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관계의 깊이다
글을 쓰며 가까이 지내던 지인이 췌장암 4기 판정을 받았다. 말기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어둡고 너무 날카롭다. 그 소식을 듣던 순간, 가슴속 어딘가가 스르르 젖어드는 단어가 주는 무게가 있었다. 그 무게를 어찌 감당을 할까 싶어서 조심스레 안부를 묻곤 했다. 그러던 그즈음에 여럿이 병문안을 갔던 날, 그녀는 해맑게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었다. "수술이 끝나면 그다음에는 뭐가 있나요?"라고 그녀가 주치의에게 물었다고 한다. 담당 의사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고. "삶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녀는 항암의 고통도, 합병증이라는 차가운 말도, 병원 복도에 떠도는 약 냄새조차도 잠시 멈추게 하는 힘이 되었다고, 그녀는 그 말을 곱씹으며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마치 오래된 단어에 새 숨을 불어넣듯이, 삶이라는 부드러운 빛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번역해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그 말에 힘을 얻었고 분명히 살고 싶은 강한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판정을 받은 6개월 하고 한 달을 더 살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떠난 뒤, 오래도록 마음에 맴도는 질문이 있었다. 삶은 뭘까, 그리고 죽음은 뭘까.
인생을 살다 보면 피해 갈 수 없는 질문이 있다. 사랑하는 인척의 죽음. 또 가까운 지인의 갑작스러운 이별. 그 중단된 호흡의 빈자리는 오래도록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소설가 '야콥 하인'은 말했다.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지금껏 돌아온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겠느냐고." 슬픈 위로 같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아름다운 상상이다. 하지만 이성과 논리가 우위에 서 있는 사회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죽음이 아름다울 수도 없고 따뜻한 문학적인 표현조차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 마지막이기에 그래서 상실 앞에서 더더욱 버거워한다.
세상은 과거보다 훨씬 편리하다. 수많은 혜택을 누리며 산다. 하지만 그 편리함을 유지하기 위해 숨 가쁘게 달리는 삶 속에서, 정작 마음은 가난해질 때가 많다. 상상력과 낭만은 도시의 바람에 실려 떠도는 민들레 홀씨처럼 쉽게 흩어진다. 손바닥에 살짝 닿았다가도 금세 사라져 버린다. 바쁜 일상 속에서 삶을 음미하기보다 지키기에 급급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잊기 위해 바쁘다.
그러나 죽음은, 고단함과 무관하게 언제나 제시간에 찾아온다. 어떤 이는 오래 살다 조용히 떠나고, 어떤 이는 아직 할 일이 남았는데도, 사랑이 충분히 남아 있는데도 너무 빨리 떠난다. 평균 수명이 길어졌다는 통계는 때로 위로일 뿐, 현실은 훨씬 예측 불가하고 불안정하다. 사회의 변화와 환경의 급변과, 알 수 없는 질병들 사이에서 삶의 길이는 생각보다 취약하다.
그래서일까. 요즘 삶을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관계의 깊이로 새로이 바라보게 된다. 누군가의 손을 한 번 더 잡아주는 일, 고맙다고 말하고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떠날 사람을 마음이 허락하는 한 따뜻하게 배웅해 주는 일. 그것이 어쩌면 삶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서로에게 잠시 머물다가는 연결이지만, 그 잠시가 서로의 마음을 어떤 색으로 물들이느냐에 따라 인생의 온기는 달라진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삶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계가 귀한 것은 시간이 되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삶은 살아낸 날들의 총합이 아니라 사랑했던 순간들의 조각이다. 죽음은 그 조각들이 완성되는 마지막 잎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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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 한 곳이 뜨겁게 저며온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문장 하나, "수술 뒤에는 삶이 있다." 그 말은 아직도 내 안에서 작은 울림처럼 살아 있다. 삶은 무엇일까. 죽음은 무엇일까. 언젠가 올 것이기에 두렵지만, 사랑을 더 깊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과제이다. 모두 언젠가 떠나는 일.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유일한 철학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