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브리드 리얼리티(Hybrid Reality)
여러분 혹시 하이브리드 리얼리티(Hybrid Reality)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으세요? 단어 그대로 '하이브리드(Hybrid)와 리얼리티(Reality)가 합쳐진 말인데요. 실제와 환상이 뒤섞여 있는 상태를 말하죠. 우리가 당연하게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다른 무언가와 섞여 있어서, 그 경계가 모호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 단어의 뜻처럼 사진, 조각, 회화, 문학 그리고 비디오 등 모든 장르를 넘나들면서 활동하시는 작가님이 계신데요. 바로 유현미 작가님이십니다. 이질적인 장르의 속성과 매체의 특수성을 교차·융합하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계십니다.
금호미술관에서 유현미 작가님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기획전이 진행 중인데요. 기획전 타이틀은 <하이브리드 리얼리티(Hybrid Reality)>입니다. 이번 전시는 2000년대 초부터 최근까지 선보여 온 다양한 매체와 장르, 주제를 포괄하며, 그동안의 예술적 탐구와 변화의 흐름을 관람할 수 있기에 주목할 만한 전시입니다. 회화와 사진 그리고 조각등 시각 예술의 영역과 시와 소설, 단편영화 시나리오와 같은 문학과 영상 분야등 작가님의 폭넓은 작업세계를 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지루할 틈이 없는 전시였다고 생각해요.
금호미술관은 유현미 작가님의 탈장르적 사고와 유연한 접근을 통해 이미지와 실체, 안과 밖 그리고 실재와 허구 사이의 간극을 보고 상징적인 구성과 화법으로 초현실적인 풍경을 보여줍니다. 익숙한 장르적 틀을 벗어나 새로운 감각과 이미지의 관계를 연구해 오던 작가님의 여정을 따라가며 관람객들이 무한한 상상력과 사유의 가능성을 경험하기를 기대한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이번 전시는 특이하게 다른 전시와는 달리 순서가 3층부터 B1까지 내려오면서 관람하는 것을 추천드려요.
이제 3층부터 작품 하나씩 소개할 텐데, 3층은 2013년에 선보였던 <코스모스(COSMOS)> 시리즈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특징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물건들을 공간에 배치한 후, 무중력 한 상태로 시간이 멈춘 듯 고정된 모습을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표현했습니다. 주변의 사물들로 우주 공간을 떠도는 행성처럼 보이도록 묘사하면서 우리의 삶을 하나의 소우주로 인식하게 만들죠.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들고, 관람객들로 하여금 익숙한 우리의 공간을 우주의 관점에서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선사합니다.
먼저 소개할 작품은 2013년 작품 <작업실의 우주>입니다. 제목을 모르고 감상하면, 그저 누군가의 집 혹은 화실을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여겨지는데요. 이 작품은 작가님의 작업실을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으로 스토리텔링하신 작품입니다.
제목을 모른 체 작품에서 느꼈던 첫인상은 우선 다섯 개의 다른 장면을 이어 붙여 대작으로 만든 점이 먼저 눈에 띄었어요. 각 구획의 문과 벽, 그리고 바닥은 얼핏 보면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씩 살짝 다른 색과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초현식적인 연극무대 세트장으로 생각하고 감상을 했었죠. 참고로 유현미 작가님은 단편영화도 감독하신 분입니다. 어쨌든 밝은 파란색 하늘과 분홍색 벽 그리고 초록색 벽 등 다양한 색깔이 등장하지만, 작품의 톤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고요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끄트머리에 불안정하게 놓은 공들이나 문이 있어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긴장감도 있었어요.
하지만 제목을 확인한 후에는 달리 보였는데요. 개인의 사적인 공간을 자신만의 우주로 표현했다고 보니 훨씬 더 거대해 보였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탁자, 의자, 문 그리고 공들과 같은 평범한 물건들이 태양계의 행성이 되고, 왼편 뒤쪽에 있는 삼각대는 천체망원경처럼 보였습니다. 이 작품을 우주의 공간으로 간주하니 각각의 다섯 공간이 연결되는 게 말이 되는 느낌도 들었어요. 정말 우주처럼 거대한 작품이었어요. 이 작품을 가장 먼저 소개한 이유는 작가님이 생각하는 하이브리드 리얼리티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아닌가라고 느껴서 첫 작품으로 적어보았습니다. 현실의 공간인 작업실과 상상 속의 우주를 결합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관람객들에게 묻고 있죠.
"당신에게 가장 익숙한 공간은 어떤 의미인가요? 그곳이 곧 당신만의 우주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다음 작품은 <UFO No.2>입니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이유는 작품 속 파란 비닐봉지를 미확인 물체 UFO로 표현한 것에서 작가님의 재치와 유머 감각을 볼 수 있어서 저를 미소 짓게 만들었어요. 보통은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하찮게 여겨지는 비닐봉지지만, 유현미 작가님의 시선에서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죠. 또 하나 재밌는 것은 옆에 놓인 의자는 작품 속에서 그림자가 있지만, 비닐봉지에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작품 속에서 의자는 왜 있을까? 무슨 의미일까?' 생각했지만, 그림자를 보면서 어떤 상징일지 생각하는 게 의미 없다고 여겨졌어요. 비닐봉지의 그림자가 없음으로써 보다 미스터리하고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보다 강조하는 게 너무 재밌었어요.
익숙하고 평범하다 못해 하찮은 사물을 새로운 시각과 의미를 부여하는 게 어쩌면 예술의 진정한 힘이지 않나 싶었어요. 비닐봉지를 마치 외계에서 온 신비로운 존재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을 낯설고 흥미로운 환상으로 바꿨죠.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접근은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작품에 더 몰입하도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을 것 같아요. 이 작품 또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고 가는 작품이라 여겨집니다.
"매일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것들 속에 혹시 눈치채지 못한 새로운 가능성이 숨어있지는 않을까요?"
2층으로 내려오면 <십장생> 시리즈, <굿 럭> 시리즈를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우선 십장생은 흔히들 잘 아실 테지만,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열 가지 상징물을 의미합니다. 주로 전통회화에서 장수를 기원하는 길상화(吉祥畵)로 사용되었죠. 하지만 유현미 작가님은 전통적 상징물들을 현대미술로 표현하셨는데요. 전통회화에서는 구성요소의 상징성을 강조했다면, 작가님의 작품에서는 대상의 배치와 구성에 보다 집중했습니다. <굿 럭> 시리즈는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염원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스토리텔링으로 길상을 소재로 하는 한국의 정물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십장생> 시리즈 중에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No.2>를 소개할게요. 작품 제목이 유명한 한국가요의 노랫말에서 따온 만큼 작가님은 누구나 꿈꾸는 행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합니다. 하지만 작품 속의 이상적인 집은 상당히 불안해 보이죠. 지구본 두 개와 푹신한 구름 같은 형태로 불안하게 쌓여 있습니다. 떠받치는 다리는 시간이 흘러 모래시계의 모양이 돼버렸네요. 그리고 작은 사슴 한 마리는 걱정하는 듯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품의 첫인상은 다른 의미로 '정말 그림 같은 집이다'라고 느꼈어요.
이 작품의 중요한 감상 포인트는 바로 곧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꿈꾸는 '그림 같은 집'은 정말 단단한 현실 위에 서 있는 건지 아님 위태로운 환상 위에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는 것을 아닐까?' 하는 현실과 이상의 미묘한 경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저는 전통 회화 속의 십장생과 유현미 작가님의 작품 속 십장생을 비교해서 감상해 보았는데요. 전통 회화 속 십장생이 영원한 복과 안정성을 상징하며 미래 세대를 위한 가치를 담고 있다면, 유현미 작가님의 작품은 그와 대비되는 현대 사회의 불안정성을 보여줍니다. 작품 속 위태로운 모습은 '무너지기 전의 찰나'처럼 느껴지며, 미래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현대인의 모습에 대해 메시지를 보내는 작품이라고 보였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그림 같은 집'은 정말 단단한 현실 위에 서 있는 걸까요, 아니면 위태로운 환상 위에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는 걸까요?"
<굿 럭> 시리즈 작품으로는 <십장생 책가도(해, 달, 구름, 소나무, 물, 바위, 사슴)>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조선 전통회화중 <책가도>를 현대회화로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원래 책가도는 학문과 출세를 기원하며 책과 붓을 채웠다면, 유현미 작가님은 책장을 현대인의 행운을 담는 공간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작품 속 십장생은 사슴과 소나무만 나옵니다. 사슴은 '복'을 상징하고 특히 흰 사슴은 복을 증폭시키는 의미도 있죠. 그리고 소나무는 사계절 내내 푸르고 변치 않는 생명력을 나타냅니다.
사슴과 소나무옆에는 노란 공, 액자 그리고 버린듯한 플라스틱병과 텅 빈 공간들이 있습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물들을 모아 새로운 의미를 만들죠. 옛 선조들은 학문을 통해 성공을 꿈꿨다면, 오늘날에는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굳이 공부가 아니더라도 다른 것들을 통해 자신의 길을 닦고 나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운은 전통적인 가치관이 아닌 책상 위 굴러다니는 사소한 물건이나 텅 빈 공간에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발상에서 시작해서 작품이 완성되었죠.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과거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오늘날의 현실이 공존하는 새로운 행운의 상징을 보여주고 있어요. 익숙한 형식인 '책가도'를 통해 현대인이 추구하는 행운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층에서는 유현미 작가님이 연출하신 단편영화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만약 당신의 몸이 점점 사라지고, 눈동자만 살아 움직이며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유현미 작가님의 영상 작업 <그림이 된 남자>는 기묘한 상상 속으로 관람객을 끌어들입니다. 이 작품은 한 남자가 이웃들에 의해 온몸에 하얀 페인트가 칠해져, 결국 방 안의 사물들과 함께 하나의 그림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남자의 몸이 완전히 고정되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인데도 그의 눈동자만은 살아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여전히 세상을 인식하고, 작품을 감상하는 우리를 바라봅니다.
이는 관람자인 우리에게 강력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작품을 바라보는 나와, 작품이 되어버린 남자 중 누가 더 자유로운 존재일까요? 작가는 대상을 바라보는 '나'와 대상이 되어버린 '그'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며, 우리 스스로가 진정한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림이 된 남자>는 단순히 시각적인 경험을 넘어, '바라본다는 것'과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깊이 있는 철학적 작품입니다.
1층에서는 영상 작업을 토대로 한 회화 작품을 감상하실 수 있는데요. 제목처럼 한 남자가 그림이 되어 완성된 작품이죠. 사진의 극사실적인 재현성과 회화의 거친 붓 터치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남자의 얼굴, 옷 그리고 소파 등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벽과 배경은 푸른색과 흰색이 뒤섞인 유화의 질감이 강하게 느껴져요. 이는 현실과 그림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작품의 주제를 시각적으로 강조합니다. 전체적으로 차갑고 고요한 느낌의 푸른색이 지배적입니다. 남자의 굳어있는 듯한 표정과 어우러져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남자의 갈색 바지와 붉은 책들은 따뜻한 색감으로 대비를 이루며 인물에 시선을 집중하게 만듭니다.
작품 속 남자는 관람객을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무표정하고 공허해 보이지만, 정지된 몸과 대비되는 살아있는 듯한 시선을 긴장감을 주고 있습니다. 남자는 더 이상 주체가 아닌 그려진 대상이 되면서, 작가는 '인간'을 예술 작품 속 오브제로 사물화 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오브제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넘어 인간의 존재와 정체성이 어떻게 예술과 뒤섞이는지를 깊이 있게 표현한 것이 인상 깊은 작품이었습니다.
과연 작품을 바라보는 나와, 작품이 되어버린 남자 중 누가 더 자유로운 존재일까요?
마지막으로 지하 1층으로 내려오면 <수의 육체> 시리즈, <스틸 라이프> 시리즈를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먼저, <수의 육체> 연작은 숫자 조각들을 자유롭게 배치하고 이를 사진으로 담아내며, 숫자가 가진 철학적 의미와 무형적인 세계를 시각적으로 풀어냅니다. 이 작품은 숫자를 단순한 기호가 아닌, 사유의 공간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틸 라이프> 연작은 현실의 공간에 페인트를 칠해 그림처럼 연출하고 이를 사진으로 포착하는 독특한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를 통해 회화, 조각, 사진의 경계를 허물고, 실제와 환상, 이미지와 실재가 뒤섞인 시각적 착시와 긴장감을 경험하게 합니다.
단순한 숫자를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을 만나볼 텐데요. 소개할 작품은 2014년작 <8888>입니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숫자 '8'과 그 상징성을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작가님은 숫자를 단순히 기호가 아닌, 고유한 형태의 철학적 의미를 지닌 존재로 보고 있어요. 작품 속 거대하고 육중한 '8'은 우리가 흔히 '무한'을 떠올리는 기호(∞)의 입체적인 형태를 보여주죠. 그래서 무한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육체'로 표현하며, 숫자 자체에 담긴 철학적이고 유기적인 세계에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작품을 관람하면서 저의 첫인상은 실재하는 사물을 통해 현실과 환상이 하나로 연결된 뫼비우스의 띠를 보여주는 듯했어요. 그리고 작품 속 '의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는데요. 예를 들면, '왜 의자가 있을까?', '의미가 있을까?'와 같은 질문을 혼자서 해보았습니다.
가장 큰 '8'은 의자에 기대어 있죠. 그래서 의자가 없다면 이 조형물 '8'은 쓰러질 것 같았어요. 결국 무한을 상징하는 '8'도 의자라는 평범한 존재에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자 같은 경우에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존재이고 구체적인 사물이자 유한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저의 생각을 통해 느낀 점은 결국 '무한'과 '유한'의 관계는 서로 대립하는 의미가 아닌 상호 의존 관계라고 판단이 되었죠. 아무래도 작품이 철학적 의미를 가지다 보니, 저 또한 철학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네요.
"당신의 삶 속에서 '무한'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나요? 그리고 그 무한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나요?"
다음으로 소개할 작품은 <2>입니다. 이전에 소개했던 작품은 '8'이 4번 나와서 '8888'이라면, 이번에는 '2'가 하나만 작품 속에 외로이 나옵니다. 이 작품도 철학적 의미를 가진 작품인데요. 작가님은 이 작품을 통해 숫자 '2'가 가진 짝, 관계, 대립 등 다양한 의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수의 육체> 연작은 오가와 요코의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전합니다. 소설처럼 익숙한 숫자들이 낯선 풍경으로 재구성된 이 공간은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사유의 공간을 제시하죠. <2>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숫자의 세계를 다시 보게 만드는 깊이 있는 작품입니다.
사실 저는 작품 속 거대한 숫자 '2'를 보고 철학적 의미보다는 백조의 우아한 자태와 닮아 보인다고 생각했는데요. 백조는 주로 하얀색으로 표현되어 순수함과 정화를 상징합니다. 비록 숫자 '2'는 밝은 색은 아니지만, 그 주변의 테이블들과 배경은 모두 밝고 깨끗한 톤으로 칠해져 있어서, 순수함을 느낄 수 있었죠. 작가님의 작업방식을 생각해 보면 종종 사물에 흰색 젯소를 칠하여 '회화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이 작품과 연관시켜서 보면 마치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고 순수한 형태로 정화시키는 과정으로 혼자 해석해 봤습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서로 기대 있었던 <8888> 작품과 비교하여 봤을 때, 좀 더 안정감 있고 작품이 혼돈이 아닌 완벽한 질서를 유지하는 듯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숫자를 통해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탐구합니다. 이 작품 속에서 '2'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관계', '짝'은 우리의 삶이라는 유한한 현실 속에서 여러분에게는 또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이번 전시가 주는 가장 큰 울림은 즉, 제가 이 전시를 리뷰로 작성한 이유는, 단순히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작가님이 직접 모든 것을 설계하고 조형했다는 점인데요. 유현미 작가님은 작품 속 모든 사물, 숫자 조형물 그리고 공간 자체를 직접 손으로 만들고 연출했습니다. 추상적인 개념을 물리적인 '육체'로 구현하는 과정이자, 현실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하는 창조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죠. 결국 관람객들은 완성된 작품을 보며 '이것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유현미 작가님은 이 과정을 통해 예술의 본질적인 힘을 증명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이 어떻게 예술로 다시 태어나는지 보여주는 전시였습니다.
ⓒYu Hyun-mi, Courtesy of Kumho Muse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