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소 <풍래수면시(風來水面時)>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작품성, 대중성, 상업성 이 모두를 갖춘 화가의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보통 예술이라는 게 이 세 가지 요소를 다 갖추기는 힘들죠.. 하지만 가뭄에 콩이 나듯 이 모든 걸 갖춘 화가가 있습니다. 1973년 명동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시작으로 1975년 파리 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실험적인 미술로 국내외를 휩쓸었던 이강소 작가님을 소개할까 합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3, 4 전시실에서 총 100점의 작품들을 오는 4월 13일까지 진행합니다.
이번 개인전의 타이틀은 <풍래수면시(風來水面時)>는 바람이 물을 스칠 때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해석하면 새로운 세계와 마주해서 깨달음을 얻은 의식의 상태를 비유한다고 전합니다. 타이틀에서부터 이미 작가님은 덧붙이지 않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어요.
제가 이강소 작가님의 개인전을 이렇게 쓰게 된 이유는 우선, 2024년 프리즈 서울에서 그 어떤 작품보다 작가님의 작품이 제일 생각이 났고 작가님의 작품은 작품성, 대중성 그리고 상업성까지 다 갖춰서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었죠. 게다가 제가 작품을 감상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과 작가님께서 80년대 작품을 추구하는 방식이 매우 흡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미술기자로 활동하다가 여기 브런치 스토리 작가로 넘어온 후, 창작자의 의도보다는 제 경험과 저만의 기준을 염두하면서 글을 적어오고 있었습니다. 이강소 작가님 작품에서는 최대한 작가의 의도를 배제했죠. 왜냐하면 관람객들은 작품을 보고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바탕으로 감상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가님은 그러한 것들을 인지하고 작품이 '열린 구조'가 되기를 바랐어요. 이러한 점에서도 저에게는 인상 깊어서 여기에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제3전시실부터 작가님의 60여 년의 예술세계를 소개하겠습니다. 이강소 작가님은 화가로서 또는 세상을 마주하는 주체로서 작가 자신에 대해 성찰에 관한 질문을 많이 던졌어요. 그래서 이곳에서는 비디오, 회화, 판화 그리고 조각 등의 다양한 형태로 작가의 작업 행위를 통해 그 질문에 실험미술을 진행한 작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전반적으로 색이 많지 않아 '심플하고 깔끔한 느낌이 내 스타일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엔날레에 출품된 슬라이드와 초창기 영상, 캔버스에 올이 풀린 다소 익숙하지 않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회화작품이 제 눈에 먼저 들어왔습니다. 바로 <Untitled-86019> 작품인데요. 1986년도에 완성된 작품입니다. 작가님은 80년대부터 새로운 평면 회화를 시작하셨고 개념적인 회화를 통해 평면성을 탐구했다고 전합니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의도는 최대한 배제하는 회화를 하게 되었어요. 이 작품은 하늘과 바다를 연상시키는 추상화 작품이죠. 작품 속 선들은 흐르는 물줄기처럼 보이거나 파도처럼 보이는 것이 생동감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가운데에 가로지르는 긴 선은 자연의 수평선 같은 모습을 연상시키는 의도로 작가님은 작품을 완성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이 설명을 보기 전까지 비 오는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봤습니다. 선들이 꼭 빗줄기처럼 보였고, 하단에는 땅이 빗물에 젖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운데는 나무 한 그루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이 작품 속 메시지는 무엇일까 하고 작품을 봤었죠.
저의 감상은 어쩌면 작가님이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감상을 했다고 보이는데요. 저는 이 작품을 하늘과 바다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다르게 이해될 수 있죠. 그래서 작가님은 이러한 것들을 그냥 받아들이고 아주 약간의 의도만 넣어 작품의 의미를 고정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저와 같은 관람객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어쨌든 정신과 몸 그리고 붓의 움직임을 통해 작가라는 자아를 지우고 철학과 내면의 흐름을 담아내고자 하는 이강소 작가님의 예술적인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다음 회화 작품은 <Untitled-85021>입니다.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강렬한 색채를 가진 작품이 아닐까 싶은데요. 이 작품을 보면, 우거진 숲을 연상시키거나 아님 나뭇잎이 더 진한 초록색으로 익어가는 과정을 표현하고 싶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작가님의 인터뷰를 보면 그냥 막무가내로 칠했던 작품이라고 전합니다. 모든 게 환상이고 작품을 완성하는데 작가의 역할에 대해 많은 고민을 담은 작품이라고 해요. 붓을 칠하다 보니 풍경이 보였다고 합니다.
사실 지난 과거에는 'Untitled'이라고 붙여진 작품들을 감상하면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정말 무책임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선호한 적이 없었어요. 물론 이러한 생각이 바뀐 지는 좀 되었고, 다양성을 포용할 줄 모르는 과거의 제 모습이 참 바보 같았죠. 하지만 이번에 작품 속 붓터치를 감상하면서 이강소 작가님의 수많은 고민과 모든 게 환상처럼 느꼈을 작가님의 입장에서는 제목을 'Untitled'이라고 붙이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습니다. 과거에 어리석었던 제 모습도 생각났고, 강렬한 색채와 붓칠이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사슴이 그려져 있는 <Untitled-91193> 작품을 소개할게요. 작가님은 젊었을 때 동물원을 자주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오리와 사슴을 관찰한 경험이 그의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특히 작가님은 '오리화가'라고 불릴 정도로 오리가 나오는 작품을 많이 그리셨어요. 오리가 지나갈 때 그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파동에 깊은 인상을 받은 작가님은 이것을 자신의 회화에 반영했다고 전합니다.
이강소 작가님은 1980년대 후반부터 오리와 함께 사슴에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회화 작업을 했습니다. 물론, 사슴에 고유한 의미나 형태를 재현하는 것은 작가님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사슴의 도상을 통해 존재와 회화성에 대한 탐구를 하셨습니다. 하나의 화면 안에 다양한 각도를 겹쳐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큐비즘의 피카소의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해요. 멀리서 감상했을 때는 강렬한 사슴의 모습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여러 개의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형태 없는 얼굴로 이루어진 것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Untitled-96204> 작품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 작품은 이번 개인전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인데요.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붓터치가 예술이에요. 작품 하단에 있는 집 한 채가 꼭 나 자신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고 거침없는 붓터치는 눈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보였죠. 그래서 세상의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혼자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동양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는 평을 많이 받은 작품입니다. 집 한 채가 마치 인왕산 아래에 있는 거 같죠. 산수화는 여백의 미와 자연에 대한 조상들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데요. 이러한 산수화의 정신을 받아 추상화로 승화시켰습니다. 작가님만의 독보적인 붓터치와 서양의 추상회화가 만나 대단한 작품이 나온 거죠.
서양회화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동양회화의 전통에서 찾은 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래서 이강소 작가님은 추상화는 '더 이상 서양회화에 존속된 것은 아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어요. 이러한 내용들을 알고 보았을 때는 작가님의 작품은 동서양의 감성을 아우르는 포용적인 작품이라고 느꼈고, 회화에도 '격'이 있다면 이러한 작품들이 격조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었어요.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인 니스에서 선보인 <강에서-99125> 작품을 소개할게요. 계속 '무제' 작품만 보이다가 제목이 있는 작품을 보니 반가웠는데요. 프랑스 언론매체 르몽드에 소개되어 주목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아크릴 물감을 사용한 추상화이지만, 동양화에서 사용되는 서예붓으로 동양적인 느낌을 동시에 전달하고 있는 작품이죠. 특히 화면을 가로지르는 붓놀림은 강렬하고 섬세한 농담을 보여줍니다.
사실 작가님에게 <강에서> 시리즈는 특별한 의미를 가져요. 작가는 가족들과 여행했던 기억을 바탕으로 제목을 <강에서>라고 설정했지만, 실제로 작품은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추상화입니다. 제목을 통해 관람객에게 강을 여행한 경험을 떠올리게 하도록 관람객의 기억을 통해 작업이 완성되도록 하는 것이 작가의 중요한 의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관람객과 함께 작품을 완성하는 개념미술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관람객의 기억을 통하지 않으면 완성을 시킬 수 없으니깐요.
제가 지금까지 회화작품만 소개해드렸지만, 제3전시실에는 회화작품뿐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지는 조각'이라고 칭하는 조형작품도 있습니다. 딱히 목적성 없이 무작위로 던져서 쌓아 올린 작품이라고 전합니다. 그리고 1977년 퍼포먼스로 몸에 물감을 바르고 천으로 닦아냈던 그 천 작품 페인팅(이벤트 77-2)도 전시되어 있어요. 게다가 비디오아트도 설치되어 보는 재미도 제법 있었어요.
제4전시실에서는 초기 작업부터 2000년대 회화에 이르기까지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탐구한 이강소 작가님의 작업 세계를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근대미술에 대하여 결별을 고하는 설치작업과 당시 작가님은 그동안 받았던 교육을 비롯해 서구 미술의 경향을 쫓아가는 한국 현대미술계의 태도 그리고 한국의 정통성을 잊어가는 세태에 대해서 회의감을 가졌다고 전합니다.
이번에는 먼저 회화작품이 아닌 조형작품을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작품의 이름은 <Untitled-7522>입니다. 이 작품으로 이미지의 허구성을 얘기하고 싶어 하셨어요. 작가님은 깨진 돌과 깨지기 전의 돌을 나란히 배치해 실제 돌과 가상의 이미지와의 관계를 살펴봤습니다. 다양한 시기에 걸쳐 이루어지는 인식 실험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들이 결국 각자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죠.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우리는 사람마다 경험에 따라 다르게 인식합니다. 또한 우리가 보는 대상 역시 시간의 흐름이나 상황 변화에 따라 계속 달라질 수 있어요. 작가님은 돌이라는 물질적인 오브제를 통해 상상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제시하고 시각적 이미지의 속임수와 허구성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고 대상의 존재에 대해 열린 결말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어려웠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계속 보았죠. 이번 전시와는 별개로 '돌'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참 재미있는 소재인 거 같아요. 구시대적인 요소인데 새로운 용도로 현대미술에서는 표현방식에 따라 모던해 보일 수도 있고, 아님 이번 전시처럼 인식실험에서 오브제로 쓰이는 것을 보면 돌이라는 게 정말 많은 것을 담아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강소 작가님은 1975년 파리 비엔날레의 <무제-75031>이라는 작품을 출품했습니다. 일명 닭 퍼포먼스라고 불리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닭을 먹이통에 줄로 묶어 놓고 먹이통 주변에 석고 가루를 뿌려놓은 뒤 닭이 정해진 반경 내에서 마음대로 먹이를 먹고 돌아다니게 놔두었습니다. 닭이 돌아다닐 때마다 바닥에는 자연히 그 흔적이 석고가루와 함께 남게 되었죠. 전시에서는 이 퍼포먼스를 통해 남겨진 닭의 흔적이 사진과 함께 출품되었는데요. 당시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사라진 닭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작품과 현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 작품의 시초가 된 작업이 바로 이번 전시에 나온 '꿩'입니다. 박제된 꿩에 하얀 물감을 바른 뒤 그 발자국을 바닥에 남긴 설치 작품이죠. 정물화용으로 제작된 박제된 꿩의 발자국을 물감을 이용해 바닥에 찍어 냄으로써 마치 꿩이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 같은 움직임을 만들었습니다. 살아있던 존재인 꿩을 박제로 만들어 사물로 만든 후 다시 그 사물인 꿩에 발자국의 이미지를 남겨 살아있었음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이 작업은 존재와 실존에 대한 작가의 근본적인 질문을 흔적이라는 방식으로 시각화한 실험적인 작업이에요. 여기에서는 2018년 다시 재제작된 작품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마지막 피날레로 제가 소개해드릴 작품은 <청명(淸明)-16181>입니다. 실제로 보면 아주 큰 대형작품입니다. 작품 속 붓터치를 보면 굉장한 힘이 느껴지는데요. 실제로 봤을 때, 거장의 기운을 받은 듯한 느낌을 받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다른 회화작품들처럼 동양적인 붓터치가 돋보이는 작품인데요.
사실 이강소 작가님은 서예를 전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한학과 서예를 중시한 집안에서 자랐고 당연스럽게 서예적 전통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거라고 보여줬죠. 작가님은 필획을 그을 때 두 번을 반복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품을 보면 왜 작가님의 회화만이 가지는 독보적 매력이 있는지 알 수 있었어요. 오늘날 이강소 작가님을 가리켜 동양회화와 서양회화의 종합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다면, 이는 다름 아니라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동양적인 정신과 서양추상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러하다고 여겨집니다.
이강소 작가님은 독자적인 예술세계로 한국현대미술 변화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이미지의 인식과 지각에 관한 개념적인 실험을 꾸준히 하신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작가이시죠. 세상에는 바로 빛이 보이는 다이아몬드 같은 작품이 있다면 이강소 작가님 작품은 조개껍질 속에 있는 진주나 오팔처럼 내면에서 빛을 뿜어내는 작품도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색감도 그렇고 참...단단한 기운을 가진 작품들을 보고 왔네요.
ⓒLee Kang-So , Courtesy of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