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유혹하는 9가지 유형
로버트 그린의 『유혹의 기술』은 책 제목으로 인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마치 '이성'을 유혹하는 기술이 기술(記述)된 것 같은 제목이지만 사실 이 책은 '인간'을 유혹하는 기술에 관한 책이다.
인간을 유혹하는 기술에 대한 책을 쓴다면 대략 세 가지 정도의 방향이 있을 것이다.
제일 많은 유형은 자존감 책이다. 자신 있어 보이는 태도는 자연스럽게 사람을 끌어당긴다. 범위를 확장하면 자기 계발서들도 이 방향에 속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방향은 픽업 아티스트 계열의 책으로 유혹의 실전기술에 대해 다루는 책이다. 한 때 유행했었던 얼굴 심리학(표정 심리학) 책이나, 넛지(Nudge)를 이용한 미러링 기술, 또는 갑을 반전 기술과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지는 언 익스펙티브효과 등의 라포 형성 기술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책들은 해당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씩 읽어봤을 만한 것들이다.
세 번째 유형은 바로 로버트그린의 『유혹의 기술』책이 선택한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순수한 사랑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의 메커니즘"으로 해석한 방향이다.
이 책은 "누군가와 잘 지내고 싶다." 정도의 욕망을 반영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유혹은 일반적인 친밀함의 농도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이 책이 독자에게 제시하는 유혹은, 책의 원제 『The Art of Seduction』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대를 그저 내 옆자리에 앉히는 것이 아니다. 유혹의 상대를 쓰러트리고 눕혀 벗기고 해부하여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일. 마치 뱀이 먹이를 삼키듯 유혹하고자 하는 대상의 세계를 완전히 나로 물들이는 것이다.
로버트 그린은 이 선진적인 목표를 위해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성향에 따라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유혹자의 유형 9가지를 제시한다.
해방과 자유의 세이렌, 위험한 정열의 레이크, 이상적 연인상인 아이디얼 러버, 거침없는 댄디, 순수함의 전형 내추럴, 미당의 고수 코케트, 편안함을 이끄는 차머, 신비한 카리스마, 동경의 대상이 되는 스타가 그것이다. 용어의 유치함은 잠시 흐린 눈으로 넘어가자. 이 책의 초판은 2002년이니까.
이 책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자신의 유형을 찾아보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스물두 살에는 MBTI로 말하자면 ESTP였고, 내추럴이었다.
자신의 유형을 찾았다면 이제 책이 제시하는 유혹의 스물네 가지 전략을 보면 된다. 놀랍게도 이 전략은 앞서 이야기했던 두 번째 책 유형, 픽업 아티스트 계열의 책의 문법과 유사하다. 그중에서도 다크 심리학 계열과 궤를 같이 한다. 특히 모호함도 무기가 된다는 부분이나, 죄책감을 공유하는 부분에서는 작가의 고정적 세계관인 성악설을 엿볼 수 있다.
내가 생각할 때 이 책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자, 재미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1부 10장(웅진지식하우스의 재판본 버전으로는 PART 1의 CHARACTER 10 - 반유혹자 (유혹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유혹의 기술』은 매혹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치명적인 원인으로 '불안감'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불안감이란 유혹당하지 않으려는 불안감으로써 타인의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관계를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한 마디로 유혹자가 되려면 유혹당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타인의 유혹을 거부하는 사람은 유혹 그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이다. 유혹과 친하지 않은 사람이 유혹자가 될 수는 없다. 유혹이란 일방적인 사냥이 아닌, 서로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위험한 놀이에 가깝다. 상대를 내 세계로 끌어들여 나로 물들이려 한다면, 필연적으로 나도 상대방의 세계로 끌려 들어갈 위험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로버트 그린에 의하면 반유혹자들의 매력 없음은 그들이 도덕적이거나 성실해서가 아니라 겁쟁이라서다. 반유혹자들은 상처받거나 손해 볼까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감정이 스스로의 통제 밖으로 밀려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옹졸함으로, 그들에게 스스로 통제당하고자 하는 타인의 이끌림을 차갑게 식혀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역설적이게도 이 책에서 말하는 '유혹의 기술'은 기술을 버리고 타인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기꺼이 휩쓸릴 용기를 갖는 것 일지 모른다.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사랑을 가질 수 있다. 유혹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유혹할 수 있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기꺼이 자신을 내어줄 준비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유혹자가 될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