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홀 아래 (단편소설)
그의 비루한 죽음이 아침 뉴스에 나왔을 때 나는 씽크대 앞에 서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기자의 목소리에 긴박감이 느껴졌다.
“제천 소방본부에 따르면, 맨홀 아래 오수관 관로에서 작업하던 50대 남성 1명이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함께 작업하던 다른 40대 남성 1명이 실종돼 소방 당국이 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2인 1조의 남자 둘이 맨홀 아래 오수관 관로에서 작업하다 일어난 사고였다. 냉장고를 열고 잠시 섰다가 저녁으로 먹고 남은 추어탕에 밥을 말았다.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국그릇을 들고 티브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눈을 비비며, 아침부터 해결하는 습관은 엄마로부터 독립한 후 온전히 지킨 유일한 것이다. 아침만큼은 거르지 않았다.
화면 속 맨홀 뚜껑이 열린 장소엔 당혹감과 비통함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양복 차림의 전문가 사진을 오른쪽에 띄운 채 화면 속엔 수색을 맡은 경찰과 소방 당국 직원, 해당 업체 관계자들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전문가는 한여름 맨홀 아래 유독가스는 매우 치명적이기 때문에 그로 인한 질식사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맨홀 구멍을 뒤로하고 아스팔트 위에 무릎을 꿇어앉은 기자는 앳된 얼굴을 가진 젊은 여성이었다.
안전모를 손에 든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오수관 관리 작업에 따른 안전규칙 준수 여부가 사건의 진상 파악에 중요한 열쇠가 될 거라 말했다. 그러더니 카메라를 쏘아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심정지 상태로 발견된 작업자는 안전모 등 안전 장비 없이 일반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순간 혀를 깨물었다.
“아아!”
티비 화면은 이미 날씨화면으로 바뀌었지만, 기자의 마지막 멘트가 마치 나를 향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실종되었다. 맨홀 아래에 누군가가 실종될 정도로 큰 공간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겉으로 보이던 구멍은 그 거대한 깊이를 전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작게 보였다. 기자가 전한, 한쪽 신발과 작고 깊은 구멍, 그리고 땅 아래 실종된 남자가 종일 떠올랐다.
시리얼 한술은 늘 달콤했지만 짜거나 매운맛이 그리울 땐 전날 먹었던 탕이나 찌개 국물에 햇반을 말았다. 아침에 조리하는 일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엄마가 보내준 밑반찬 한두 가지에 밥을 먹는 것도 그만둔 지 여러 달이 지났다. 무릎 연골 주사를 맞은 뒤로 엄마는 장보기를 줄였고 반찬 나르던 일을 접었다. 몇 년을 밀어내던 일이, 그제야 자연스레 끝나버렸다. 있을 땐 버리는 것이 일이었던 밑반찬들은 하얀 쌀밥을 두고 한없이 아쉽기만 했다. 반찬가게에서 공수한 반찬들은 너무 달아 쉽게 물렸으며 냉장고 속에서 썩어가기 일쑤였다. 이후 햇반과 김, 그리고 팩으로 배달되는 탕을 쟁여두고 사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출근길은 늘 고단했다. 영진운수는 꽤 큰 회사였지만, 내가 타는 노선만은 유독 낡은 버스였다. 자리는 좀처럼 나지 않았고, 냉방은 있으나 마나였다.
늘어진 비닐 커버에 쌓인 끈끈한 손잡이를 잡을 때마다 나는 불쾌함을 느꼈다. 게다가 오래된 재래시장에 가기 위해 끌게를 들고 탄 사람들이 있어 버스 안은 두 다리를 온전히 세워두기조차 불가능할 때가 많았다. 고단한 얼굴의 젊은이 중 몇은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며 인상을 썼다. 그런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 노인들과 버스가 같이 홀대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무심하게 핸드폰 영상을 보며 몸의 균형을 이루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버스에 오르기 전 해를 마주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땀으로 번들거렸다.
삼 십여 분이 지나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어깨 위로 쏟아졌지만 체온이 남은 의자는 뜨거웠다. 회사 앞 역 주변은 아침부터 공사 소음이 요란했다. 대형 건물의 벽면을 뒤덮은 전광판에 미끈한 백인 여자의 걸음걸이가 눈길을 끌었다.
엄마에게 전화가 온 것은 며칠 뒤였다.
“너 뉴스 봤어?” 몇 주 만에 전화를 걸어 다급하게 묻는 엄마 목소리에 짜증부터 났다. 엄마는 ‘그거 티비에 나왔쟎아, 너 그거 봤니?’를 물으며 시작했다.
“아니,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뉴스를 왜?”
“아이, 글쎄 기혁이 죽었단다. 뉴스에도 나왔다는데.” 엄마는 안부도 묻지 않고 대뜸 누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예상치 못한 말이어서 나는 처음에 이름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뭐라구? 엄마, 누가 죽어?”
“기혁이 삼촌 말야. 제천, 기”울컥한 엄마가 말끝을 흐렸다.
“왜?”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왜? 라는 질문이 기이하다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제천이라는 지명을 들었을 때 뭔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아니, 글쎄 뉴스에도 나왔다던데. 땅 밑에 들어가 일하다 죽었다더라.” 엄마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땅 밑? 그게 뭐야? 땅 밑에 왜 들어갔는데?”
그의 행적은 늘 기이한 느낌이 있어 나는 땅 밑이란 말에 그가 하다 하다 별일을 다 한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그, 그 뭐야? 하수도 같은 거 보러 들어가는 거기 그 구멍.” 엄마는 맨홀을 떠올리지 못해 짜증을 내며 재촉했다.
“아아, 맨홀?”
“그래, 거기 들어가 일하다 죽었단다, 글쎄.”
엄마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 뉴스에 나왔던 장소의 광경이 바로 떠올랐다. 그리고 카메라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여기자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우느라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엄마의 이야기는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에 다시 들을 수 있었다. 경찰서로부터 받은 전화에 얼마나 놀랐을지 예상이 되었다.
그제야 그의 죽음이 조금씩 현실로 다가왔다. 오빠라 부르기엔 너무 나이가 많아, 나는 그를 어려서부터 삼촌이라 불렀다. 스무 살 이상 차이 나는 그를 오빠로 부르기엔 무리라 여긴 아버지와 엄마도 그 호칭을 굳이 고치려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고모들이 한마디 훈수를 한 적은 있지만, 그마저도 단 한 번뿐이었다.
사실 그를 삼촌이라 부를 일도 거의 없었다. 그가 우리 집에 나타날 때면, 늘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 흐르던 침묵의 긴장감에 숨이 막히곤 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 추석 연휴였다. 나이 지긋한 고모들이 엄마의 상차림에 이것저것 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오랜 외지생활 끝에 나타난 그는 검게 그을린 얼굴에 긴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급하게 잡채며 전을 먹는 그의 등을 쓰다듬던 큰고모가 말했다.
“이 집 장손 꼴 좀 보소.”
“그만해. 고모.”
그가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닦으며 내가 건넨 물병을 받았다.
그때 내가 물었었다.
“삼촌은 누구네 식구예요?”
어린 나는 나이 든 남자면 으레 삼촌이라 부르는 줄 알았다. 익숙한 삼촌들은 모두 엄마 쪽뿐이었다. 고모들은 일제히 싸늘하게 굳었고, 엄마는 황급히 나를 안아 방으로 데려갔다. 그 후 명절에 그를 본 기억은 없다. 그는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에야, 그가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그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아버지의 재혼이 그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엄마와의 결혼 이후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했다. 처음엔 강릉 큰고모 집에 머물며 언젠간 돌아올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보름도 안 되어,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큰고모는 내게 밥을 떠먹이던 아버지를 향해 언성을 높인 적도 있었다.
“아들의 행방도 모르면서 밥이 넘어가냐고!”
“누나, 나 하루도 마음 편히 살 수가 없어. 기혁이 내 새끼야.”
고모의 말을 듣던 아버지는 울분을 터뜨렸다. 그 울분 속에는 깊은 절망과 회한이 섞여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아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고모들의 눈엔 아버지에 대한 측은함이 담겨 있었지만, 엄마의 등 뒤에선 그 눈빛이 적개심으로 바뀌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도 가족들로부터 한 발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고모들의 방문을 반기지 않았고, 중학교에 들어선 뒤부터 고모들을 보는 일은 드물어졌다.
아버지 퇴직을 앞둔 어느 봄날, 세 고모가 불쑥 찾아왔다. 엄마와 나는 학원을 알아보려 외출 채비 중이었다. 외출을 미루게 하려는 고모들을 보며, 나는 엄마의 결혼과 그의 가출, 방황에 대한 반감이 들었고, 빨리 이 집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한 달 넘게 고모들의 전화가 이어졌고, 엄마와 아버지는 거의 말을 섞지 않으며 그 봄을 보냈다.
대학생이 되면서 내 생활의 중심은 서울로 옮겨졌다. 엄마는 서울에 내 거처를 마련하려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그를 떠올릴 일은 거의 없었다. 매일이 바빴고, 시간은 생각보다 빨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퇴직금 일부로 서울 거처를 마련하려는 엄마와 오빠 몫을 주장하는 고모들이 몇 달간 충돌했다. 아버지는 네 여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집 밖을 맴돌았고, 빠르게 늙어갔다. 시간이 많아진 아버지는 점점 그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에 잠식되어 갔다.
한때는 눈먼 사랑으로 남의 삶을 흔들었던 엄마와 아버지는 서로를 원망하며 멀어졌고, 그에 따라 아버지의 건강도 급격히 나빠졌다.
아버지 장례식 날, 고모들 사이에 아버지를 빼닮은 그가 앉아 있었다. 대학생이던 나를 본 그는 내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웃었다. 그 모습 속에서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겹쳐 보였다. 퇴직금과 연금을 두고 고모들은 기혁의 몫을 두고 엄마와 갈등했다. 고모부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큰소리와 험한 말이 오가며 싸움으로 번졌을 상황이었다. 몇 달 뒤, 막내고모와 대화를 나눈 엄마가 큰 결심을 하고 그를 찾았지만, 그는 연안 어선을 타고 있다고 전해졌다.
“모르지. 제 엄마가 바닷가 출신이라 그런지.”
친구와 통화하던 엄마의 힘없는 목소리엔 회한과 연민이 묻어 있었다.
큰고모의 장례식에서 다시 만난 그는 마르고 검게 그을려 더 바싹 말라 보였다. 엄마를 대신한 큰고모의 죽음 앞에서 그는 말이 없었고, 눈빛은 공허해 보였다. 장례 후 엄마는 그에게 엄마 노릇을 해보려 했지만,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해 뒤, 그가 원양어선을 타고 멀리 떠났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세월이 흘러 고모들도 늙어 왕래가 끊기면서, 그의 존재도 점점 잊혔다.
그가 한국에 정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건 내가 서른이 되어 가던 어느 가을이었다. 한국에서 알게 된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는 이야기를 막내 고모의 딸 지유를 통해 들었다. 지유는 나와 동갑으로, 어른들의 감정과는 별개로 대학과 취업 시기를 함께 보냈다. 가족 간의 불화에도 우리는 서울에서 가끔 만나 밥을 먹고 길을 걸었다.
그가 살림을 차리기 전, 아이가 하나 딸린 여자와 함께 인사를 온 날 막내 고모가 눈물을 글썽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지유가 나의 방에 맥주를 사들고 왔던 날이었다. 지유는 여자의 생김새며 옷차림, 그리고 같이 온 사내아이의 행동들을 자세히 묘사하며 호기심을 보였다. 그가 전국 각지를 떠도는 동안 여자를 소개한 적은 처음이었다. 지유는 드디어 기혁이 한 곳에 뿌리를 내릴 것 같다고 했다. 그를 오랫동안 보아온 우리는 그가 배를 타기 시작했던 나이에 이른 우리의 삶과 미래를 생각하며 잔을 들었다.
얼마 후 그가 돈벌이를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며 조만간 결혼식도 할 것 같다고 말할 때 오랜만에 달뜬 엄마의 긴 수다가 싫지 않았다.
그런지가 얼마되지 않았는데 별안간 그가 죽었다니! 전화기 너머 우는 엄마에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어둠이 스며든 방안, 나는 눈앞의 벽, 뉴스에서 본 맨홀, 그리고 그의 얼굴이 겹쳐지며 시간과 공간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한참을 울고난 엄마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전화기 화면에 뜬 낯선 번호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다가 마침내 받았다고 했다.
“네, 여보세요?” 경계를 하며 물었을 때 어떤 말에도 넘어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 순간 엄마에게 사기전화라면 의당 내 이름을 들먹일 것으로 여겼을 테니까.
“제천경찰서입니다. 혹시 권기혁씨 가족분 되시나요?”
순간 엄마는 전화를 놓을 뻔했다고 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려 전화기를 힘줘 붙들었다고. 기혁이가 엄마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생각하니 오히려 의심이 없어졌다고 했다.
“…기혁이요? 예, 제가… 엄마예요.” 기혁이 엄마라는 말을 입으로 뱉은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다름 아니라, 며칠 전 제천에서 일어난 맨홀 사고와 관련해서 연락드렸습니다. 현장에 두 분이 계셨는데, 업체 대표이신 한 분은 사고 당일 심정지로 발견되셨다가 사망하셨고요, 한 분은… 실종 상태였거든요.”
“경찰이 놀라지 말라며 잠시 말을 멈추더라” 엄마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엄마는 전화기 너머로 흘러나오는 경찰의 말이 마치 뉴스 보도처럼 들렸다고 했다.
“지금은 권기혁씨 신원이 확인되었고요. 유가족 확인이 필요해서 연락드렸습니다. DNA 시료 협조 부탁드립니다.”
순간 엄마는 멍해져서 말을 잇지 못했다고 했다.
“여보세요? 권기혁씨 어머니?”
“그, 그럼… 그게… 기혁이 맞단 말이에요?”
“네. 실종되었던 권기혁씨, 수색 사흘째 되는 날, 맨홀 아래 600미터 지점 강 하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유해는 병원으로 이송됐고, 현재 병원 측에서 유족 확인 절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근조화환이 늘어선 장례식장 복도엔 무거운 공기가 깔려 있었다. 두꺼운 유리문 안 축축하고 서늘한 냉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나는 화환도 조문객도 없는 권기혁의 구석진 빈소 앞에 섰다. 아버지를 닮은 권기혁의 젊은 시절 사진이 놓여 있었다. 고모네 식구들 틈에 엄마가 부은 얼굴을 하고 나를 보자마자 통곡을 했다. 기혁을 잘 따랐던 지유의 눈도 퉁퉁 부어 있었다. 나도 울컥해지며 눈물이 솟았다. 지유가 기대 앉은 벽 쪽에는 그의 유품이 작은 상자에 담겨 있었다.
지유의 말에 의하면 먼저 발견된 사장의 장례는 이미 끝났는데 그의 동생이라며 내가 오기 전 조문하고 갔다고 했다. 그가 건네고 간 조의금 오십 만원이 권기혁이 받은 조의금 전부가 된 셈이다.
사체 인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엄마는 고모에게서 들은 얘기를 꺼냈다.
“기혁이… 그날 먼저 발견된 사장이라는 사람. 둘이…”
“사장?”
“응. 원래는 그 사람이 회사 사장인데, 직원이 없어서 그냥 둘이서 일 다녔단다. 하청도 아니고, 하청의 하청이라… 기혁이 엄청 의지하고 그랬다더라.”
엄마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양반이나 기혁이나… 별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었어. 둘 다 가진 것도 없고, 가족도 등 돌린 사람들이니까. 사장이란 사람이 기혁이 성실해서 둘이 제대로 재기해보자고 덤볐다는데.”
기혁이 남긴 유품엔 핸드폰과 물에 젖어 형태가 망가진 지갑, 비닐에 쌓인 작업화 한 짝이 전부였다. 핸드폰만큼은 지퍼백에 넣어 있어 상태가 괜챦았다고 한다.
경찰의 추정으로는 그가 살려고 발버둥치며 신발이 벗겨진 것 같다고 했다. 가슴장화를 신지 않았고 안전화도 낡은 것이라 그 기능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거라 했다. 핸드폰에 저장된 전화번호가 많지 않았다. 사장의 이름은 형님으로만 되어있었고 마지막 메시지는 그로부터 온 것이었다.
기혁의 휴대폰에 저장된 ‘형님’이라는 연락처, 그 문자 창엔 마지막 메시지가 그들이 사장과 직원이 아니라 가까운 형제같이 느껴질만 했다.
“기혁아 사무실 들러 장화 챙겨갈게 시간 맞춰 와라, 일 끝나고 고기 살게”
사장이 가슴장화도 챙기지 않고 일을 강행한 것 같다고 지유가 경찰처럼 말했다.
“산재 신청하셔야죠. 질식사라면서요.”
장례식장 직원이 말했다. 하지만 고모와 엄마는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경찰의 말엔 그 둘이 안전장치를 제대로 점검하지도 않은 채 들어간 것이 가장 큰 사고 원인이라고 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기혁이가 일하던 그 현장에는, 사실 맨홀 작업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산소농도 측정이나 환기, 감시인 배치 같은 안전절차가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름도 없는 업체의 재하청 구조 아래 선 서류상의 안전관리와 현장의 실제 상황이 달랐고,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도 끊임없이 엇갈렸다. 이럴 경우 사고가 나면 원청과 발주처, 관리감독기관은 차례차례 서로 책임을 미루게되고, 결국 그날 맨홀 아래에 있었던 이들만이 모든 책임과 슬픔을 온전히 짊어지게 되는거라고 고모부는 설명했다.
“됐어요. 그런 거, 우리랑 상관없어요.”
“네,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옆에 섰던 지유가 고모 손을 잡으며 감사의 고개짓을 했다.
병원 측에서 연락처가 없어 며칠간 무연고자로 처리될 뻔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엄마를 붙잡았다.
“얘가 왜 그랬을까… 왜 우리 전화번호도 저장을 안 했을까?” 막내고모가 통곡하기 시작했다. 지유도 고모를 붙잡았다.
“그 사람이… 기혁이를 사람 취급해줬던 유일한 사람이었을지도 몰라요.” 지유가 맥없이 혼잣말을 했다.
기혁의 휴대폰을 열어보니 배터리가 겨우 6퍼센트 남아있었다.
핸드폰의 갤러리엔 세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의 모습만 여러장 있었다.
또렷한 눈매와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어딘가 기혁을 닮아도 보였다.
그 아래 짧게 쓰여 있었다.
‘너는 내 새끼’ 나는 속으로 글을 읽었다.
사진 위에 글을 써 넣는 방법을 배운 모양인지 사진마다 다양한 글씨체로 아들이라 써 넣은 것이 보였다.
엄마는 사진과 기혁의 사진을 번갈아 보다 다시 눈물을 터트렸다. 식구들 모두 아이의 사진을 돌려보며 눈을 훔쳤다.
“아이구! 불쌍해라. 기혁아... 어이구, 기혁아.”고모와 엄마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했다.
기혁이 일했던 곳은 이름도 없는 재하청 업체였다.
사장도, 직원도 없는 따로 없는 일터에서 그가 '형님'이라 불렀던 사장과 그 자신, 둘이 전부였다.
유독가스가 가득 찼던 맨홀 아래에서, 낡은 신발 하나로 버티던 두 사람의 삶은 그날 아침 뉴스 속 한 문장으로 끝났다.
나는 기혁을 거의 모른 채 살아왔다.
그가 어떤 날들을 견디며 살아왔는지,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했는지도.
마지막까지 아무도 그의 죽음을 책임지지 않았다.
나는 사진 속 아이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그의 인생 전체가 책임지는 이 하나 없이 그렇게 흘러가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에게 한 번도 오빠라고 불러보지 못한 나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도로 아래 터널 속, 그 공포스러웠을 어둠속에서 살아보려 저항했을 그를 상상했다.
살아보려 마음먹은 그를 끝내 죽음으로 내몰고 만 산재, 살기위해 일하다 죽는 일.
만약 이런 변고가 아니었다면,
아이가 자라고, 아이 손을 붙들고 명절을 핑계 삼아 얼굴을 마주할 일이 있었다면,
우리의 인생은 조금 달라졌을까. 나는 문득 그런 상상을 했다.
매일 뉴스에 차고 넘치는 사건 사고들 속에서,
그의 죽음을 되짚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어떤 사람이었는 지 어떤 삶을 살아왔었는지, 나는 끝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제천이라는 지명이 뉴스에 나왔을 때도 내겐 어떤 표식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맨홀은, 전국 어디에나 있는 것이었으니까.
신발그림 - 반고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