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 우양미술관 <I have been here before>
여러분은 손가락으로 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본 적 있으신가요?? 보통 회화작품이라고 하면 캔버스에 붓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걸로 흔히들 알고 있지만, 손에 물감을 묻혀 작품을 만드는 흑인 아티스트가 있어서 소개할까 합니다. 사실 예전에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아야코 록카쿠의 전시를 통해 핑커페인팅을 처음 접하고 현대미술 정말 다양하다고 느꼈는데요.
이번에 제가 리뷰를 쓰고자 하는 아티스트는 바로 아프리카 가나출신 아모아코 보아포(Amoako Boafo)입니다. 사실 이 작가님은 이미 미술계에서 굉장한 유명한 작가입니다. 이미 2021년 홍콩 크리스티에서 작가님의 작품이 약 47억 원에 낙찰받은 기록이 있죠. 2019년도에 알려지기 시작해서 2021년도에 최고가를 경신한 것으로 보면 단기간에 벼락스타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현재 경주에 있는 우양미술관에서 아모아코 보아포의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 <I have been here before>는 오는 11월 30일까지 열립니다. 작가님은 손가락으로 물감을 직접 바르는 핑거페인팅 기법으로 유명한 작가인데요. 흑인의 정체성의 깊이와 다면성을 드러내고 강렬한 초상화의 작품들이 눈에 띕니다. 단색 또는 극도로 단순화된 배경들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알렉스 카츠와 흡사한 점도 있죠. 색이 적고 심플한 특징 그리고 딱 그리고 싶은 것만 그리는 스타일이 저의 취향과 잘 맞아떨어져서 이렇게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요즘 미술동향을 보면 작년보다 올해에 흑인 아티스트들이 대세인데요. 간단한 예시로 올해 1월 화이트 큐브 서울에서 열렸던 툰지 아데니 존슨 개인전을 시작으로 현재 아모레 퍼시픽에서 진행 중인 마크 브래드포드의 개인전과 최근 동대문 DDP에서 바스키아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것을 보면 느낄 수 있어요. 특히 올해 프리즈 아트페어에서는 마크 브래드포드의 작품이 61억 원에 팔리면서 아트에서 제일 비싼 가격에 팔렸죠. 이러한 추세로 보면 흑인 아티스트들이 현대미술에 미치는 영향력이 정말 대단하다고 보입니다. 흑인의 정체성과 문화에 대한 것은 예전에 제가 처음으로 다뤘던 흑인 아티스트의 글로 대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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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는 총 32점의 작품들이 출품되었고, 4개의 테마로 나뉘어 전시되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세션이 정말 압도적인데요. 한옥의 중정 구조에 영감을 받은 설치작품이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의 타이틀처럼 아모아코 보아포가 정말 예전에 여기에 와봤었나 하는 느낌을 받았었죠. 테마별로 순서대로 적고 싶어서 마지막 세션에 대한 것은 나중에 또 적겠습니다.
4개의 테마로 들어가기 앞서 전시회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3개의 작품이 눈에 들어옵니다. 초반부터 아주 강렬하게 시작하는데요. 가장 먼저 소개해 드릴 작품은 <King Gloves>입니다. 노란색의 단면 안에 상당히 공격적인 자세를 취한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작품 속 인물의 팔을 보면 손가락으로 근육의 힘줄을 표현한 것처럼 보여 인상이 깊었는데요. 인물의 눈빛과 포즈에서 이미 공격성을 느낄 수 있지만, 팔의 근육 선들 때문에 한층 더 부각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스스로 킹이라고 외치며 세상과 맞서 싸울듯한 모습은 '역사적으로 겪어온 흑인들의 투쟁을 표현한 게 아닐까?' 하고 감상을 했습니다.
작품을 보면서 '작가님은 과연 흑인 복서중 누구를 보고 그렸을까?' 추측을 해보았지만, 실존인물은 아니라고 전합니다. 무하마드 알리가 처음으로 챔피언이 되었을 때 "나는 위대하다. 내가 왕이다."라는 말을 남겼죠. 그래서 저는 작품 속 인물은 당연히 무하마드 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작가님은 인물의 정체에 대해 제대로 언급한 적은 없죠. 그 이유는 특정 인종에 대해 국한되기보다는 관람객들이 자신을 인물에 대입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서 내가 취해야 하는 자세인지 아니면 이미 취하고 있는 중인지 한번 고민해 보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소개할 작품은 <Butterfly Pinafore Dress>입니다. 방금 소개한 복서의 작품과는 달리 상당히 사랑스러운 작품인데요. 이 작품에서는 드레스 부분이 피부와는 완전 다른 질감을 줍니다. 이는 아모아코 보아포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데콜라주(Décollage) 기법이죠.
이 기법은 현대미술에서 많이 쓰이는 기법인데요. 이 작품에서 예를 들면, 우선 나비 패턴의 인쇄된 종이나 얇은 천을 준비한 후, 풀이나 다른 특수용품으로 캔버스 위에 붙입니다. 그다음 종이 위에 얇은 물감을 바르거나 종이 자체의 잉크를 캔버스로 전사(Transfer)하는 방식 즉, 판박이 스티커를 붙여 사람의 피부로 옮기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사진에서는 보기가 힘들지만, 이 기법을 통해 옷은 평면적이고 패턴이 선명한 반면, 거친 인간의 질감과 대비되어 작품 전체의 서사를 끌어올리는 중요한 장치인 셈입니다.
작가님은 이 작품을 통해 억압에서 해방된 자아와 순수한 기쁨과 유희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전합니다. 특히 나비(Butterfly) 소재를 사용한 게 인상적인데요. 나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변화, 자유, 부활을 상징하죠. 우리나라 노래에도 단편적인 예시로는, YB의 '나는 나비'와 하정우가 나왔던 영화 국가대표 OST인 'Butterfly'를 들 수 있죠. 아모아코 보아포에게는 흑인 작가로서 겪었던 고정된 프레임을 벗어나는 것을 애벌레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나비처럼 자유롭게 비상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생각해 보면 그리고 승리의 V포즈는 작가님의 유머러스함이 보이는데요. 흑인 여성의 주체적이고 당당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모습으로 여겨집니다. 앞에 소개한 작품이 '투쟁'의 의미가 강하다면, 이 작품에서는 유쾌하고 긍정적인 느낌이 다소 강해 보였어요.
1. I Shall Gaze (나는 응시하리라)
첫 번째 섹션에서는 작가님의 근접 초상화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얼굴이나 상반신만 드러내고 배경이 흰색이라 인물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을 줍니다. 덕분에 작품에 집중하기가 편했죠. 그래서 작품 속 인물과 대화하듯이 감상했습니다.
1번 섹션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작품은 바로 <Smug Face>입니다. 영어단어 Smug는 '의기양양한', '우쭐해하는' 뜻입니다. 작품 속 얼굴을 보면 거만한 표정을 짓는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서문에 언급했듯이 아모아코 보아포는 2021년도에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자리매김을 하고 작품 값도 수백만 달러에 팔리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려고 작품을 그렸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작품 속 눈을 보면 표정과는 달리 공허함이 느껴졌어요.
이 작품을 그리게 된 배경을 적어보자면, 작가님은 2021년에 미술계에서 스타가 되고 다음 작품에 대한 부담감과 갑작스러운 유명세로 인하여 이전과 달라진 삶에서 성공이라는 외부의 시선 때문에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고 전합니다. 이를 테면 성공 이면에 있는 작가의 고독이나 흑인 예술가로서 느끼는 압박감이 있었던 거죠.
작품을 통해 이러한 감정과 심경들을 표출했고, 제목을 <Smug Face>라고 이름 붙임으로써 외부의 시선을 반영했습니다. 인물의 표정은 외부의 시선을 거부하고 작가 자신이 느끼는 고독과 압박감을 은근히 드러내죠. 이렇게 역설적인 발상으로 '다들 나를 그렇게 보겠지만, 나는 다르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미묘한 저항을 보여줘서 인상 깊었습니다.
이제 만나 볼 작품은 <Multicolored Bucket Hat>입니다. 작품 제목이 다소 직설적인데요. 이 작품을 적은 이유는 자세히 보면 디테일이 살아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작품 속 인물의 머리카락을 묘사한 부분이 다른 두 개의 덩어리로 왼쪽과 오른쪽의 질감이 다르게 보입니다. '왜 다르게 표현했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는데요. 혼자 답을 내린 결론은 빛이 비치는 방향 때문에 서로 다르게 묘사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제 생각과는 달랐는데요. 아모아코 보아포는 '정체성의 다층성'이라는 깊은 주제를 표현하고 싶어 다르게 그렸다고 합니다.
작품 속 인물을 기준으로 왼쪽은 작가님이 스스로 인식하는 자아로서 따뜻하고 볼륨감이 있게 스타일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신감!! 그리고 오른쪽은 작가님을 둘러싼 사회적 시선, 역사적 무게 그리고 혼돈스러운 현실을 차갑게 표현했죠. 작가님은 흑인으로서 겪은 것을 하나의 캔버스 속에 두 개의 상반된 현실을 동시에 짊어지고 있음을 작품을 통해 암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빛 때문이라면, 밝게 칠한 부분이 빛을 받는 부분이어야 하지만 좌, 우 모두 가장 어둡고 짙게 표현하여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죠. 이렇게 다 알고 나니 제 눈에 보이는 게 '나는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작품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보자면 버킷햇은 1980~1990년대 힙합 문화와 스트리트 패션의 상징이며, 쿨함과 익명성의 의미도 부여한다고 전합니다. 작품 속 버킷햇은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자아를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데요. 뭉개진 얼굴은 내면의 복잡함이라 하면 '내면은 복잡하지만, 스타일은 명확하다.'라는 걸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 있습니다.
2. States of Being (존재의 상태들)
두 번째 섹션은 다양한 내면의 상태를 담아낸 인물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움직임과 정지 사이에 위치한 인물 둘이 등장하죠. 그리고 첫 번째 섹션과는 달리 배경에 색이 들어가 있어요. 작가님은 여기에서 정적인 아름다움 속에서 인간 내면의 섬세한 결을 들여다보도록 이끌며, 관람객들에게 조용한 사유의 시간을 제공합니다.
2번 섹션은 배경의 색 덕분에 인물이 어떤 분위기의 성격인지 그리고 보다 생동감이 더해진 느낌인데요. 여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바로 <Jean Michel Basquiat IV>입니다. 바스키아는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정말 너무나도 유명한 아티스트이기에 이 분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제목을 모르고 이 작품을 보았을 때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되게 잘 생긴 모습으로 묘사되었고, 손가락으로 그렸는데 뭉개짐이 덜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품에 제목을 본 후, 바스키아에 대한 존경심을 묘사의 정확도로 표현했음을 느꼈고, 다른 작품들과 왜 차별성이 느껴졌는지 깨달았습니다. 아모아코 보아포는 자신보다 30년 앞서 등장한 흑인 예술계의 선구자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경의를 표하며, 아마 그의 계보를 잇겠다는 포부를 확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버킷햇을 썼던 작품과는 달리 익명성이 아예 없고 '이 작품이 바스키아다.'라고 명확히 규정하고 있죠. 흥미로웠던 부분은 정교한 얼굴과는 달리 슈트와 넥타이 부분은 다소 거칠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바스키아의 작품들이 어린아이의 낙서와 같은 느낌을 줘서 그러한 부분을 나타내고 싶어서 상징성 있게 그린게 아닌가 싶지만, 그것보다는 27살에 요절했던 인생과 성공했던 인생과는 달리 약물중독, 외로움을 표현했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저는 목 부분에 이러한 표현을 했다는 게 디테일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모아코 보아포도 이른 시기에 크게 성공한 것이 바스키아와 공통점이 있지만, 오랫동안 작가님의 작품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아모아코 보아포의 개인전에서 가장 생동감 있는 작품 <Mr. Palm - Green Wristband>입니다. 작품 속 인물은 테니스를 하는 모습입니다. 작가님이 그린 바스키아 작품을 보고 바로 봤던 작품이라 '흑인 중에 유명했던 테니스 선수가 있었나?', 'Mr. Palm이 누구지?'라는 질문이 먼저 떠올랐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작가님의 여러 작품처럼 익명성이 가미된 작품이었습니다.
우선 제목에서 Mr. Palm,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손바닥씨'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것은 바로 작가 자신의 핑거 페이팅 기법과 연결 지을 수 있습니다. 바로 '손의 힘'을 상징해요. 그리고 테니스는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엘리트 스포츠에서 생활 스포츠로 되었는데요. 이제는 작가 자신이 엘리트의 공간에 들어섰음을 의미하죠. 그리고 녹색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성장, 노력 그리고 발전을 나타내는데요. 이를테면, 군대에서 분대장을 달면 녹색견장이 나오죠. 이러한 것처럼 녹색 손목 밴드는 자신의 손으로 성공을 쟁취한 스토리를 상징합니다.
라코스테 광고를 연상하게 하는 선명하고 단색적인 그린 위에 작품 속 인물은 거칠고 격렬한 느낌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대비는 완벽하게 관리된 잔디라는 세상 위에서 자신의 거친 질감을 표현하는 핑거페인팅 기법으로 자신을 널리 알리겠다는 당찬 포부가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3. Posturing and Posing (자세와 포즈)
세 번째 섹션은 작품 속 인물들이 의도적이고 자율적으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개인적으로 세 번째 섹션이 제일 매력적이었던 곳으로 기억하는데요. 관람객들과 시선을 마주치면서 유혹하거나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느낌을 주죠. 포즈는 인물들의 주체성의 선언이자 감각과 에너지 그리고 자신감을 전달하는 언어의 기능을 하는데요. 누군가는 당당하지만, 어떤 이는 절제된 방식으로 드러내죠. 각각의 개성이 두드러지고 강인하면서도 섬세하다는 느낌을 주는 섹션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제일 먼저 소개해 드릴 작품은 <Self-Portrait - Floral Jacket>입니다. 이 작품도 다른 작품들처럼 이미 제목에서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 확실하게 표현합니다. 이 작품에서는 '이게 나다'라는 느낌이 확실히 보이는데요. 그래서 이번 개인전에서 포스터로 쓰인 게 아닌가 싶어요. 작품 탄생연도가 2023년 즉, 아모아코 보아포가 미술계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나서 그린 자화상입니다. 그래서 작품에서 자신감과 성취를 나타낸 듯 화려하고 당당하게 표현되었죠.
화려한 재킷과 밝은 배경은 작가님의 빛나는 성공의 의미가 있어요. 하지만 첫 번째 섹션에서 소개했던 <Smug Face>처럼 작가의 내면에는 여전히 뭉개진 고독과 복잡한 정체성의 무게가 있다는 걸 거칠게 표현한 피부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피부의 거친 질감과 패턴 옷의 대비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죠. 플로럴 패턴은 유럽적인 섬세한 디자인의 상징이라면, 강렬한 청록색의 배경은 아프리카 즉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죠. 그래서 작가님이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미술교육받은 것과 아프리카의 문화를 화려하게 융합해서 작가자신이 글로벌 아이콘임을 나타냅니다.
작품을 보면서 아모아코 보아포 자신이 누구인지 얼마나 성공했는지, 앞으로는 어떠한 길을 걷을지 아주 스타일리시하고 대담하게 전 세계에 공표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작가님의 작품 제목은 작품 속에 쓰인 오브제를 이용해서 만드는 게 큰 특징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만큼은 제목을 달리 지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를 테면, 직접적으로 표현하시는 걸 좋아하시니 작품 제목을 <This is Me>라고 명명하는 거죠. 그러면 익명성이 조금 묻어있는 다른 작품들보다 차별성, 유니크함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매우 조심스럽게 들었습니다.
다음은 핑크로 이루어진 단색배경의 작품 <Green Handbag>입니다. 작품의 제목처럼 작품 속 흑인 여성이 초록색 핸드백을 들고 있죠. 다른 작품과 다르게 흥미로운 점은 그림자가 작품 속에 표현되어 있어요. 육안으로 봤을 때는 그림자는 핑거페인팅 기법의 거친 질감은 전혀 없어서 저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리고 그림자를 보라색으로 연출한 점이 인상 깊었어요. 작품 속 흑인여성의 옷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죠.
사실 이 작품은 아모아코 보아포의 작품 중에서 실험적인 성격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다른 작품에서는 인물과 배경을 분리시키기 위함이었다면, 이 작품은 성격이 다른 작품이죠. 작가님은 작품에 그림자를 넣음으로써 '주변부'로서의 존재감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전합니다. 흑인의 역사를 생각하고 감상을 하면 이 그림자는 인물의 실체를 따라 복제된 형태죠. 이는 흑인 인물이 주류 사회에서 실체가 아닌 그림자 또는 주변부로 인식되었던 현실 혹은 그 시절을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작품 속 흑인여성도 다른 작품들처럼 핑거페인팅으로 인하여 눈에 띄는 뭉개진 피부를 가지고 있지만, 세상은 그저 평면적인 그림자로 인식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죠.
부드러운 따스한 핑크톤의 배경은 따뜻한 여성상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옆으로 서서 어딘가 응시하는 포즈는 고전명작에 나오는 귀족을 연상하게 하여 우아함을 자아냈습니다. 라일락색 스웨터와 대비되는 강렬한 녹색 핸드백은 핑크와 색채 대비를 통해 패션 감각과 개성을 강조하죠. 그래서 제가 느낀 바는 사회 인식이 어떻든 작품 속 흑인여성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음이 보여서 대단하게 보였습니다.
4. A Space for the Divine(신성한 공간)
이번 전시에서 하이라이트라고 봐도 무방한 이 섹션은 건축가 글렌 드로쉬와 아모아코 보아포가 협업하여 설계한 공간입니다. 두 사람은 아크라와 런던 등 다양한 도시에서 함께했으며 이번에 우양미술관의 일부 공간을 재구성했습니다. 이번 설치의 공간 구조는 서아프리카 아딘 크라 문양 중 하나를 공간적으로 재해석한 형태로, 한국 전통 한옥의 마당처럼 하늘을 향해 열린 내향적 구조를 따릅니다. 공간을 보면서 왜 전시회 타이틀을 <I have been here before>라고 지었는지 느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 공간에서는 3 작품을 볼 수 있으며, 전시의 마지막에는 고요함과 사색의 순간에 이르게 되죠. 아모아코 보아포에게는 명상의 순간이며, 드로쉬에게 건축은 그 명상을 담아내는 공간입니다. 이 설치 속에서 회화와 건축은 직관적인 움직임과 깊은 인식을 유도하며, 관람자에게 감각과 사유가 만나는 고요하고 깊은 시간을 선사합니다.
여기 섹션에서는 가장 의미 있는 작품 하나만 소개할게요. 바로 <Embroidered Roses>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큰 특징은 '자수'가 들어 가 있는 점입니다. 한국과 가나, 두 문화 모두에서 자수는 전통적이며 상징적인 예술이죠. 저도 이번 전시를 통해 알게 된 정보인데요. 각각 고유한 맥락에서 사회적 지위와 상징, 장인정신을 담고 있죠. 이를 테면, 한국의 전통 자수는 왕실 의복과 가정용 직물에 활용되어 정교한 문양을 통해 의미를 전달했고, 가나에서는 스목, 카프탄, 아그바다 같은 흑인 전통 의복에 자수를 새겨 문화적 자긍심과 영적 신념을 표현해 왔습니다. 작가님의 회화에서도 이러한 전통 의상의 패턴과 실루엣이 자주 등장하며, 상징적인 시각 언어로 기능합니다.
작품을 보면 장미로 수놓아 있는데요. 서구에서 장미의 고전적 의미는 '고귀함', '사랑', '명예'입니다. 그리고 작가님에게는 유럽 미술 시장에서 획득한 성공과 지위를 의미하죠. 가나 의복에 장미를 결함함으로써, 매우 자신의 현재모습을 시각적으로 나타냅니다. 작품 속에 인물 한 명만 있을 뿐인데, 가나 문화와 한국문화 그리고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핑거페인팅으로 현대미술의 결합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 낸 점이 너무 신기했고 경이로웠습니다.
만약 한국의 자수의 역사와 미에 대해 호기심이 있으신 분들이 있다면, 이전에 썼던 글을 하나 링크 달겠습니다. 참고해 주세요.
https://brunch.co.kr/@b11887a0487a4b6/32
이렇게 4개의 섹션에서 인상 깊었던 작품들을 선정해서 소개를 다했는데요. 이번 전시는 흑인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가진 역사와 정체성, 디아스포라의 감성이라는 다소 무겁고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를, 흥미로운 시각 언어로 풀어냈습니다. 피부를 뭉개고, 화려한 패션과 단색 배경을 활용한 아모아코 보아포의 작품들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예술'이면서도, 그 깊이를 잃지 않는 미학적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이는 저에게 오랜 시간 품고 있던 창작의 신조를 되새기게 했습니다.
"어려운 것은 쉽게 만들고, 쉬운 것은 깊게 만들며, 깊은 것은 재미있게 만들어라."
아모아코 보아포는 가장 원초적인 표현 방식을 통해, 흑인 정체성의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가장 직관적이고 시각적인 재미로 끌어올렸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역사적 배경 지식 없이도 작품 앞에서 '고독하면서도 당당한 인간의 존엄'이라는 보편적인 메시지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어요. 타인의 어려운 감성을 재미있게 풀어내면서도 메시지의 힘은 잃지 않았죠. 이것이 바로 아모아코 보아포의 회화가 가진 진정한 능력이라고 느꼈는데요. 이번 전시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예술과 대중을 연결해야 할지 저에게는 동기부여와 소중한 자극을 준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Amoako Boafo, Courtesy of Wooyang Art Muse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