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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손갤러리-장윤규,수묵으로 빚어낸 '사람 패턴'의 미학

장윤규 - <Walking Labyrinth> ft. 두손갤러리

by 민경우

보이지 않는 공간을 설계한 도면을 본 적 있으신가요? 건축가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 공간을 만들지만, 여기 '인간의 내면'이라는 보이지 않는 공간을 탐구하고 설계하는 작가가 있습니다. 바로 장윤규 작가인데요. 최근 두손갤러리에서 열린 작가님의 개인전 《Walking Labyrinth: 미로를 걷다》를 통해 그 특별한 도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태 많은 작품들을 감상해 왔지만, 이렇게나 복잡하게 얽힌 선들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처음 봤는데요. 미로 속을 헤매다 깨달음을 얻은 전시라서 이렇게 리뷰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미로가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내면'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감상을 하니 나 자신의 내면을 보는 듯했어요. 제가 리뷰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단어를 조합하고, 어떤 문장으로 시작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과정은 마치 복잡한 미로를 걷는 것처럼 느낀 적 있습니다. 길을 잃지 않으려면 끈질긴 인내와 집중이 필요하죠. 장윤규 작가님의 작품에서 제가 발견한 깨달음은 바로 그 미로가 '반복'이라는 수행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수많은 선들 하나하나에 담긴 작가님의 고독한 인내를 보며, 저 또한 글 한 줄을 완성하기 위해 수없이 반복했던 고민의 시간들을 떠올렸습니다. 미로의 출구가 결국 완성된 한 편의 글처럼 존재하듯이, 이 모든 행위가 바로 미로를 걷는 본질적인 이유임을 깨닫게 되었어요.


<Walking Labyrinth> 전시를 연 두손갤러리 전시전경. 전시 초입 부분. 출처 두손갤러리


이번 전시는 작가님의 '인간산수 · 건축산수' 시리즈의 두 번째 연작으로, 총 60여 점의 작품을 통해 인간관계의 얽힘, 감정의 풍경, 존재의 경로를 시각적으로 사유하는 전시로서 타이틀은 <Walking Labyrinth>입니다. 장윤규 작가님은 오래전부터 존재와 관계, 그리고 내면이라는 인간의 구조에 대해 탐구했습니다. "인간은 풍경 속에서 살며 길을 묻는 존재"라고 말씀하셨죠. 작품 속 미로는 어떤 길도 명확히 제시하지 않으며, 관람자의 기억과 감각이 더해질 때 비로소 하나의 길이 열린다고 전합니다.




첫 번째로 만나 볼 작품은 3D 프린트로 만들어진 <공간의 미로 1>입니다. 우리 내면의 정신적인 공간을 3차원의 형태로 설계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작가님이 왜 이 작품을 만들었는지, 스토리텔링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느끼는 바를 적어보자면, 작품을 보면서 내면에서 천사와 악마가 치열하게 싸우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얀색으로 겹겹이 쌓인 선들은 우리가 추구하는 고결한 가치, '천사의 속삭임'처럼 느껴졌고, 그 사이사이에 드리워진 검은색은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욕망, 즉 '악마의 유혹'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흑과 백의 대비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 이 두 상반된 존재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 내면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였는데요. 어느 한쪽이 완전히 이기거나 지는 것이 아니라, 흑과 백이 서로 얽히고설켜 긴장감을 유지하는 모습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끊임없이 균형을 찾아가는 존재임을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장윤규 작가님의 <공간의 미로 1>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내적 갈등을 3차원으로 표현한 심리적 초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공감의 미로1>, 110cm X 110cm X 110cm, 3D print, 2025, 출처. 두손갤러리


<Walking Labyrinth> 전시를 연 두손갤러리 전시전경. 출처 두손갤러리


다음 작품은 <백록담 2>입니다. 장윤규 작가님은 주로 한국의 산수를 소재로 한 수묵화 작업을 하셨는데요. 특히 한라산 백록담을 중요한 영감으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원형은 백록담의 분화구를 상징하며, 단순히 풍경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그 안에 담신 생명력과 깊은 기운을 표현하고자 하셨습니다. 작품 하단에는 세밀한 패턴의 사람들이 보이는데, 제 눈에는 백록담 자연의 본질적인 모습에 반해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번 전시 '인간의 내면'이라는 주제로 보면, 작품 위에 있는 커다란 검은색 덩어리는 우리 마음속의 깊고 알 수 없는 부분을 표현한 것 같아요.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이나, 복잡하게 뒤엉킨 감정들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죠. 붓으로 힘차게 그린 자국들은 이런 내면의 에너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작품 하단에 촘촘하게 그려진 사람들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들을 쌓아 올린 '나'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데요. 아주 작은 점들이 모여 하나의 모양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의 자아도 수많은 작은 경험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죠. 결국 이 작품은 내가 모르는 내면의 세계와 수많은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 나의 자아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백롬담2>, 82cm X 102cm, Meok ink on printmaking paper, 2015, 출처. 두손갤러리


이번에는 <두 개의 달>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작품 캡션의 말을 빌리자면, 어떤 대상을 그려도 그것을 완성해 주고 연결해 주는 건 인간이다. 어디에나 보이지 않는 질서와 구도가 존재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 인간이 관계를 맺는 것이다.라고 전하는데요. 작가님은 달이라는 소재를 통해 존재의 본질이나 시간의 흐름 같은 철학적인 주제들을 탐구해 오셨습니다. 겹쳐진 두 개의 달은 각각 다른 존재이면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어요. 왼쪽 달은 패턴이 불규칙하지만 오른쪽 달은 패턴이 질서 있고 규칙적인 게 흥미로웠습니다.


제목은 두 개의 달이지만, 저는 두 개의 다른 집단으로 보였는데요. 이 작품은 서로 다른 가치와 역사를 지닌 두 개의 집단 공존하며 마주하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보여는 것 같았어요. 무질서한 세상과 질서가 잡힌 세상이 충돌해서 서로 반대되는 세상이 만나 조화를 이루는 그림으로 보였습니다. 작품 한가운데 중첩된 교차점은 다른 공간보다 더 역동적인 영역인데요. 갈등과 교류가 동시에 발생하는 이 지점은 현대 사회의 복잡한 연결성을 은유하는 듯 보였죠. 아마 작가님은 두 개의 달을 통해 만나고 충돌하며 또다시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을 심도 있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개의 달>, 150cm X 150cm, Meok ink on printmaking paper, 2021, 출처. 두손갤러리




<Walking Labyrinth> 전시를 연 두손갤러리 전시전경. 출처 두손갤러리


갤러리 중간을 지나 끝 부분으로 가면 2021년도에 완성된 <인간의 산> 시리즈 두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힘 있는 수묵의 필선이 눈에 들어오는데요. 작가님은 '산'이라는 소재로 인간의 존재와 내면의 깊이 그리고 복잡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인간의 산 1> 작품 속 산의 형태는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우리의 정신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고, <인간의 산 2>은 능선을 따라 그려진 사람패턴은 혈관 혹은 우리의 감각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산을 그린 풍경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생각과 감정의 흐름을 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산> 시리즈는 자연과 인간이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작가님의 시각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이 산처럼 웅장하고 복잡하다는 메시지를 관람객들에게 보내면서 깊은 사색을 하게 만드는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더 나아가 사색을 통해 스스로의 내면을 탐구하고 정리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해석해도 될 것 같아요.


<인간의 산1>(좌) <인간의 산2>(우), 150cm X 150cm, Meok ink on printmaking paper, 2021, 출처. 두손갤러리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에서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작품 <일월오봉도>입니다. 원래 일월오봉도는 6폭의 병풍으로서 조선 시대 임금이 앉는 어좌 뒤에 놓았던 것으로 유명하고 '일월오악도'라고도 불리기도 하죠.


갤러리의 글에 따르면, "대형 신작인 이번 작품은 전통 산수화를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탐구하는 '인간산수'로 재해석된 작품입니다. 다섯 봉우리는 감정과 사유의 층위를 해와 달은 순환하는 감정과 시간의 굴레를 상징하죠. 소나무는 내면의 인내와 지속성을, 물은 경계와 감각의 유동성을 나타냅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며, 충돌과 질서가 얽힌 복합적인 삶의 풍경이자 존재의 구조를 묻는 사유적 풍경을 그려냈습니다. 장윤규 작가님의 <일월오봉도>는 인간의 풍경이 곧 자연이며, 자연 또한 인간의 풍경이라는 이중 구조 속에서 수많은 몸과 사유가 얽히며 생성되는 군상도이며, 충동과 질서가 교차하는 복합적 삶의 지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전합니다.


제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아무래도 작품을 채우는 무수한 패턴들인데요. 이들은 단순한 무늬가 아닌, 작가님이 형상화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 패턴들은 전통적인 해와 달의 질서 아래 산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을 상징하며, 고정된 자연 속에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간의 삶과 관계를 드러내죠. 그리고 유독 산 위에 있는 해와 달이 눈에 들어왔는데요. 작품 속 해와 달이 우리 인간세상을 보면서 대화를 주고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를 테면, 인간 세상을 보는 게 달은 차가운 시점으로 볼 테고, 해는 따스한 시점으로서 해와 달은 서로가 다른 시점으로 대화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월오봉도>, 200cm X 600cm, Meok ink on Hanji, 2025, 출처. 두손갤러리



여기까지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 중에서 저에게 인상 깊었던 작품들로 소개했습니다. 이번전시는 화려하고 심미안적으로 아름다운 작품들은 솔직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장윤규 작가님의 작품들이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화를 넘어, 인간의 내면과 관계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고 있음을 발견하는 여정이었어요. 백록담이라는 거대한 자연을 통해 우리 마음속 심연을 들여다봤고, 두 개의 달이라는 모호한 경계 속에서 공존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특히 <인간의 산> 연작은 견고한 산의 형태 안에 살아 숨 쉬는 무수한 사람들의 형상을 담아내며, 자연과 인간이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이처럼 작가님은 전통적인 소재와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그 어디에도 없는 우리 시대의 내면 풍경을 새롭게 그려내셨어요. 작품들은 뭔가 익숙해 보이면서도 낯선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하며, 관람객들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각으로 미로와 미궁을 통해 작품을 완성해 나가도록 이끌어 냅니다. 장윤규 작가님의 전시는 단순한 관람을 넘어, 우리 삶의 본질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는 소중한 사색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Jang Yoon-Gyoo, Courtesy of Duson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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