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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7)

토끼에게 간은 없었다

by 봄해

이미지 출처: ChatGPT 생성형 AI — 실제 인물이 아닌 ‘상징적 인물’의 표현입니다.



발가락 끝이 마루판을 집어쥐듯 오므라들었다.


옷을 걸쳐 입은 아내가 말없이 내 뒤로 왔다. 두 팔을 내 어깨 위로 올렸다. 가슴과 배 쪽의 따뜻함이 등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고 한동안 팔을 풀지 않았다. 그러다 조용히 손을 거두고 싱크대 쪽으로 걸어갔다.


접시 두어 개를 집어 건조대에 올려놓았다. 행주를 쥐고 물을 짠 다음, 싱크대 가장자리를 닦고 돌아섰다.


"여보, 따뜻한 차라도 줄까?"

아내 목소리가 식탁 위로 흘렀다.


유리컵 안으로 동백티 티백이 떨어지고, 끓는 물줄기가 그 위를 덮었다. 티백 가장자리에서 옅은 붉은색이 번져 나왔다. 맑던 물이 바닥부터 천천히 물들어 갔다.


"오늘… 힘들었지?"

나는 그 말을 듣고 늦게야 허리를 세우고, 앞에 놓인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러면…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소희 씨 집안에도 그런 일을 겪고도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사람이 있었던 거네? 그 마지막이 끝내 소리로 나오지 못해서… 지금은 긴 귀랑 감내자 같은 모양으로 남아 있는 걸까?"


아내 말이 끝났을 때, 나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동백티 붉은색이 컵 바닥 한가운데 엉겨 있었다. 몸을 말고 주저앉은 사람처럼, 더 이상 번지지 않고 그 자리에만 남아 있어 보였다.


"…감내자는, 남들 사이에 있어도 혼자 아물지 않는 사람이래."

나는 컵을 다시 내려다봤다. 동백티 둘레의 물은 거의 맑았다. 혼자만 덜 식은 것처럼 그 자리만 진하게 남아 있었다.


오래된 냉장고에서 윙ㅡ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들은 그런 사람을 감내자라고 부르는 것 같아."

아내가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만약에…"

아내가 내 옆에 바짝 앉았다.


"그 긴 귀를 가진 소희 씨가 정말 감내자라면… 나한테도 조금 말해줘."

내 귀 가까이 얼굴을 가져와 낮게 속삭였다.

"여기… 당신 얘기를 듣는 귀 하나 더 있잖아. 이 귀도 생각보다 되게 잘 들려."

말끝이 살짝 올라갔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이 안 되는 얼굴을 보자, 코끝에서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마루를 집어쥐고 있던 발가락 힘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 사고 말이야…"

거기까지 말하자, 입이 저절로 닫혔다.


손 안에서 호스가 단단하게 부풀어 있었다. 니는 지하층 앞 철문 문고리를 잡아 몸 쪽으로 당겼다. 철문이 열리면서 검은 연기가 얼굴 앞으로 한꺼번에 쏟아졌다. 면체 겉이 연기로 덮였다. 랜턴 불빛이 그 속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호스가 허벅지 안쪽을 스치며 앞으로 밀렸다. 나는 벽을 짚은 손을 떼지 않은 채 한 걸음씩 호스를 끌고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앞은 시커멓게 막혀 있었다. 면체 안쪽에 낀 김이 유리 위로 다시 들러붙었다. 랜턴 빛이 연기만 한 번 핥고 돌아왔다. 어디에도 화점은 보이지 않았다.


천장 쪽 연기가 한 번에 들썩였다.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다시 입김처럼 밀려 나왔다. 무릎 위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게 부풀었다.


짧은소리가 났다.

ㅡ펑.


헬멧 위로 뜨거운 공기가 쏟아져 내려왔다. 랜턴 불빛이 천장 쪽에서 번쩍였다. 검은 연기가 그 빛을 머금더니, 위에서부터 불이 붙기 시작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바닥 쪽으로 던졌다. 가슴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내려온 불기운이 등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장화 안에서 바닥만 긁던 발가락이, 다시 마루판을 눌렀다.


아내가 티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내 등을 천천히 쓸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붉은 눈시울이 먼저 보였다. 병실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내 손을 잡고 있던 그 얼굴이었다.


"다행히… 다 살아 나왔지."

나는 그 말을 붙들듯, 입안에서 한 번 굴렸다. 혀끝에 쓴맛이 늦게 올라왔다.


"여보... 나는, 나 하나 구하기도 버거운 소방관이야."

말이 바닥으로 떨어지듯 나왔다. 떨어진 말이 마루를 움켜쥔 발바닥 밑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남들 고통만 더 끌어오는 사람 같다.

젖은 얼룩을 빨아들이듯 그 생각이 발바닥에서 몸 위로 스며올랐다.




작게 딸깍 하는 소리가 나고, 방문이 조금 벌어졌다.


문틈 사이로 큰애 얼굴이 조심스럽게 비쳤다. 눈은 반쯤 감겨 있었고, 입술 주변에는 말라붙은 침 자국이 하얗게 남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문틀을 꼭 쥔 채 아이가 작은 발을 질질 끌며 거실로 나왔다.


아이는 나와 아내 사이에 서 있다가,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모르는 듯 잠시 멈췄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허리부터 반쯤 굳는 것을 느꼈다. 연기 속에서 길을 잃고 허공을 더듬던 팔,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도 모른 채 제자리에서 떨던 내 다리가 겹쳐 올라왔다.


"괜찮아, 이리 와."

아내가 먼저 일어나 두 팔로 아이를 감쌌다.


큰애는 손을 쥐었다 피고 참아 보려던 숨이 새어 나가듯, 잔 울음이 터졌다.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무언가가, 말이 되지 못한 채 소리로만 쏟아졌다.


아내가 아이 등을 둥글게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엄마 품에 있으면 안전해…

그 말이 아이 귀에 먼저 들어갔다. 아내가 나를 보고 말을 이었다.


… 여긴 불도 안 나고, 아무도 안 다쳐."


아내가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아이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점점 코로 훌쩍이는 소리로만 남았다.


나는 이상하게 눈 안쪽이 뜨거워졌다. 그날 이후 병원 침대에서 새벽마다 벌떡 일어나 숨을 몰아쉬던 순간들이, 스스로 다독였던 말이 어렴풋이 되살아났다.


ㅡ괜찮아, 난 소방관이잖아.

목 안쪽이 먹먹했다.


아내는 아이를 안은 채 내 옆에 와 앉았다. 한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밖에서는 소방관이라도 여기선 내 남편이잖아.”

아내가 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당신도…

아내가 손가락에 힘을 조금 줬다.


내 손 잡고 있으면 안전해."

나는 눈가를 거칠게 훔치지도 못하고, 그냥 뺨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을 그대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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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잊히지 말아야 할 역사의 상처를 기억하며 쓰였습니다. 그러나 작품 속 인물과 사건은 모두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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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