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걷는 길을 기억해
소설은 그저 잔잔한 내용이었다. 지루하게 시작했다가 어느새 마음이 그들 속으로 들어가 단숨에 읽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아내를 잃고 무기력하게 있다가 여차저차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일상 이야기이다. 여차저차 스토리가 마지막에는 나에게 깊은 한숨과 눈물을 안겨주었다. 마음에 돌덩이가 있을 때 소설에 빠지면 좀 나을 줄 알았는데 책을 덮고 나니 소설에서 빠져나와야 되는 순간이 오히려 더 힘들어졌다. 주인공이 새 삶을 시작하기까지 주변의 이웃들은 자기 일처럼 걱정해 주고 도움을 주었다. 나의 한숨과 눈물이 어떤 의미인지 몰라서 곰곰 생각해 봤다. 그 의미는 그들과 이제 헤어져야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마도 책 속의 등장인물과 같이 호흡하고 있었나 보다. 마음이 허전해졌다.
눈물로 세수하고 대충 옷을 걸치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입동이지만 아직 가을 햇살은 따사롭다. 야트막하게 흙길이었던 내리막길은 가지런히 보도블록으로 새 단장을 했고 한 사람이 기분 좋을 때 팔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신나게 걷기 딱 좋은 폭의 넓지 않은 길은 인도보다 자전거길을 더 넓게 만들어놨다. 깔깔하고 깨끗한 보도블록을 걸으며 옆으로 널따랗게 보이는 땅주인의 들판과 정돈되지 않은 흙 위의 생명들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안 보일 것 같은 끝이 저 멀리 보인다.
넓은 땅을 가진 주인은 철판으로 인도와 자기 땅을 구분 지어놓았고 그 사이에서 건강한 초록빛 생명이 덩굴처럼 철판을 타고 숭숭, 거침없이 올라가고 있다. 고르지 않은 흙으로 뒤덮인 저 넓은 땅을 가진 주인은 누굴까? 죽은 잎과 살아있는 잎이 엉켜있는 덤불 사이로 초록 잎들이 나 보란 듯 바람에 바들거리고 좁은 틈새로 이름 모를 들꽃들이 조그맣게 꽃을 피웠다. 공사 시작하면 다 쓸려 사라질 생명들이기에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길을 엄마의 손을 잡고 걷다 친구의 손으로 바뀌고 어느새 남편의 손에서 이제 자식의 손으로 바뀌었다. 길다면 긴 세월이 지나면서 왜 후회스러운 날들만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자식의 손을 잡고 걸을 수 있는 행복을 누리면서 머릿속으로는 쓸데없는 잡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때 다른 삶을 택했다면 지금 잡고 있는 딸의 손은 없을지도 모른다. 나와 나의 자손들이 지금 이곳에 뿌리내린 건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지금보다 더 나아질까? 아마 더 나은 것은 없을 것이다. 더 나은 것이란 내가 만든 공상에 불과하고 내가 만든 기준일뿐 이 세상은 내가 애쓴 만큼, 내가 가지고 태어난 운명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왜 그것밖에 안되냐고 불평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 그런 불만스러운 시간들이 쌓여 욕심이 많아지고 마음도 좁아진다.
50이 넘었는데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막연하게 현재가 불안하고 뭔지도 모르는 것을 찾으려고 헤맨다. 행복을 손에 쥘 수 없다는 강박이 나를 주눅 들게 하고 도망가고 싶게 한다. 82세 엄마도 그쯤이면 마음을 편안하게 가질 때도 됐건만 내내 자신과 투쟁 중이다.
내 앞에 있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가질 수 없는 것을 자꾸 탐한다. 마음을 비웠다고 나름 의연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이제 혼자서 걸어가야 하고 누구에게도 기대어도 안 되는 나의 길을 다짐하며 좁아진 마음을 신선한 공기와 가을바람으로 가득 채웠다. 필요 없는 마음은 먼지에 휩쓸려 싹 날아갔으면 좋겠다. 나를 꾸짖고 달래고 치유해 줄 곳은 자연밖에 없다.
길을 걷다 보면 나의 오감이 활짝 열린다. 길 위의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볼 수 있고 상쾌한 바람을 느낄 수 있고 신선한 공기를 맡을 수 있으며 나의 소중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상쾌한 바람은 부모님을 생각나게 하고 작은 꽃을 보면 가족과 함께 한 순간들이 생각난다. 지나가던 바람이 나에게로 와 착 감겼다. 너희는 도대체 뭐길래 날 달래주려 하니? 엉켜있는 무더기 속에 노랗게 올라앉은 작은 꽃이 바들거리며 햇살 속에 미소 짓고 있다. 네가 예쁜 노란색이라는 걸 아니?
모두 이 길을 걸었고 나도 걸었던 길을 기억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게 행복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그건 온전히 나의 행복이다. 나에게도 추억할 가족이 있고 내가 만든 가족도 있다. 그 가족을 지켜나가는 게 행복이다. 그거면 된다. 더는 바라지 말자.
마음이 자꾸 좁아질 때, 누군가 미워질 때, 나의 하찮음을 느낄 때 내가 걷는 길은 행복을 저축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살자. 그 길이 내일의 디딤돌이 될 거야. 그리고 기억해, 살아야만 되는 이유는 반드시 있다고.. 아무도 모르는 나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 한 가지는 꼭 있다고 믿어.
가정은 나의 대지다. 나는 거기에 뿌리를 박고, 거기서 정신적인 영양분을 섭취한다.
이러한 내적인 만족에서 마음의 평화가 생겨난다. / 펄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