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knows tomorrow? (단편소설)
여름이면 엄마의 입은 거칠어졌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듣기 싫은 불만을 혼자 내뱉었다. 뒷덜미에 습도가 느껴지면 나는 의레, 엄마의 거친 말과 찌푸린 미간을 떠올리며 덩달아 신경이 곤두섰다. 엄마는 습도 높은 날씨를 아주 싫어했다. 장마철만 되면 모든 말을 한 번씩 뒤틀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완곡한 고집도 한 술 거들었다. 아버지가 웬만해선 에어컨을 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아예 틀지 않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집안에 들인 멀쩡한 에어컨을 왜 사용도 못 하냐고 나와 엄마가 힘껏 대들었지만, 속 시원한 아버지의 대답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말 그대로 묵묵부답이었다. 전기세를 두려워해서가 아니었다. 찬 바람이 싫어서도 아니었다. 우리 집 에어컨은 빚을 갚아주고받은 대가이자 가족의 아픈 역사가 담긴 자화상에 지나지 않았다. 엄마도 모르지 않았다. 에어컨이 우리 가족에게 빚의 보증서이자 애증의 역사라는 것을.
“일단 들였으면, 사용이라도 해야지” 때때로 엄마는 미간을 찌푸리며 걸레를 비틀었다. 엄마의 항변 끝에는 늘 삼촌이 언급되며 한 단락을 맺었다. 푸념이 시작되면 말은 살아 움직이며 커지고 난폭해졌다.
“제발, 에어컨 좀 틉시다. 삼촌 일은 삼촌 일이고.”
나는 조용히 내 방문을 닫았다.
양산의 삼촌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팔아먹은 할아버지의 논과 밭으로 이어지고 삼촌의 무능과 아버지의 보증에서 정점을 찍었다. 선풍기를 끌어안고 잠을 청하는 여름이면 나는 빨리 독립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버지 세 형제들의 삶의 모습은 나를 일찍 철나게 했다. 그 덕에 악착같이 공부를 해냈고 지금의 경제적 성과가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친구들에 비해 일찌감치 독립과 그에 필요한 경제에 눈을 떴다. 아버지의 근검절약하는 씀씀이를 보고 자라 일찍부터 용돈을 모아 불렸다. 막내 삼촌을 위해 신용보증까지 섰던 아버지의 경제적 무지와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해 대리점을 연거푸 접어야 했던 막내 삼촌의 인생은 어떤 강의나 책 보다 내게 효과적인 인생수업이 된 셈이다. 독립이라는 목표 아래 엉덩이에 땀띠가 나고 짓물러도 참고 악착같이 공부한 덕에 대입은 수월했고 졸업과 동시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회계사 자격증을 보여드린 날 엄마가 한 대꾸는 평생 잊힐 것 같지 않았다.
“아이구! 우리 찬희 덕에 엄마도 에어컨 좀 틀고 살 수 있겠네.” 회계사 자격에 에어컨이 등장하리란 상상을 하지 못했기에 그 말을 듣던 날의 분위기와 조도의 기억이 생생하다.
내 자격증서를 가슴에 안던 엄마 뒤에서 아버지가 무심한 척했으나 눈은 웃고 있었다.
그날 이후 엄마는 시간 나는 대로 이모와 고모네는 물론이고 오랜만에 안부를 물을 만한 이웃이나 친구들에게 차례차례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지내세요?’로 시작하는 안부 인사에 이어 자식 자랑이 자연스럽게 등장하도록 만드는 계산된 수다를 지켜보며 내 입맛에 맞춘 밥상을 즐겼다.
상대가 물어오는 근황에 심드렁한 말투로 ‘이제 국가공인자격도 땄으니까, 그렇죠 뭐. 큰 걱정은 줄었죠, 라거나 ’ 그렇게 지독하게 하긴 했어요. 독립한다고 노랠 하더니 단번에 붙긴 하더라고요.‘라는 식이었다. 마치 제삼자가 되는 양, 남 일인 척 꾸며대는 말을 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리며 부끄러워했다. 전화통화를 마친 엄마의 귀와 뺨은 발갛게 달궈져 있고 모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런 엄마를 기억하면 나는 아직도 피식 웃게 된다.
사실 에어컨을 맘 놓고 켜지 않았지만 우리 집의 경제적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두 분 모두 검소했고 아버지의 공무원 생활은 안정적이었으며 맏아들이라 먼저 물려받은 논이 제법 종잣돈 구실을 했다. 방 두 개를 가진 작은 주택은 동생들의 서울 거점 정거장이 되었고 집은 여관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대입을 코앞에 둔 해였다. 나와는 열다섯 살 차이 나는 막내 삼촌의 결혼을 마지막으로 형님네 서울집의 역사가 끝이 났다. 친척들의 모임은 현저히 줄었다. 명절에만 우리 집이나 고향, 양산에 사는 막내 삼촌의 집에서 친가의 가족들을 만났다. 그나마도 다 같이 만나는 일은 드물어졌다.
에어컨이 들어오던 그 겨울이 잊히지 않는다. 에어컨이 들어오던 날은 설을 막 끝낸 2월, 학교는 고1 신학기를 앞두고 이 주간 짧은 봄 방학 중이었다. 교복을 맞추고 엄마와 함께 분식점에 들렀다 들어온 오후, 거실에 세워진 새 전자제품 앞에 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벌써 정리된 거야?” 엄마가 놀라는 목소리로 말하며 눈으로는 아버지를 찾았다. 베란다에서 서서 박스에서 나온 스티로폼과 비닐을 정리하던 아버지가 내다보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베란다에서 우리를 내다본 아버지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니 엄마의 말은 질문이 아니라 답이 필요 없는 탄성이었음을 알았다.
올해부턴 에어컨이 있어 여름 오는 게 무섭지 않다고 친구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친구와 전화통화로 시험 범위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엄마의 모진 목소리가 내방까지 건너왔다. 나는 얼른 통화를 마무리했다.
“아니, 말을 똑 부러지게 하면 어디 덧나냐구? 정리한다는 말이 뭐가 잘못된 거라구 눈을 흘기우?” 엄마의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귀를 막았다.
남들처럼 가지고 싶던 전자제품을 들여놓은 그날, 저녁 분위기는 적막했다. 있었던 반찬을 내놓고 밥을 퍼 놓았지만 아버지는 방에서 나오시지 않았다. 말 없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밥을 먹던 중 방에서 아버지가 나오셨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으려 물컵을 쥐던 아버지의 손을 흘끔 곁눈질했을 뿐 얼굴을 올려다보지 않고 밥을 먹었다. 방으로 들어가는 아버지를 따라 들어간 엄마를 보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신경이 모두 안방에 가 있었지만 의외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엄마가 나왔을 때 나는 싱크대를 깨끗이 정리하고 고무장갑을 탈탈 털어 물기를 뺐다. 엄마는 소파 위에 몸을 뉘며 아무 말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기 위해 아침밥을 찾았을 때 엄마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봄이 오기 전에 겨울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전원도 넣지 않았는데 에어컨은 집안 공기를 차갑고 서늘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도 엄마와 아버지의 냉랭한 기운이 온 집안을 휘감았다. 아버지가 집을 비우신 날 전원을 넣어보긴 했지만 내게도 에어컨이 없던 시절의 집안 분위기가 아쉬웠다.
엄마와 아버지의 갈등의 원천이었던 에어컨은 그 시절의 고모들과 삼촌들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시절 거실에 있는 에어컨은 너무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이 된 채 오래도록 서 있었다. 변색과 함께 고모 삼촌들은 늙어갔다.
“아니, 고모. 그걸 누가 몰라요, 근데 제 말은, 아니 형님, 찬희 아빠가. 그러니까 제가, 아니 뭐, 더 희생만 하라는 법은 없잖아요.”
“아니, 그래도 오히려. 저는, 아 네.”
“근데 이 양반 이제 젤 나이 많고 힘들 때. 네네, 그러니까. 아니 글쎄.” 우리 집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가진 엄마도 고모들과의 전화에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비슷한 접속사만을 꺼내다 말기를 반복하곤 했다. 나는 그들이 놓인 처지를 일찌감치 알아챌 수 있었다. 고모들과의 대화에서 구체적인 윤곽을 그려낸 나는 도서관을 핑계로 집으로 나왔다.
고모들과의 전화통화로 ’벌써 정리한 거야?”가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고향인 양산에서 전자제품 대리점을 열었던 막내 삼촌은 가게 월세도 내지 못하고 빚은 불어나 가게의 제품을 다 팔아도 빚이 청산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1980년대 말 기대와 불안이 혼재하던 그 시절 양산이라는 지방의 소도시 전자대리점은 대형할인 매장의 등장으로 십 년 만에 사라져 버렸다. 아버지 형제 중 누구도 시대의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삼촌이 번듯한 가게를 갖게 되어 정말 좋아했다고 한다. 직업이 마땅치 않아 마을에서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막내의 낯을 세울 거라고 장담했었다. 좋아했고 응원했다. 그제야 자신의 소임을 다한 것으로 생각했다. 대리점 앞에 삼촌 둘을 양옆에 세우고 사진을 찍을 때 아버지의 눈이 감격에 겨워 그렁그렁했다고 고모는 말했었다. 그렇게 기대에 가득 차 엄마와 의논이 없이 자신의 신용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았던 것이다. 엄마의 원망과는 다르게 큰삼촌만은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한 막내 삼촌 탓이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형제들은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았는데 막내 삼촌만큼은 대리점 이전에도 딱히 직업이 시원치 않아 항상 아버지의 걱정을 샀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모든 중대사를 결정할 때 아버지는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왔다. 서울의 모 대학에서 교수직으로 있는 큰삼촌은 양산지역에서 손꼽힐 만큼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땅으로 박사까지 공부하며 교수가 되었다. 큰삼촌과 작은 삼촌의 간격은 어쩔 수 없이 컸다. 자신들의 학력배경은 그들의 아내에서 더 큰 차이를 보였다. 친정의 도움으로 자가로 시작한 큰삼촌에 비해 양산의 허름한 양철 지붕 집은 성묫길에 잠깐 들러 서 있다가 나오는 장소에 불과했다. 큰 외숙모가 작은 외숙모를 바라보는 눈길엔 오묘한 미소가 보이곤 했다.
밥상을 무르고 과일이나 차를 내오는 일은 나와 큰삼촌의 하나밖에 없는 딸 지연이었으며 고모들의 딸들도 그 뒤를 나란히 따랐다. 어른들은 밥상에 둘러앉아 우리를 훑으며 성적이나 전공 등을 들먹여 우리를 곤혹스럽게 했다. 나는 이때 어른들의 눈길을 피하고 싶어 공부에 매진했다. 공부를 핑계로 다 면제되는 세상을 일찌감치 알아챘고 그 덕은 톡톡히 본 셈이다. 지연과 나는 공부를 특권으로 후식을 대령하는 일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해결해야 할 처지나 환경을 미루고 자식들의 성적을 비교하며 표정을 감췄다.
그런 중에도 큰삼촌과 고모들의 언성 높은 대화를 들으면 막내 삼촌의 처지를 감 잡을 수 있었다.
“누가 지 공부를 막았어? 어흐.”큰삼촌은 제 동생에 대해 야박하게 말했다.
막내 삼촌의 정신태도를 문제 삼는 큰삼촌과는 달리 고모들은 한결같이 막내 삼촌을 두둔했다. 종잣돈을 불씨에 비유하며 돈이 작아서 무엇을 제대로 하겠느냐 역성을 들었다. 불씨를 키우기 위해서 아버지와 큰삼촌의 양보와 희생이 필요한 것처럼 이야기를 몰아갔는데 정작 자신들이 무엇을 할지는 빠져 있었다. 큰삼촌은 냉정하게 말해 막내 삼촌이 직업을 제대로 갖지 못한 것을 자신의 치열하지 못한 학업중단이 이유라고 말했다. 큰삼촌과 다르게 막내 삼촌은 학업에 전혀 취미가 없었다고 한다.
“얘, 걔 그때 나이 지금 지연이랑 비슷하지? 걔보고 물어봐라. 공부가 제대로 될지. 그 나이에 엄마를 잃는다는 거, 네 생각하고는 달라.”
지연이는 우리 집에 거의 오지 않는 큰삼촌의 딸이었는데 그녀는 사촌 중 탁월한 공부 실력으로 우리들의 부러움을 샀다. 나는 묘한 경쟁심을 느끼고 있었다. 지연은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냈고 큰삼촌의 지원을 받아 유학길에 올랐으며 박사과정까지 밟을 거라며 가족들의 관심과 부러움을 받았다. 박사학위 도전을 앞두고 큰삼촌 내외가 미국으로 가 여행까지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는 내심 질투심이 일었다.
벌써 수차례 지연이를 만나기 위해 미국행을 했었던 큰삼촌 내외가 떠나기 전 아버지 생일에 한 말은 모두를 입 다물게 했다.
“이젠 미국 가는 일도 이번으로 마지막일 거 같아요.” 삼촌이 짐짓 시큰둥하게 말을 시작하자 외숙모가 이어받았다.
“제 부모 생각해서 석사도 한 번에 패스를 했으니 다행이지, 여비가 너무 들어서 걱정했었어요.” 석사를 기간 연장도 없이 끝내는 게 진짜 쉽지 않다는 설명을 큰삼촌이 설명하는 중에 외숙모가 나를 언급했다.
“찬희는 진짜 효녀예요. 국내서 공부 잘해도 얼마든지 길이 많은데 우리 지연이는 욕심이 많아서.”
나는 억지 미소를 띠며 엄마를 살폈다.
“찬희, 효녀죠. 이번에도 모의고사 전교 1등이요.” 엄마가 밥숟가락을 입 앞에 두고 말했다.
“어머! 찬희야 축하한다. 역시 실력이 짱짱하네. 진로는 이미 굳힌 거고?”
“네. 경영학 공부하려구요.” 나도 새침하게 대답했다.
“어머 형님, 찬희 생각이 멋지네요. 우리 지연이도 한국에서 공부 계속했으면 서로 정보 나누며 좋았을 텐데.” 고모들은 나와 지연이가 공부를 잘하는 것은 역시 집안의 피가 흘러서라며 큰 외숙모의 이야기를 가로막았다. 자신들의 아이들이 성적이 좋지 않은 이유가 고모부 쪽 머리들을 닮아서라는 말을 했을 때 고무부들은 말없이 아버지의 잔에 술을 따랐다. 아버지와 고모부 두 분은 늘 집안 여자들의 말에 딴청을 했다. 고모부들은 모두 양산 출신이었다. 막내 삼촌과는 조기축구회 회원으로 어울리는 작은 고모부는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며 술상을 떠나지 않았다.
큰삼촌의 사회적 지위와 외숙모의 수입이 부러운 적이 있었다. 나도 해외로 나가 공부를 하고 싶다고 조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나는 내가 선택한 진로에 만족했고 지연이 한국에 돌아와 대학의 강사 자리를 찾아 헤맬 때 나는 상대적으로 우월한 마음이 들었다. 그즈음에 이르러 엄마의 자랑과 허세는 내가 눈치껏 눌러줘야 할 만큼 기고만장해 있었다.
지리학과 교수인 큰삼촌은 친가뿐 아니라 집안을 들먹일 때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우리 시동생이 그 대학 교수로 있거든.”
주변의 자식들의 진로 얘기에 엄마는 뜬금없는 삼촌이야기를 덧붙일 때가 많았다.
“시동생이 대학교수인데 한 번 알아봐 줄까?”라거나
“정선아, 너도 공부 잘하면 교수되겠네.”
“얘 큰삼촌이 대학교수인데,”
뜬금없는 엄마의 삼촌 자랑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엄마의 자랑도 이해는 했다. 삼촌의 냉정한 태도나 점잖은 말투가 내게도 멋있어 보였다. 두 삼촌의 기질이나 성향이 매우 다른 것을 두고 나는 배다른 형제가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다.
명절 외에도 막내삼촌의 경제적 문제 때문에 친가 식구들은 가끔 모여 얼굴을 붉히거나 목소리를 높였다.
‘엄마, 시끄러워서 공부를 못하겠어.’라는 말을 입 모양으로 말하며 방문을 닫아버렸다. 지연이는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데 우리 집은 왜 맨날 이렇게 시끄러워야 하는지, 친가 식구들이 밉기만 했다. 내 일그러진 표정을 본 고모들은 입 맞추어 합창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놈 만나야겠다. 재는.” 킬킬거리며 웃는 고모들에게 미운 마음이 일었다.
엄마는 그들 주변을 맴돌며 모든 일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가 모두가 돌아간 다음 아버지를 붙들었다.
“나도 당신 보증으로 고생이 얼마였는데. 내 몫도 있다는 거 알죠? 아까 보니까 작은 고모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지.”
친할아버지가 남겨놓은 땅 처분에 모두가 예민했다. 그날 당사자인 막내 삼촌은 어린 사촌과 똑같이 축구유니폼을 입고 들어섰는데 아이를 반기는 고모들과 달리 큰삼촌 내외의 굳어진 얼굴을 보았다. 아기는 집안의 유일한 사내애였다. 고모들에겐 모두 딸 한, 두 명씩, 큰삼촌에겐 나보다 한 살 어린 지연이 있었다.
고모들은 한결같이 왕자님이라 칭하며 아기를 안았다. 큰 외숙모의 눈길을 살피던 엄마가 거들었던 말도 기억난다.
“삼촌, 딸이 있어야 노후에 비행기 타는 거야. 딸 하나 더 낳아야지.” 그 말을 듣던 작은 외숙모는 콧등을 찡긋하며 나와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었다. 뻔한 소리에도 큰 소리로 웃는 그들의 소란함이 싫어지고 있었다.
엄마가 유지한 맏며느리 노릇은 막내 외숙모에게 전해주는 소소한 식료품이나 아들 정우의 옷가지였다. 엄마는 내 옷을 정리하는 날이면 제법 돈을 준 옷 중에 체구가 작은 외숙모에게도 맞을만한 옷을 추렸다.
“그래도 가격이 조금 나가던 옷이라 한두 해는 잘 입힐 거야.”
유일한 사내아이 정우의 옷도 이웃에서 얻어 보내기도 했다.
“그 집이 좀 살거든. 아기 옷에 무슨 몇십만 원이나 하는지!”라는 말을 덧붙여 은근히 옷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다.
그렇게 옷을 정리해서 챙겨주는 정도로 끈끈한 친척들의 관계는 정작 우리 집에서는 불화의 씨앗이 되었다. 옷을 챙기는 중에 등장하기 쉬운 삼촌의 무직 상태 때문이었다.
“그만해라.”
결국,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러 엄마의 입을 닫게 했다.
그런 날 종일 입을 꾹 다물었던 엄마는 저녁상을 무르고, 퇴근한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로 나누던 이야기는 주말이면 거실에서 바로 다시 이어졌다.
가까이 사는 이모는 수시로 우리 집에 드나들었고 엄마와는 둘도 없는 자매였다.
이모가 작은 외숙모와 동창이라는 사실을 다 커서야 알았다. 엄마와 이모의 대화엔 작은 외숙모와 막내 삼촌의 동창들, 이웃들이 얽히고설킨 사건 사고가 모두 등장했다. 양산을 떠나온 지 오래된 우리 가족에게 전달되는 고향의 이야기는 이모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주말에 이모와 거실에 나란히 앉아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수다를 이어갈 때 나는 그들만의 공고한 결속력을 느꼈다.
시험과 면접을 모두 마친 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며칠이 매우 달콤하고 느긋했다. 이모와 엄마의 높낮이 적은,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에 졸음이 올 만한 오후였다.
“아니 그렇다고 팔자 달라지는 거 아닌데, 걔 아무래도 실수하는 거야.” 엄마가 얼굴을 도리질하며 말했다.
“말린다고 말 들을 정도면 시작도 안 됐을걸. 나도 여러 차례 뭐라 했거든.” 이모가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지난번 동창회 때 눈치챈 애가 한둘이 아니더라구. 동네가 손바닥만 한데 뭐.”
“그럼, 그 가게 닫고 화장품 가게 일하러 나갈 때 시작된 게 아니네.”
열린 문틈 사이로 작은 외숙모의 바람이 감지되자 청하던 졸음이 사라졌다. 거실로 나와 식탁에 있던 바나나를 집어 소파로 다가갔다. 앉을자리를 눈 저울질하는 나를 힐끔 본 이모는 반사적으로 엄마 옆으로 붙으며 내 자리를 내놓았다.
“찬희야, 우리도 먹게 아주 다 가져와.”
내 손에 든 바나나를 본 엄마가 아무 감정 없이 말했다. 그 순간 엄마는 막내 삼촌네 사정을 딱히 여기고 옷을 챙기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 둘은 바나나를 들어 껍질을 벗기려다 한 마디, 다시 한쪽을 벗기다가 한 마디를 보태며 맞장구에 온 신경을 쏟았다. 두 사람의 흥미로운 얼굴에는 작은 외숙모가 집안사람이며 동창이라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며칠 후 이모의 집 전화를 받은 엄마가 내 눈치를 보며 핸드폰으로 다시 전화를 하라고 일렀다.
“어머 어머, 돈 벌이는 핑계였네.” 엄마는 거실에서 티비를 보던 나를 힐끔 쳐다보고 방문을 닫았다. 한 시간이 걸린 전화통화는 아버지의 귀가 덕에 끝이 났다.
엄마와 이모 둘은 말로는 작은 외숙모를 걱정했지만 표정은 흥미로워 보였다.
엄마와 이모가 덧붙이는 수많은 접속사에는 자신과 타인을 저울질하는 계산이 실려있었다.
막내 삼촌이 전자제품 대리점을 정리하며 가족들의 도움으로 에어컨, 세탁기, 컴퓨터 등이 분산되었다. 이후 스포츠용품점을 새로 열었지만 젊은이들이 사라진 지방의 현실과 브랜드 경쟁에 밀려 1년도 채 가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가족들은 희망을 품었지만, 대형마트와 이커머스 시대를 예견하지 못한 선택은 실패로 이어졌다. 외숙모의 일탈도 이 시기와 맞물려 있었고, 결국 가족 모두가 좌절을 겪었다. 경영학을 공부한 뒤, 나는 그 실패의 구조를 뒤늦게 깨달았다.
작은 지방의 소도시에 일자리는 많지 않았고 그가 배운 기술은 미천했다. 가장 치명적이었던 사실은 시기를 놓친 잘못된 선택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모든 게 가능하다고 믿었던 80대가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삼촌에 대한 아버지의 근심은 날로 더해 갔지만, 근심의 크기만큼 우리 친척들의 생활은 더 벌어지고 멀어졌다. 아버지의 쇠약과 노후준비도 만만치 않은 도전을 받는 터라 살필 겨를이 없어 보였다. 명절이면 만나 하루, 종일 먹고 마시는 일은 막내 삼촌의 대리점들 기세처럼 사라지며 희미한 추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나는 대학 졸업과 함께 취업 그리고 독립 준비로 바빴고 지연은 서울로 들어왔으나 대학의 시간강사 자리와 보수에 만족하지 않아 대치동의 학원가로 옮겨가 큰 외숙모의 고개를 숙이게 했다.
일이 벌어진 뒤에 원인 결과를 해석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를 예측하는 일이란 매일을 숨 가쁘게 사는 보통의 사람에겐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막내 삼촌의 개인적인 무지를 비판한 큰삼촌 앞에 그의 자랑이었던 지연의 예상 밖의 인생은 큰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미국에서의 학위취득으로 선망의 대상이었던 지연이 학원 강사가 되자 큰삼촌 내외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들의 고향인 양산에서는 '대치동'의 이름값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
2000년대 중반, 고모부의 칠순 잔치에서 지연을 십여 년 만에 만났다. 미국에서 석사를 따는 동안 서울에 들어온 적이 있지만 본 적은 없었다. 외숙모가 내민 사진으로만 보았던 지연이 한국에 들어온 지 이년 째 되는 해였다. 귀국 후 처음 친척들에게 인사를 한 지연이 예상과 다르게 많이 말라 있었다. 여유로워 보였던 지연의 뽀얀 피부와 당당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큰삼촌과 외숙모는 지연을 자신들의 사이에 앉히고 식사를 시작했다.
“아니, 그 뭐라더라? 일타강사? 그거 되는 거야?
외숙모와의 이혼까지 겪은 막내 삼촌이 술에 취해 벌건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큰삼촌은 얼굴을 구겼고 외숙모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 사이에 앉은 지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콜라를 따고 있었다. 나는 지연이 안쓰러워 처음으로 막내 삼촌에게 인상을 썼다. 큰 고모부가 고모의 싸인을 받아 술잔을 돌리는 바람에 분위기는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어른들의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 화장실에서 지연을 마주쳤다.
“언니, 많이 좋아 보이네. 들었어. 회계사라며.” 지연이 술이라도 마신 듯 눈빛이 몽롱한 채 나의 어깨 뒤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 그래. 어때? 오랜만에 한국 생활. 이제 좀, 자리 잡은 건가?”
더 나은 질문이 뭐였을까, 잠시 내말에 스스로 당황하는 마음이 일었다.
한 숨 돌린 지연이 빙그레 웃으며 나를 쳐다 보다 말했다.
“자리? 자리랄게 뭐, 그렇지 뭐.”
“학원? 꽤 유명한 학원이라며?”
“응. 대치동 학원가라고 하지.” 지연이 신발로 바닥을 긁으며 제 말에 히죽거렸다.
어색한 마음에 나도 발등을 내려다보았다.
“너 미국 있을 때, 미국 한번 가봤으면 하고 노래를 불렀었는데.”미국에 가고 싶었던 날들을 회상하고 고개를 들었다.
“언니, 미국이야 언제든 가면 되지.”
나도 괜한 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 잘해서 좋겠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외국의 학위에 영어는 덤으로 생기니 얼마나 좋으냐고 엄마에게 대들었던 기억이 났다.
“대학 쪽은 더 알아보는 중이야?”
“쉽지 않더라구. 이제, 그쪽은 접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박사도 널린 세상인데”
“그래도 네임벨류가 있잖아.” 지연이 마른 얼굴에 주름을 만들며 웃었다. 나도 덩달아 웃음을 띠었다.
어떻게 말을 매듭지어야 할지 잠시 머뭇거렸다. 지연이도 다시 안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듯 보였다. 그때 외숙모가 식당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뒤따라 나오는 큰삼촌의 손에 지연이의 외투가 들려 있었다.
작은 삼촌의 말에 큰삼촌은 마음이 상했고 그 일 이후 명절에 발길을 끊었다. 하지만 그런 변화는 시기적으로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그즈음 각 집의 아이들은 취업과 독립을 목표로 집을 나섰고 부모들은 그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을 쏟았다. 명절은 이전의 색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큰삼촌 내외는 수시로 해외여행을 갔고 고모네는 늘어난 식구들과 시간을 보내며 소란하던 시간들을 과거로 보냈다.
요즘 서울의 한낮 온도는 37도에 이르렀다.
“세상이 미치려고 이러나 보다.” 엄마와 아버지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도리질을 했다. 이제는 더 이상 에어컨을 틀고 말고는 이견이 없다. 남편과 아이가 밤새 틀어놓고 자야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 아이가 공부가 힘들다고 밥투정을 하면 오래전 변색된 채 수년간 거실에 서 있던 에어컨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엄마는 이 더운 여름에도 에어컨도 없이 공부했어." 반복되는 할머니의 말에 아이는 내게 싫은 눈빛을 보내며 식탁에서 일어섰다.
얼마 전, 중학교 1학년이 될 아이와 함께 대치동 학원을 알아보던 중 문득 지연이 떠올랐다. 학원을 핑계 삼아 안부 전화를 걸어볼까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그만두었다.
며칠 전, 지금은 대학 부설 연구소에 자리를 알아보는 중이라는 소식을 큰고모에게서 들은 참이었다.
지연은 한국에 돌아온 뒤 학원 강사로 1년쯤 일하다가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결국 박사학위에 도전하며 집안의 화제가 되었다.
선망의 대상인 학위였지만, 이상하게도 부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 노고를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학위를 위해 내어준 지연의 30대는 그렇게 조용히 흘러가 버렸다.
오늘 아침, 고모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지연이 바라던 대학 부설 연구소에 정규직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이었다. 엄마는 긴 전화를 끊고 그 내용을 내게 전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걘 맨날 공부만 하다가 시집은 언제 간다니?”
잠시 후, 엄마는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지연이 박사가 된 것과 대학 부설 연구소에 취업했다는 말을 전할 것이다. 이모와 엄마는 이야기를 나누며 결국엔 자신들의 삶에서 만족할 만한 단면을 꼭 찾아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연이뿐 아니라 수많은 주변 사람들을 하나둘 불러낼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친척을 넘어 이웃과 친구들까지 모두 한 번씩은 등장했으니까.
내가 아는 영주 아줌마, 기름 짜는 일로 건물을 샀다는 이모네 시댁 사람까지.
그들의 등장은 엄마와 이모에게 안도의 마음을 가져다줄 것이다.
에어컨을 틀지 못하게 했던 아버지는 그래도 연금을 남겨 주셨으니 다행이고,
입이 짧은 손주는 과일이라도 잘 먹으니 다행이고, 제 엄마를 닮아 공부 머리가 있으니 다행이고,
사위가 돈을 아끼지 않아 걱정이지만 벌이가 좋으니 그것도 다행일 것이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이유를 찾아 안도의 한숨을 쉬며 오늘을 보내고, 또 내일을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