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경상도 싸나이?
로마에서 만난 아빠는 손자 손녀 맛난 거 사주시겠다고 여행경비를 두둑이 챙겨 오셨다.
하얀 종이봉투에 두둑이.
가이드가 말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소매치기 조심하셔야 합니다. 제가 워낙 여러 번 이야기하니 손님들이 소매치기당하셔도 이야기를 못하시더라고요. 아버님 어머님들 가방 꼭 앞으로 매시고요. 테이블에 가방이나 핸드폰 두고 가시면 바로 없어집니다."
소매치기에 대한 주의를 듣고 또 들었다.
"당신 그 손가방에 든 돈 좀 다른데 넣어봐요."
"됐다."
난 얼른 뒤를 돌아봤다.
"아빠 돈 다 들고 나왔어요? 숙소에 두고 당일 쓸 것만 들고 나오면 되는데..."
"아이다."
"응? 엄마, 아빠 돈 다 들고 나왔어?"
"저기 봐라. 봉투에 돈 다~ 들었다."
"아빠, 나 좀 나눠 주세요."
"아이다. 괜찮다."
"할아버지 소매치기 당하면 어떡해요? 우리 돈 없으면 어떻게 다녀요."
"아이다. 할아버지 소매치기 안 당한다. 괜찮다."
하지만 엄마랑 내가 말할 때는 꼼짝도 않더니 손자 손녀가 걱정하자 봉투를 내어 주셨다.
아빠는 유로와 파운드까지 다 든 봉투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 이걸 매일 가방에 넣어 다녔다고?
얼른 봉투에서 반쯤 뺐다.
"한 번에 다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제가 반 가지고 있을게요."
아빠는 듣고 보고도 못한 척이다. 왜 저럴까.
"당신, 가방 좀 앞으로 매 봐요."
"왜?"
"소매치기당한다잖아요."
"아이다. 괜찮다."
"아니, 가이드가 이야기하는 거 들었잖아요?"
"나는 괜찮다니까."
뒤에서 듣고 있자니 이젠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다.
저녁시간에 5조 다른 가족과 함께 앉았다.
다들 종일 돌아다녔으니 손 좀 씻고 밥을 먹자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우리 아이들을 먼저 보냈다.
돌아온 손녀가 발랄하게 묻는다.
"할아버지 할아버진 손 안 씻어?"
"할아버지 씻었다."
엥? 나는 눈이 커졌다.
"아니, 아빠 손 안 씻었잖아요"
"안 씻어도 괜찮다."
"응? 씻고 오세요."
"나는 괜찮다."
"아빠 다른 사람들도 같이 밥 먹잖아요."
"..."
"할아버지 씻고 오세요. 얼른요~."
"..."
"얘들아, 우리 중에 젤 말썽꾸러기는 할아버지인가 보다."
지친 나는 화가 나서 한마디 했다.
"..."
"할아버지 빨리 다녀오세요."
손녀의 부탁에 그제야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아빠는 왜 저러시는 걸까?
엄마 말처럼 우기기 대장인가?
다 나는 괜찮단다.
다 처음 하는 거면서,
엄마는 계속 자기 말은 씨알도 안 먹힌다고 화내고
아빠는 자긴 괜찮다고 화낸다. 보고 있자니 대화는 패턴이 정해져 있다. 재미없는 만담 콤비.
내가 끼어들 곳이 아니었나 보다.
아빠는 엄마말을 안 듣고
엄마는 자기 말을 안 듣는 아빠가 화가 난다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대화다.
그런데 어제 관광버스의 짐 내리는 아빠를 보고 어렴풋이 알 거 같았다.
"자, 남자분들 이제 짐을 내려야 하는데 좀 도와주세요."
가이드는 분명 단체로 직장에서 워크샵 온 젊은 남자분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요청했을 거다.
그런데 70이 다 되어가는 아빠가 가이드 옆에서 열심히 캐리어를 내리고 있었다.
아빠, 아빠가 타깃이 아니야.. 속으로 생각하던 중
아! 아빠가 왜! 그러는지 깨달았다.
우리 아빠는 아직 자기가 번 돈으로 딸 손녀 손자까지 먹일 수 있어서 돈은 내가 간수해야 하고
소매치기 따위는 내 가방을 건드리지 못할 거라 무섭지 않고
손에 묻은 세균 따위는 하등 신경 쓸 것도 못 되는 것이다.
아빠 마음에 아직 아빠는 청년이구나...
엄마의 백팩을 마치 자기 것인 마냥 뒤로 매고 씩씩하게 가이드를 따라가는 아빠가 보인다.
우리가 다 컸음에도 여전히 딸의 자식까지 묶어서 어깨에 지고 걸어가고 있었다.
머리는 하얗게 되고
어깨는 좁아지고
이제 걸음걸이는 약간 어설픈데도
아직 다 내가 해야지라고 생각하나 보다.
이제는 좀 놓아도 될 텐데
우리도 다 컸는데.
넘치는 의욕만 앞섰던지 다음 날,
엄마가 아침부터 날 잡고 이야기했다.
니 아빠가 어제 그렇게 캐리어를 옮기더니 아침부터 일어나서 허리가 아프단다.
타박하는 말에 먼 산 바라보며 내 눈길을 피하던
아빠의 그 씁쓸하고 기죽은 표정이 나의 생각에 확신을 심어줬다.
우리 아빠는 아직도 마음은 청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