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인데 미역국은 챙겨 먹었지? 먼 곳에서 온 어머니의 안부. 그리고 이어지는 독백 같은 말씀. 원래 미역국은 내가 먹어야 하는 건데. 실정을 따지자면, 미역국은 어머니와 자식 모두가 생일에 먹는 음식이다. 유래가 그렇다고 한다. 아이의 장수를 바라는 마음에서 장곽長藿이라 하는 넓고 길쭉한, 자르지 않은 미역을 몸푼 산모의 첫 끼니로 주었다고도 하고, 미역(국)의 여러 영양성분이 산모와 그의 젖을 먹는 신생아에게 도움이 되는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산모가 어머니가 되면서부터는 미역국을 먹는 입장에서 아이에게 끓여주는 입장이 되어버린다. 역시 어머니에겐 자식이 자신에 앞서는 걸까. 얻어먹는 자식의 입장에선 어머니께서 날 낳으시고 이런 미역국을 드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환기의 효과가 있을 법하다. 그렇다면 어머니와 자식 모두의 인식에 영향을 주는 음식이라 해도 좋을지 모른다.
생일이라는 단어도 미역국처럼 양방향에서 온다. 생生의 뜻을 보면 ‘나다’와 ‘자라다’가 한쌍이고, ‘낳다’와 ‘기르다’가 한쌍이다. 나서 자라는 것은 낳고 기르는 덕택이지만, 전자 없이는 후자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로는 동등하다. 그래도 자식된 입장에서는 내가 태어난 날이라기보다는 어머니께서 날 낳으신 날이라고 하고 싶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만 같다. 원래 미역국은 내가 먹어야 되는 건데, 라는 말씀을 들은 사연 때문일까.
사전을 펼친 김에 생의 모양도 살펴본다. 땅[土] 위로 초목의 싹[屮]이 터서 나온 모양을 본뜬 글자라고 풀고 있다. 씨앗이 발아해 비옥한 대지 위를 비집고 나온 여린 새싹. 생명의 씨앗이라는 관용적 표현도 있듯이 우리네 생각의 근간에는 생명의 시작은 씨앗이라는 관념이 자리해 있는 듯하다. 더불어 식물과 동물을 별개로 대하지 않은 마음도 엿보인다. 그런 이유로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생명도 씨앗에서 나왔다고 하는 게 아닐까. 난자와 정자의 자子에는 씨앗이란 뜻이 있으니 말이다.
반면 영어의 birth나 bear에는 생명이란 뜻이 거의 없다. 전자는 명사로 ‘탄생’, 후자는 동사로 ‘낳다’라는 뜻이다. bear를 수동태로 쓰면 be born, ‘태어나다’가 된다. 명사든 동사든, 능동이든 수동이든 매한가지로 생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두 단어는 인간과 동물, 그리고 사건에 모두 해당되지만 식물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어감으로는 생산하다, 제작하다는 뜻의 produce에 더 가까워 보인다. 동물이 새끼를 낳는 것은 breed, 알을 낳는 것은 spawn으로 별개의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식물의 경우 싹이 나서 자라는 것은 sprout를 쓴다. (영어에서 보통 생명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단어들, 가령 life, live나 접두사 bio-가 birth 또는 bear와 별개의 모양새로 있는 것은 우리의 언어 감각으로 보자면 적이 낯설다. 아마 다른 인도-유럽어의 사정도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이 단어들 모두는 논리적으로 보자면 주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낳거나 태어난 주체가 무엇인지 추론을 가능하게 하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인간의 출생과 구별하기 위해 나온 단어일 것이다. 인간 동물 식물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선을 긋기 위해, 각자의 자리를 넘나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생명에 위계가 있다는 사고방식. 기독교 성경 「창세기」 1장에 보면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이 각기 다른 날에 태어난 까닭이 여기에 있을까. 식물과 동물은 각각의 형상을 따르지만, 인간만이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created]고 한다. 어떻게 보든 인간 동물 식물에게 공통적인 생은 없는 셈이다.
생일 미역국 한 그릇이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몸을 녹녹하게 한다. 마음도 데워진다. 미역의 영양성분에 미역을 낳고 키운 어머니 자연과, 미역이 식품이 되기까지 소요된 수많은 노동력들, 그리고 끓여준 이의 어여쁜 손길... 헤아릴 수 없는 이 모든 정성이 더해진 귀한 한 그릇이다. 도무지 이 모두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모두가 내 삶의 에너지가 되는 때문이다. 그 자체가 바로 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