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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자 Nov 27. 2024

기다리는 일

▶그때는 몰랐다

눈이 펑펑 온다. 내 시야를 하얗게 덮어버렸다. 문득 그리워졌다.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잘 계실까? 

목소리로 점쳐본다. 그리고 너를 기다린다. 가까이 있어도 먼 너를 난 자식이라고 부른다. 나에게 따뜻한 웃음 지으며 '엄마'라고 부를 날을 오늘도 기다린다.




어제는 비바람이 창문을 두드렸다. 후드득 소리가 정말 빗소리인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귀를 기울였다. 꽉 닫힌 희뿌연 창문을 때리는 소리는 비라기 보다 우박에 가까웠다. 한 겨울에도 창문을 살짝 열어놓고 자는 아들의 방을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펄럭이는 커튼이 아들의 몸 위에서 너울대고 있다. 이불 아래쪽은 비가 흩뿌렸는지 축축했다. 그것도 모르고 곤히 자는 아들의 몸뚱이는 그야말로 거대하다. 언제 이렇게 커서 내 몸의 두 배로 불어났는지. 말랑말랑했던 손이 어느새 두툼해져 이제 쉽게 잡아볼 수 없는 아들의 모습이 멀게 느껴졌다. 뭐가 그렇게 열나는 일이 많은지 겨울에 창문을 열고 자는 아이가 있기는 할까?


pixabay


요즘 다이어트한다고 빈속에 운동하면서 허기를 참지 못하고 결국 과자를 허겁지겁 몰래 먹는 모습을 나한테 들킨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몰래 먹으려면 완벽하게 숨겨야 하거늘 텅 빈 과자봉지가 나 보란 듯이 방바닥에서 입을 벌리고 있다. 아들은 항상 그런 면이 있다. 뭔가를 감추지만 결국은 제 입과 행동으로 다 쏟아놓는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해맑은 아이였는데.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부모 밑에서 그 해맑음은 천둥처럼 무서움으로 바뀌어갔다.


좁은 침대에 불편한 자세로 자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매일 넘치는 식욕을 참아보자 다짐하고 결국 오 분 후에 과자를 찢어내고 마는 참을성과 끈기라고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가벼우면서 무거운 아이다.


나의 원죄라도 되는 듯 난 늘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 있다. 장사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아이가 나름 겪었을 고통을 감싸주지 못했고 제 나이에 배워야 할 공부만 어떻게든지 따라갈 수 있는 아이이기를 바랐다. 아이의 감정까지 내 마음에 담아두기에 나의 마음그릇은 너무 좁았다. 뭔가 잘못된 부분을 감지하긴 했지만 그 속을 꿰뚫기가 두려웠다. 그 두려움의 정체가 선명하게 드러나면 내가 과연 잘 헤쳐나갈지 나 자신이 못 미더웠다. 그저 불확실하게 놔둔 채 미루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미루고 도망친 시간이 나에게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온다는 걸 그때는 몰랐었다. 




아이는 이제 성인이다. 성인이 된 자식의 방은 제 마음속만큼이나 어지럽다. 좁은 책상에 커다란 모니터가 차지하고 남은 공간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뒤섞여 한마디로 난장판이다. 그 난장판을 하나씩 정리하는 게 나의 일과다. 내가 도저히 못 봐주겠는 아들의 방을 정리해 주는 엄마의 심정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하나씩 정리하는 일로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unplash




정리하는 일은 나의 숙명과 같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한 남편은 나를 살림하는 여자로 두지 않았다. 친정부모님의 가게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는 불효자인 내가 손님을 맞이하는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장사는 사입한 물건을 가져와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무엇하나 허투루 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꼼꼼하게 손질하고 예쁘게 걸어놓는다. 가게에 손님이 오기까지 내 몸의 관절을 모두 이용해 정성스럽게 쓸고 닦았다. 그렇게 정리하는 일이 운명처럼 내 일이 되었다. 덜렁이에서 꼼꼼이가 되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 그렇게 내 손은 머리가 아닌 손이 알아서 자동으로 일하는 정리의 달인이 되었다.


장사를 그만두고 항상 무언가를 해왔던 손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부엌살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냉장고부터 싱크대 선반, 물건이 쌓이는 곳은 모두 강박이 있는 사람처럼 나란히 세워놓고 종류별로 모아놓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 손은 아이들의 방에도 뻗치기 시작해 조금이라도 흩어져 있는 것들은 내 손이 자동으로 끌어모았다. 그때부터 손뿐만 아니라 입도 같이 거들었다. '아직까지 안 치우고 뭐 해?' '얼른 치워' '방 꼴이 왜 이래?' 저들이 마음 내킬 때 알아서 치우련만 나는 그걸 못 참고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댔다. 어느 순간 잔소리도 대물림이 된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잔소리를 멈추었다. 잔소리는 효과 없는 약이라는 걸 자라면서 충분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잔소리대신 기다림이 찾아왔다. 기약 없이 기다리는 시간이다. 그 기다리는 시간은 세월의 빠름과 다르게 느리게 흘러간다. 그 변화 없는 지루한 시간이 하루 이틀 쌓여 고스란히 마음의 짐으로 남았다.

정리한 제 방을 눈으로 자꾸 보다 보면 깊이 깨달을 때가 오지 않을까? 무거운 제 몸을 차지할 공간은 치워야 할 테니. 자신의 물건을 건드렸다는 짜증보다 엄마의 수고에 고마움을 먼저 느끼는 자식이기를 바란다. 그때가 언제 올지 모르지만 진득한 참을성과 함께 같이 오면 좋겠다.


pixabay



아이들에게 나의 불우했던 감정을 물려주지 않으려 했고 삶은 힘겹게 버티면서 쓴맛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달콤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온몸으로 가르치고 싶었지만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부모는 당연히 자식이 잘 되기를 늘 염원한다. 잘 되는 기준이 부모마다 다르겠지만 자신의 앞가림을 잘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하기를 기본적으로 바란다. 그 기다림이 짧을 수도 있고 지루하리만큼 긴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그 기다림 속에 부모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노심초사했던 시간이 담겨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수록 지칠 때가 있다. 아무런 변화 없는 상태에서 째깍째깍 시간만 흘러가고 내 주위만 그대로인 채 멈춰버린 듯한 느낌. 나의 세월만 빠르고 내 마음만 급할 뿐, 자식들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이제는 말할 필요 없이 저들의 인생이니 저들이 알아서 가꿔나가기를 지켜보고 믿어주는 것만이 내 몫으로 남았다. 직장 생활이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든 다이어트한다고 매일같이 다짐하며 겨우 오분 참고 과자봉지를 뜯어내든 난 간섭하지 않으리라.


기다리는 시간이 올바른 길이라면 좋겠다. 그 시간이 미련해 보여서 어서 빨리 정답을 알고 싶고 답답한 벽을 향해 주먹질을 해대고 싶다가도 어쩔 수 없이 그저 소심하게 지켜보기만 한다. 

어떤 것이든 오매불망 기다리는 시간 속에 땅속 깊이 숨겨져 있던 씨앗이 어느 날 멋있게 피어나 결국은 아름다운 열매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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