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같은 내 방
나이 들면서 가장 좋은 건 시간이 아깝다는 깨달음과 그 깨달음으로 인한 이른 기상이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시간이라는 것이 유한하다는 것, 이런 날이 올 줄 까맣게 몰랐을 정도로 아침잠이 많았던 내가 알람도 필요 없이, 몸이 제 알아서 깨어나는 나이가 되었다. 뒤척거리며 꿈인 듯 어딘가를 헤매다가 깨어나 밤새 굳은 몸을 쫙 펴고 겨우 일으키는 나의 첫 시동은 이불킥이다. 밤새 쌓였을 내 몸의 폐수처리를 하고 간단한 세수와 양치를 한 후 아무리 조심히 걷는다 해도 드르륵 거창한 소리를 내는 블라인드를 끝까지 올리고 창문을 살짝 열어놓는다. 진동음이 울리듯 바깥의 소리가 내 귀에 확 퍼질 때, 나는 그 소리가 가장 좋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이고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좋다. 아직 멀쩡하구나. 싶은... 어제인 것 같은 오늘이지만 어쨌든 새로운 날이다. 나의 첫 일과는 밥 짓는 일로 시작한다.
방문을 열면 90세 연로하신 시아버님이 TV를 멍하니 응시한 채 앉아계시고 내가 나왔는지조차 모르시는 듯한 아버님께 "안녕히 주무셨어요."라는 인사말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한다.
어둑한 부엌의 등을 밝히고 쌓여있던 그릇들을 정리한다. 큰 그릇에 쌀을 담아 바라락 씻어 앉힌다. 밥통에 밥을 맡기고 어제 생각해 놓았던 국과 반찬 몇 가지를 수선스럽게 요리한다.
깨끗이 씻어놓은 콩나물을 냄비에 담고 콩나물의 구수한 냄새가 풍길 때까지 팔팔 끓인다. 끓는 동안 가지를 묻히고 무생채를 만든다. 뻣뻣했던 무가 소금에 절여져 낭창낭창해지면 준비해 놓은 양념을 넣고 바락바락 무친다. 불그스름하게 윤기 나는 무생채를 식탁에 올려놓고 자줏빛 피부의 달짝지근한 가지무침과 나란히 놓는다. 정갈하게 올려진 반찬과 모락모락 김이 나는 국과 밥을 한소끔 담아 아버님의 아침을 차린다. 아직까지 혼자 드실 수 있는 기운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언제 거동이 불편해질지 몰라 불안한 마음으로 "진지 드세요" 크게 외친다. 귀가 어두운 아버님은 몇 초간의 간격을 두고 앉고서는 일조차 힘든 몸을 겨우 일으키신다. 고요했던 거실에 아침의 여명이 은은하게 밝혀줌과 동시에 달그락 숟가락 소리와 함께 금세 활기가 차오른다.
며느리의 숙명이라고 받아들이기엔 나의 소갈머리는 그리 넓지 않다. 시부모를 모시는 며느리의 마음은 태평양처럼 넓어야 온전히 진심으로 모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에 몇 번씩 마음을 고쳐먹는다. 나만 이렇게 변덕스러울까? 나에게 물어보고 나만 그런 게 아닐 거라고 스스로 대답한다.
부모에 대한 애틋한 정보다 책임감이 앞설 때 부담감은 크게 오기 마련이다. 열 자식 한 부모 모시기 힘들다는 옛말이 있듯이 늙어가는 부모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가뜩이나 웃는 상도 아닌 근심 가득한 주름진 얼굴의 아버님을 보노라면 기운이 쑥 빠진다. 인간의 노화를 막으려고 온갖 약을 먹지만 노화는 자연의 법칙이니 거스를 수 없다.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는 게 당연한데 자꾸 서운함이 드는 이유는 뭘까? 아무리 부모 형제지간이라도 앙금을 제때 풀어야 없던 정도 싹트는 법이거늘 유교사상이 단단하게 뿌리 박혀 있어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다. 그 서운함을 글로 다 풀기에는 오래전 과거까지 들먹여야 하니 골치 아프다.
아침을 끝내고 부랴부랴 제 자리를 정확하게 찾아 안착하는 기계처럼 휘휘 들어오는 내 방.
방으로 들어와 바깥의 내음과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가진다. 네 시간 후면 점심을 준비해야 한다는 규칙이 이미 머릿속에 새겨져 있으니 그 시간까지 충실하게 나의 시간을 즐겨야 한다. 그래서 이 시간이 더 애절하고 감사하다.
아버님이 우리 집에 오신 후 안방이 내 방이 되었다. 하루 종일 TV를 보다가 졸다가 때 되면 식사를 하고 거실 끝에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화분들을 관리하시는 게 일상인 아버님은 거의 거실에서 생활하신다. 대화거리가 없는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같은 공간에서 대면하는 게 꽤나 불편하다. 게다가 부자지간의 관계가 썩 좋은 것도 아니다. 여느 부자지간처럼 살갑게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기에는 가슴 한구석 서운함이 자리 잡고 있다. 서로 누가 모시느냐 마느냐의 단계를 넘어 이제는 서로 안 보고 사는 게 차라리 속 편한 형제지간이 된 탓에 둘째 아들인 남편이 가까이 산다는 이유로, 혼자 사발면만 드시는 아버님을 차마 볼 수 없어 모시게 되었다. 아버님도 늘 자신은 혼자 살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셨지만 결국은 자신의 손발이 될 자식이 필요했다.
하여간 나는 그 덕에 내방이 생겼다. 내방은 제일 큰 방이지만 장사하고 남은 재고 박스가 한가운데 전시물처럼 가득 쌓여 있다. 처음 그 박스 냄새에 숨이 막혀 코를 틀어쥐고 향수를 뿌리고 난리였는데 이제는 많이 적응이 되었다. 이렇게 커피 한 잔을 그윽하게 마실 수 있고 책도 읽을 수 있고 음악도 들을 수 있는 내 방이 생긴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조용히 끄적끄적 글도 쓰고 식단도 짜며 촘촘하게 계획을 세우다가도 듬성듬성 졸기도 하면서 온전히 사계절을 느낄 수 있는 창가 옆에 책상이 있는, 다락방 같은 내 방에서 번잡스러웠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이제 잠깐만 책을 들여다봐도 눈이 아프고 어깨가 결려와 현실적인 내 몸까지 잘 달래며 살아야 한다. 정지아 작가의 글을 빌자면 「생명의 업을 기꺼이 감당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즉 살아야 하니까 열심히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시간이 흘러가니 살아지는 사람이 있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어서 한생을 힘들게 살아내는 사람도 있다」라는 문장이 있다. 언제나 파이팅 넘치는 사람이 부럽긴 하지만 내 유전자에는 없는 것이니 어쩔 도리가 없고 그저 열심히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며 사는 것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살아야 하니 살기도 하고 죽을 수 없으니 살기도 한다. 수동적인 삶의 태도이지만 아무리 바꾸려고 안간힘을 써도 결국엔 제자리이다. 그렇다고 슬프지는 않다. 슬픔을 느끼기엔 세월이 많이 흘렀다.
누구나 늙는다는 진리는 나중에야 깨우친다. 펄떡거리는 청춘일 때는 그 시간이 전부인 것처럼 느끼지만 모든 인간은 늙는다는 것, 끝이 있다는 진리가 있기에 우리는 죽을 때까지 깨달으며 살아간다. 앞으로 또 어떤 깨달음을 주실까? 늘 궁금한 우리의 삶. 죽음도 내 맘대로 안 되는 인생이니 어떤 삶이 최선의 삶인지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운명에 맡기기에는 내가 너무 나약해 보이고 헤쳐나가자니 지칠 때가 많다. 그저 버티기만 하면 되는 걸까? 그 끝에는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늘 고민한다. 내가 바라는 나의 중심.. 그 중심에 서려고 끊임없이 생각한다.
닫힌 공간이면서 열려있는 내 방의 나, 그리고 머릿속의 잡념들.. 뜯어내려 해도 거미줄처럼 다시 엉겨 붙지만 한 줌이라도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위해 허둥거리며 마음의 고삐를 조인다.
'마음아, 잘 부탁해.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이 소중한 시간을 나만의 시간으로 잘 소비하자. 그래야 나로 살 수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