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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무연고 처리해주세요.

아내의 글

by 봄해

이 글은 단체의 낭독 요청에 따라, 남편의 글 「꼭, 무연고 처리해 주세요」를 듣고 난 뒤 아내가 자신의 마음을 덧붙여 쓴 글입니다.


남편은 저와 결혼하기 전.

연애하던 때에도 편지를 한 장 두 장 써 모아 작은 책처럼 엮어, 제가 일하던 곳으로 보내주곤 했습니다. 그렇게 금세 의미 있고 깊은 글을 써 내려가는 그가 부럽기도 했고, 무엇보다 사랑스러웠습니다.

결혼을 하고 네 아이를 키우며 살다 보니, 남편이 주기적으로 자기만의 글을 쓰는 모습을 쉽사리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수파자에서 낭독 강의를 신청했다며, 매주 자신이 쓴 글을 저와 아이들 앞에서 읽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의 글을 듣다 보면 저도 모르게 눈물을 쏟곤 했고, 그 글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우리의 대화도 점점 더 깊어져 갔습니다.

그동안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고만 여겼던 시간들마저, 사실은 남편에게 또 다른 '씀'의 시간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꼭, 무연고 처리해 주세요‘는 무연고 상태로 고인이 되신 아버님의 시신을 인수하고 홀로 장례를 치르던 남편의 모습이 겹쳐져 오는 글이었습니다. 남편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던 짧은 외침 같은 한 문장이, 담담한 문장들 사이로 제 안에 오래 남았습니다.


아버님은 집을 떠나오신 후, 어쩌면 평생 연고자 없이 사셨지만, 결국 남편의 글 속에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다시 발견되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만은 연고자인 아들의 품에서 무연고자 아닌 모습으로 조용히 떠나실 수 있었습니다.


남편이 지친 얼굴로 아버님의 유골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날 저녁, 저는 남편을 꼭 안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함께 한라산 자락 한켠에 아버님의 유골을 안장했습니다.


저는 육지를 떠나 두 아이를 데리고, 남편의 손을 잡고 제주로 건너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저는, 제 고향인 전북 남원에 서 있습니다.


결혼 전까지 제가 살아왔던 이곳 어느 호텔 방에서, 남편이 쓴 글을 다시 읽으며 제가 지나온 시간들을 조용히 더듬어 보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버님의 장례를 홀로 치르던 그때, 저는 만삭의 몸으로 다른 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장례를 마친 지 한 달 뒤, 저희 셋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이,


그 셋째 아이의 생일입니다. 죽음과 탄생이 서로의 문턱을 스쳐 지나가듯 맞닿았던 그 시간을, 이제 저는 이렇게 글과 기억 속으로 다시 불러내어 조용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남편은 매일 밤 아이들에게 즉석 동화를 들려주는 아빠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런 남편을 곁에서 바라보며, 앞으로도 남편의 글이 제 마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저를 더 깊이 알아가 주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지나온 모든 시간이 언젠가 떠올릴 소중한 기억으로 남도록, 저희 가정을 이 자리까지 불러 주시고 그 기억 위에서 감사의 마음을 고백할 수 있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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