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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불안(Status Anxiety)』

by 정채린

알랭 드 보통의 『불안(Status Anxiety)』은 제목부터 너무 솔직하다.

책의 기본 논지는 단순하다. 우리는 돈과 성공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를 통해 얻는 인정과 사랑을 갈망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실패는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가 되고, 평등 이념이 강해질수록 작은 차이에도 민감해진다. 가난은 운이 아니라 무능으로 규정되고 부는 운이 아니라 덕목으로 포장된다. 이 이야기는 분명 설득력이 있다. 문제는, 이 책이 새로운 통찰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짜깁기해온 개념을 보기좋게 재포장한 것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 책은 연휴를 맞아 백화점 지하에서 파는 십만 원짜리 선물세트다.


실제로 영국의 한 평론가는 이 책을 두고 옛 사상가들의 생각을 널리 읽은 모범생이 요약 과제를 제출한 것 같다고 평한다.

또 다른 평론가는 지위 불안이라는 주제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알랭 드 보통 특유의 모자이크식 짧은 단상 스타일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한 장 한 장은 읽기 편하고 우아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거대한 구조가 남기보다는 세련된 잡지 칼럼을 여러 편 읽은 듯한 피로감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쓸모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 책은 분명 대중 친화적인 큐레이터다.

철학, 종교, 예술, 정치, 기독교라는 거대한 틀을 빌려 현대식 불안에 대한 정돈된 위로를 전한다. 철학자의 불안에 대한 에세이라는 타이틀은 이 책에 대해 기대를 품게 한다. 그리고 그 기대한 이의 기반 지식의 수준에 따라 만족을 주기도 하고, 돈 만오천 원이 아깝다는 생각을 주기도 한다. 돈만 아까운 건 아니다 시간은 더 아까웠다.

이 책에 많은 기대를 하지 마라. 내가 이렇게 서평을 두 개나 쓰면서 이 책을 까는 이유도 이 책에 대한 평가에 너무 큰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심리학 이론이나 사회학 고전을 몇 권이라도 읽었다면 그래서 남들에게 그것을 가르칠 순 없어도 말할 순 있을 정도로 알고 있다면, 굳이 이 책을 사지는 마라.

차라리 그 돈과 시간으로 페르난도 페소아의 『불안의 서』 를 읽어라. 훨씬 큰 지적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현대 철학자의 위대한 통찰’로 읽으면 실망할 것이고 연말에 교양이나 채울까 싶어 문화센터에서 열리는 교양 강의를 듣는 정도로 생각하면 만족할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이 18세기나 19세기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우리 어머니보다 한참 어린, 아마 실제로 만난다면 호칭이 오빠일 사람이라는 것이 제일 놀랍다. 내가 생각할 때 이 책을 위대한 통찰 또는 들을만한 깊은 통찰로 받아들이기에 2025년 한국의 독자들은 지나치게 교양 있고, 박식하다.

그러니 알랭 드 보통이 일반 대중들의 수준을 심각하게 얕본 것이 아니라면, 그의 조국인 영국 일반인의 교양 수준을 의심해야겠다.


얼마 전 내 알고리즘에 우연히 뜬 어떤 철학 전공자이자, 무명 소설가인 유투버가 ‘주변에 자기처럼 철학과 문학을 동시에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아마 나 같은 (뛰어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라는 논조의 영상을 봤는데. 철학과 문학을 같이 하면 자의식 과잉이 세트메뉴로 딸려 오는 건가 싶다.

나는 그 유투버의 영상에 댓글을 달지 않았다. 그는 자의식 과잉이었을진 몰라도, 타인을 깔아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안』은 교묘히 대중을 자기의 밑에 둔다. 벌써 이 책을 읽고 기분 나빠하는 독서 모임 사람이 세 명이나 생겼다. 요즘 밈으로 하면 이 책은 0 고백 1 차임이다.

난 고백한 적 없는데 차인 느낌. 길을 가는데 갑자기 어떤 대머리 남자가 와서 “너 학사냐? 난 박산데. 하며 사탕 하나를 쥐어주고 간 느낌”이다.


이번 주 토요일에 이 책의 독서모임이 예정되어 있다. 그날 나는 나의 동지들과 함께 이 책에 콧구멍을 만들고 아까 받은 그 사탕을 그 콧구멍에 넣어 달콤한 숨을 쉬게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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