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디더라도 조금씩 나를 알아가는 시간들
꽤 오래 다닌 세 번째 회사를 끝으로 13년의 사회생활을 잠시 중단했다.
20대부터 내 30대를 바친 회사를 떠난 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그래도 시원 섭섭하지 않아?라는 질문을 많이 했었는데, 퇴사를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조금 더 해 볼까…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지겠지. 조금 더 고민해 보자라고 하기엔 3년 동안의 고민의 결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쉬어가자였다. 막상 퇴사가 확정되고 다니 마음이 조금 더 편해졌다.
마지막 퇴사날까지 에피소드들이 계속되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시작도 중요하지만 시작만큼 마무리를 잘하고 나오자라는 생각이 강했다.
탈도 많고 어려움도 많은 회사 생활이었지만 그 안에서 깨달음도 있고 분명 배움도 있던 곳이라 감사했던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회사를 나서기 전 그래도 9년 동안 다녔던 회사 안에서 내가 느꼈던 점에 대해서 그리고 회사가 조금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나의 오지랖에 인사팀 상무님께 인사드리러 갔다가 한마디만 하고 가겠다고 하며 이야기를 드리고 나왔다.
그러고 회사를 나오니 정말 시원한 마음이 가장 컸고 다른 건 일단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퇴사를 하기 전 이직을 확정 짓고 나오거나 미래를 계획하고 나오는 게 가장 베스트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러기엔 나의 정신상 태나 체력이 말을 듣지 않아 결국 무계획으로 우물 속에서 나왔다.
퇴사 후 돌아온 첫 월요일
약속이 있어 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퇴근 시간이랑 겹쳤는데, 그 순간 뭔가 내가 큰 죄를 지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남들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나 이래도 되나? 이러다가 나 뒤쳐지는 거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지만 언제 또 이런 시간을 가지겠냐며 스스로에게 괜찮다는 말을 되뇌었다.
그러고 한 2~3일이 지났을까? 그동안의 긴장이 풀렸는지 심한 악몽과 몸살을 앓고 말았다.
퇴사 후 가장 먼저 한 거는 여행이었다. 회사 다니면서도 여행을 다니긴 했지만 어느 순간 휴가로 떠난 여행지 속에서도 온전히 여행에 집중하는 게 아닌 일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내가 부재하는 동안 메일은 몇 백통이 쌓여 있을까 이런 걱정이 앞서서 여행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 날들이 많았는데, 퇴사 후 버킷리스트에 있던 포르투갈 여행을 떠났다.
꿈꿔 왔던 여행지에 그리고 여행에서 만난 좋은 여행 메이트들 그리고 아무런 생각 없이 온전히 여행에만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이 모든 것들이 완벽할 수 있다니!!!
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기다렸던 시간은 1년에 한 번 휴가 가는 날… 내 꿈나라로 가는 거 그게 바로 여행이었다.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들을 발견하기도 하고 진짜 세상은 크고 갈 곳은 많고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생에는 정말 정답이 없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오면 커졌던 내 시야는 다시 조그만 우물 안에 갇혀 그곳이 전부인 줄 알며 살아갔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망가져 있던 몸 회복에 전력을 다했다.
운동도 더 열심히 하고 매번 어깨와 팔 저림으로 잠도 제대로 못 잤던 어깨 치료도 꾸준히 받고 그런 와중 진짜 신기했던 건 알 수 없는 두드러기 때문에 피부과 가서 약을 먹어도 그때뿐 나아지지 않았는데 퇴사 후 일정 시간이 지나다 보니 자연스레 두드러기가 더 이상 발생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운동 선생님이 ‘미니님 퇴사 후 얼굴 핀 거 알아요? 다시 혈색이 돌아왔어요. 회사 다닐 때도 매번 웃고 있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둠이 가득했는데 이젠 얼굴에서 빛이 나기 시작한다며..’
그 이후로도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을 만났을 때도 얼굴이 많이 유해지고 편안해져 보인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었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책도 읽고, 운동도 가고 , 보고 싶던 공연들도 여유롭게 보고 평온한 시간들로 채워 가던 나날들 중 전 직장 동료로부터 듣고 싶지 않은 회사 이야기들을 들었다.
내가 퇴사날 인사팀 상무님께 말씀드렸던 내용을 토대로 우리 팀에 대한 팀원들 인터뷰가 이어졌고 이런저런 일련의 사건을 알게 된 임원진들이 결국 팀장을 다른 팀으로 유배를 보내서 언니 덕분에 요즘 회사 다닐 맛이 난다며…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가 내가 괴롭힘을 받았을 때 알면서도 본인들 살기 위해 모른 척하던 사람들이 평소에 연락도 없다가 요즘 나 때문에 회사 다닐 맛이 난다고? 이게 과연 퇴사자한테 할 소리인가 순간 화가 나기도 하고 내가 잔다르크도 아닌데 나는 퇴사하면서 다 잃고 나왔는데 퇴사하고도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 싶었다.
몇 번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 정말 많이 억울했다. 내 선에서 열심히 했는데 결국 나는 아무런 인정을 못 받고 내 커리어를 다 망치고 다시 원점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본인들은 나로 인해 요즘 너무 잘 지낸다니... 역시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본인들에게 이득이 될 때만 서로 이용하는 비즈니스 관계가 맞는 건가란 생각도 들고 자연스레 퇴사 후에는 전 회사 동료들과의 연락은 다 끊겼다.
이런 걸 경험하고 나니 내가 너무 회사-집 밖에 몰랐던 거였구나 깨닫기 시작했고 그 작은 세계에서도 인정받길 원했구나 싶었다.
퇴사 후 두 번째로 잘한 일은 시간이 될 때마다 자원활동을 다니기 시작했다.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그냥 나 스스로로 바라봐주는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니 사라졌던 인류애가 다시 생기기도 하고 몸은 조금 힘들어도 자원활동 하는 시간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러 간 시간이 아닌 나 또한 도움을 받고 힐링을 받는 시간들도 가득 채워졌다.
그러다가 나는 무엇을 원하고 어떤 삶을 살고 싶나라는 불안감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너무 회사라는 보호막 안에 있다가 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에 나오니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닌 다시 혹독한 곳이라는 곳도 깨달았다.
어떤 걸 도전하려고 하면 나이제한으로 막혀 버려 아르바이트조차 지원조차 할 수 없는..
청년이라는 나이를 만 20~39세까지라고 정해 놓았으면서도 30 중반부터는 청년이라는 범주 안에서 제외시켜 버리는…
퇴사 후 다른 모든 것들이 나를 여유롭게 만들어줬지만 매달 줄어드는 통장 잔고들이 나를 다시 옮아 매기 시작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지만 관심 분야에 알바조차 지원할 수 없는 여러 현실들을 마주하고 난 후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전 직종으로 이직 준비를 하고 중소기업으로 4번째 회사를 들어간다.
고정 수입이 없어 불안한 내가 연봉을 버리고 시간을 조금 더 벌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자는 마인드였지만 4번째 회사는 지금까지 다닌 회사 중 가장 최악이었고 다시 몸이 신호를 보내기도 하고 연봉은 연봉대로 삭감되고 시간은 매일 야근에 오히려 더 마이너스가 되었다.
이러다 보니 자존감은 다시 한번 무너졌고, 또다시 자책하기 시작했다.
30대 중. 후반에 서 있는 나는 내 안에서 나름 열심히 지독치열하게 살았음에도 아무것도 이뤄 놓은 것도 없고 뭔가 하고 싶은 것도 없으면서 대책 없이 그나마 안정적인 것들을 떨쳐 버리고 나왔을까..
그렇게 4번째 회사는 내 인생 사회생활 중 가장 짧은 마침표를 찍게 된다.
이렇게 계속 시간을 버리느니 차라리 아닌 곳은 빨리 나오자라는 마인드를 배웠다.
또다시 나는 자발적 백수가 되었다.
4번째 사회생활을 마치고 나니 확실히 내가 어떤 걸 싫어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못 참는지 명확히 아는 계기가 되었다.
예전에도 나는 좋고 싫음이 명확한 사람이었지만 사회생활을 하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만은 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기에 조금씩 참고 지내왔지만 정말 아닌 건 아닌 건가 보다.
이제는 싫어하는 걸 참고하려고 하면 몸에서 가장 먼저 신호를 보낸다.
남들보다 늦게 나에 대해 알아가고 있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알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려고 한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지만 잘 안된다.
안 그러면 내 특성상 내 자책을 많이 할 걸 알기에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잠자기 전 또 많은 생각들로 나를 괴롭히지 않기 위해서 …
많이 느리고 더디더라도 남들의 기준이 아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한번 사는 삶 잘 살고 싶다.
여전히 방황하고 두렵고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시간들이지만 이 시간들도 분명 나에게 필요한 시간들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