반을 받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숨은 오르내렸지만 목과 가슴 사이가 자꾸 막혔다.
엄지가 창문 버튼을 눌렀다. 빗방울 몇 개가 안으로 튀어 들어와 손등을 치고 지나갔다.
맨살이 아니라 두꺼운 장갑이 손을 감싸는 것 같았다. 물방울이 장갑 등판에 박혔다가 튀어 오르고, 물기와 탄 냄새가 엉켜 코끝에 들러붙었다.
와이퍼가 앞유리를 밀어 올렸다.
유리 위 물길이 한 번에 걷히지 않고, 선이 몇 겹으로 갈라졌다. 지워진 자리와 남은 자리가 뒤섞여 앞 풍경이 엉성하게 겹쳐졌다.
손등에는 여전히 빗물이 떨어졌다. 장갑을 끼고 있는 쪽과 맨손인 쪽이 번갈아 보였다.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 유리 위 물길처럼 한동안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휴대폰 알림음이 귓 안쪽을 짧게 두드렸다.
[출근 잘했어? 벌써 보고 싶다.]
곧이어 사진 한 장이 내 얼굴을 붙잡았다.
아내는 조금 젖은 흰 티셔츠를 걸치고 소파에 기대 한쪽 무릎을 세웠다. 밑단이 무릎에서 걸렸다가 내려가, 그 아래로 한쪽 허벅지가 길게 드러났다. 마른 허벅지 근육선이 무릎에서 허벅지 중간까지 곧게 이어졌다.
티셔츠 안쪽에서 젖으로 묵직해진 가슴이 천을 떠받쳤다. 유두 하나가 천을 밀고 있었다.
숨을 들이키자 조여들던 가슴이 조금 풀렸다. 입안에서 웃음이 한 번 걸렸고, 짧게 답을 적었다.
[응… 잘 도착했어. 오늘 일 끝나면, 바로 갈게.]
메시지가 화면 끝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내 안에서도 무언가가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기어를 넣고 차를 움직였다. 소방서 뒷마당이 거꾸로 흘러나갔다.
동문시장 근처에 차를 대고, 우산을 꺼내 들고 내렸다. 골목을 돌아 어두운 모퉁이에서 멈춰 고개를 들었다. 비에 젖은 간판이 희미한 불빛을 머금고 있었다.
문을 밀자 위쪽 종이 짤막하게 흔들렸다. 데스크 뒤에 서 있는 그녀의 머리 위로 길고 하얀 것이 고요히 솟아 있었다. 목울대가 마른 것처럼 내려갔다.
"요즘 비가 자주 오네요…"
입가가 가볍게 접히며, 그녀가 손바닥으로 수신기 쪽을 가리켜 보였다.
"소리만 듣고 바로 멈출게요."
검지가 경종 정지 버튼을 눌렀다.
붉은 불이 툭, 켜졌다. 동작 버튼을 누르자 주경종이 치고 올라왔다.
땡—
손끝이 곧장 정지 버튼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녀 정수리 위, 흰 것이 파르르 떨렸다.
손끝이 수신기에서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조금 들었다. 내 얼굴을 한 번 스치고, 더 위로 올렸다. 내가 바라보던 자리에서 눈이 멈췄다.
"설마, 제 귀가… 보이나요?"
눈동자가 내 눈을 꽉 붙들었다.
그녀가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발끝이 바닥을 살짝 긁었다. 파벽돌 하나가 ‘탁’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떨어진 자리를 따라 벽 틈에서 검은 물이 배어 나왔다. 물이 줄눈을 타고 내려가 바닥으로 번졌다. 벽이 짧게 숨을 토하듯 안쪽에서 들썩였다.
"고이운 씨!"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솟았다.
그녀 손이 수신기 위 내 손등으로 내려왔다. 피부 위로 따뜻한 무게가 얹혔다. 손등과 손바닥 사이에 갇힌 열이 바로 피로 올라왔다.
시야 안으로 그녀 얼굴이 더 가까이 끌려왔다. 커진 눈이 다시 내 눈을 붙들었다. 그녀 검지가 내 손등 살을 더 깊게 눌렀다.
수신기 표면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붉은 불빛만이 말없이 켜져 있었다. 그녀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죄송해요. 갑자기…"
그녀가 손을 거둬갔다. 손바닥이 떨어져 나가자 피부에 붙어 있던 온기가 가늘게 끊어졌다.
긴 귀가 아직도 여릿하게 떨리고 있었다.
"조금 전 눈이, 잠깐 비어 있었어요…"
손가락이 컵을 스쳤다. 마른 소리가 작게 났다.
나는 식어 가는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비어 있었다고요…?"
목 안쪽에서 낮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스탠드 불빛이 눈동자 위를 한 번 훑고, 눈 안쪽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손바닥에 닿는 게 달라졌다.
테이블 위 단단한 면이 밀려나고, 젖은 천이 대신 피부에 달라붙었다. 곰팡이 섞인 눅눅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좁은 방, 허벅지 밑 젖은 천이 침대 끝에서 내 살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누군가 내 소매를 거칠게 걷어 올렸다.
팔 안쪽이 그대로 드러났다.
누렇게 번진 멍들이 줄처럼 박혀 있었다. 거친 손이 팔을 비틀어 움켜쥐자, 살이 한쪽으로 몰려 일그러졌다. 바로 옆에서 군복 소매가 스쳤다. 붉은 십자 완장이 시야 가장자리에 걸렸다. 그 손이 주사기를 집어 들었다. 희뿌연 액체가 안에서 가늘게 흔들렸다. 바늘 끝이 팔 안쪽으로 다가오자, 피부가 저절로 뒤로 물러나는 것 같았다.
내 손등이 그 손목을 세게 쳤다.
주사기가 허공에서 돌아 쇠 쟁반 위로 떨어졌다.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말이 낮게 튀어나왔고, 곧 뺨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침대틀 모서리가 뒤통수를 찍었다. 뒤에서 손이 목덜미를 꺾었다. 팔과 허벅지 위로 몸무게가 그대로 내려앉았다.
바늘이 팔 안쪽을 찔렀다. 피부 밑으로 둔한 압력이 밀려 들어왔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감각이 팔 안쪽을 따라 조금씩 번졌다. 그 자리가 안에서부터 둔탁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주사기가 다시 쟁반을 튀기고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바늘 끝에서 흘러나온 액체 두엇이 나무 바닥에 박혔다.
희끄무레한 얼룩이 바닥결 사이에서 천천히 번져갔다.
거친 손이 허리께를 한 번 훑더니, 옷자락을 옆구리 쪽으로 아무렇게나 걷어 올렸다. 허벅지를 덮고 있던 천이 발목까지 밀려 내려가 살이 드러났다. 손이 곧바로 허벅지 안쪽을 움켜쥐었다. 나는 무릎을 붙이고 다리를 끌어당겼다. 군복 소매가 무릎 안쪽을 한 번 쳐내리자, 두 다리가 바닥 위에서 비틀리며 벌어졌다. 발뒤꿈치가 나뭇결을 긁고 미끄러졌다. 허벅지 안쪽이 찢어지는 듯 당겼다. 팔 안쪽 주사 자리가 동시에 욱신거렸다.
눈이 바닥에 박힌 희끄무레한 얼룩 두엇에 멎었다.
조금 전 바늘 끝에서 떨어진 액체 자국이었다. 그 얼룩 위로, 지금 내 몸을 짓누르는 무게까지 밑으로 번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철제 침대틀이 한 번 삐걱거렸다.
"고… 고이운 씨!"
마지막 음절이 귀 안쪽에서 터졌다.
나무 바닥과 젖은 이불, 벌어진 다리가 눈앞에서 서서히 밀려났다. 손아귀에서 축 늘어진 천이 빠져나가고, 다시 단단한 것이 잡혔다. 손바닥 아래로 나뭇결이 만져졌다. 탁자 표면이었다. 식은 커피 냄새가 늦게서야 돌아왔다. 숨이 가슴 안쪽에서 크게 치받더니, 거칠게 내려앉았다.
고개를 들었다.
작은 탁자 건너편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내 손등은 이미 그녀 손에 감겨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떨렸다. 스탠드 불빛이 그 마디를 타고 흘렀다. 머리 위로 솟은 긴 흰 귀가 여릿하게 흔들렸다.
눈이 시큰해졌다. 입술이 먼저 떨렸다.
"숨…"
목 안에서 걸린 소리가 반쯤만 빠져나왔다. 끝음이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흘렀다. 내 가슴께에 이마를 대고 속삭이던 아내 입술 모양 그대로, 입술이 천천히만 움직였다.
"숨… 놓지 말고… 숨… 놓지 말고…"
말을 내뱉자 시야가 한꺼번에 물컹해졌다.
손을 빼지 못한 채 몸을 앞으로 깊게 숙였다. 이마가 그녀 손등 가까이까지 내려갔다.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탁자 위와 그녀 손등을 적셨다.
이 작품은 잊혀선 안 될 역사의 상처를 기억하며 쓰였습니다. 특히 일본군 위안소에서 성병 예방의 명목으로 여성들에게 주입했던 이른바 No. 606 주사제를 포함한 폭력적 의료 행위와 그와 맞물린 몸을 빼앗는 폭력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다만 작품 속 인물과 사건은 모두 허구이며, 실재 피해자 분들의 삶을 직접 재현하거나 특정 개인을 모델로 삼지 않았습니다.
주사의 목적은 일본군의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 성병 확산을 통제하는 데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