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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자 Nov 09. 2024

초보 사색가의 인간탐구

▶양면성

글쓰기는 나를 파헤치는 작업이다. 나의 마음을 훌훌 털어내려고 썼는데 쓰다 보니 나의 본질을 알아간다. 나를 알아갈수록 위로보다는 도리어 채찍질할까 두려워 조금만 파헤치려 한다.




나는 누군가와 마음을 나눌 때 거짓으로 웃을 때와 진심으로 웃을 때가 있다. 직업상 습관적인 호응을 잘하는 나는 어떤 경우나 상황에 맞게 교묘하게 양면성이 드러난다. 서로 호감을 갖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과정의 긴장감이 있을 때는 서로 예의를 차리거나 잘 웃기도 하지만 의식적인 단계를 거처 무의식 단계로 들어가 상대가 편해지고 스스럼없어질 때 숨어있는 본성을 조금씩 드러내게 된다. 그때가 되면 나와 잘 맞는지 구분이 되고 가까이할지 멀리할지 알 수 있다. 그만큼 인간관계는 미묘해서 잘 풀리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꼬여서 답답할 때가 많다.


내가 겉으로 보이는 웃음, 겉으로 긍정의 의미를 담아 '네, 모두 이해해요'라고 대답하는 것은 나의 공감능력이 괜찮아서 또는 경험이 풍부해서 모두 가능했다고 믿었다. 다분히 자만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경험으로 체득한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나름 완벽하다고 자부하며 살아왔고 난 당연히 내가 아주 겸손한 사람인 줄 알았다.


결혼을 하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면서 난 자연스럽게 그들과 잘 섞이며 잘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그동안 배우고 터득한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고 내가 상대방을 아주 요령 있게 잘 설득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의 행동이 아주 중요하게 그들에게 어필될 거라 믿었다. 내 행동은 누가 봐도 진심에서 우러나온다는 걸 잘 알기에 말할 필요 없이 남들도 잘 알아줄 거라 믿었다. 정말 만사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관계, 특히 가장 중요한 남편과 자식과의 관계에서 모두 실패했다.


인간은 제 잘난 맛에 산다고 쑥덕거린다. 잘난 맛이 뭘까? 괜찮은 직업을 가졌거나 풍족한 경제력, 준수한 외모 이런 것들일까? 그렇다면 그런 조건이 안 되는 사람은 잘나지 못한 것일까? 도대체 잘난 맛이 뭘까? 나의 관점에서, 나를 돌이켜 생각해 보니 사람은 자라면서 자신이 보고 배운 것,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성장한다. 그 가치관을 믿고 살다 보면 마음에 단단한 자긍심이 생긴다. 그 자긍심이 한도 초과하면 내세우게 되고 간섭하게 되고 마치 그것이 대단한 진리인 것처럼 설교를 늘어놓는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내 모습으로 연결이 됐다. 


나는 매사 해탈한 사람처럼 내 경험에 비추어 내 말이 옳은 것처럼 충고하고 내가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통하기를, 나로부터 해답이 나오고 나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누군가의 입으로 나의 이름이 불리기를 원하며 또한 인정받기를 원했다. 바로 그 제 잘난 맛을 뿌리면서 말이다. 


상대의 얼굴을 보고 짐짓 내가 다 이해한 것처럼 행동했고 상대의 말은 다 듣지도 않고 미리 추측하여 도가 튼 사람처럼 행동했다. 우습게도 나의 어설픈 위로가 잘 통하던 때도 많았었다.


나의 경험이 전부이고 정답이 아닐 텐데 단지 나의 아주 단편적인 경험을 통해 상대방을 이리저리 재면서 계산하고 나의 충고가 마치 제일 올바른 결정인 것처럼 행동하는 나 자신이 바로 그런 잘난 맛에 살았던 건 아니었을까? 깊은 한숨과 함께 나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내 속을 들여다본 나의 본질은 결국 잘난 것이 없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내 모습이 잘나 보이기를 간절히 염원하면서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게 나를 숨기면서 인정욕구에 목마른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말과 달리 나의 행동에는 반 이상 진심이 섞여있다고 자부한다. 내가 진심으로 행동하면 언젠가는 상대방도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비되고 결국은 말로 전달해야 상대방은 겨우 알아듣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대방이 보는 내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아주 많이 다름을 알았고 행동보다는 그것이 진심이건 거짓이건 말이 훨씬 빠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모습을 관찰자의 눈으로 지켜보는 일은 영상을 남겨야 알 수 있는데 그런 일은 흔치 않다. 그렇다고 말로 전해 듣는다고 해서 확 와닿지도 않는다. 간혹 관찰 예능의 주인공들을 보면 찍힌 자신의 모습을 직접 대면할 때 많이 놀라는 모습을 보게 된다. 자신의 행동과 말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지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몹시 당황해한다. 그만큼 본인 스스로도 자신을 잘 모를 때가 많고 자신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인간의 양면성은 부정적이고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살다 보니 그 양면성은 내가 가지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그 양면성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에 나도 속해있다는 게 너무 싫어서 난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고 거부하고 싶었다. 난 순수하고 한 점 부끄럼 없는 사람이며 나의 행동은 당연히 선에 가깝고 양심적이기에 나의 경험들은 마치 모든 가치의 기준인 것처럼 내뱉었던 것들이 그저 나의 고집에 불과하다는 것을 내 말이 전혀 먹히지 않는 자식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벽에 대고 외친 메아리가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와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대중은 누군가가 한 가지 분야에 뛰어난 모습을 볼 때 존경을 넘어 추앙하게 된다.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은 당연하게 옳은 것이 되고 따르고 싶어 진다.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든 지지하고 드러나지 않는 그의 사생활까지 진심과 하나인 것처럼 믿게 된다. 어려운 분야를 개척하고 본질을 확연하게 바꾸어놓은 추앙의 존재는 자의든 타의든 커다랗게 부풀려져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과정이야 어떻든 좋은 결과로 이끌어내는 모든 행동과 결단력에 사람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낸다. 그것은 어쩌면 그 사람이 전한 진심이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진심이 그 사람 자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닐진대 아주 일상적인 작은 부분까지 그 진심이 뻗어있기를 절대적으로 바란다. 대중은 정확하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무작정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신뢰감을 갖게 되지만 그 진심과 사회적 통념에 조금이라도 오차가 나면 깊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갈기갈기 물어뜯는다. 그 사람의 진심은 영원한 것도, 완벽한 것도 아니며 대중들 또한 본인의 가치관을 들이댈 만큼 대단히 바르지도 않다. 결국 보였던 모습이 진심이었다면 빛을 발할 것이고 굉장한 위장술의 대가였다면 그에 맞는 벌을 반드시 받을 것이다. 인간은 신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절대 신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은 진심과 위선 사이에서 늘 갈등하며 어떤 날은 자신을 뽐내고, 어떤 날은 자신을 경멸하며 살아간다. 모든 것에 우왕좌왕하는 인간들은 자신과 같은 인간을 추앙하고 아주 사소한 것으로 실망을 느낀다. 다양한 미디어에 노출된 현대인들은 사회에 일어나는 세상만사에, 자신의 다양한 감정과 행동까지 심판당하고 감시당한다. 참으로 골치 아픈 일이다. 


인간의 양면성에 실망하고 자신을 소외할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해 있는 관계에서 양면성을 인지하고 진심으로 선(善)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 인간의 마음은 상대적이어서 상대방이 잘하면 나도 잘하게 되고 못되게 굴면 나도 못되게 굴 수밖에 없다. 당하기만 하는 사람은 마음에 분노와 울분이 쌓여 결국은 삶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 이기심과 이타심 중에 어떤 마음을 꺼내 써야 할지 그 중간을 잘 선택하며 살기는 정말로 어렵다. 인간의 변덕은 동물보다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꾸준히 마음을 갈고닦아야 내가 은연중에 보였던 위선마저도 진심 앞에 고개를 숙일 것이다.


©pixabay




난 가끔 지금의 내 처지와 내가 그때 그래야만 했던 상황을 변명하듯 머릿속으로 그려볼 때가 있다. 나중에 그들을 만나면 어떻게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될지 수십 가지의 문장들을 생각해 본다. 그동안 상대방이 나에게 했던 말과 똑같이 신랄하게 받아쳐줄까? 아니면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솔직하게 감정에 호소해 볼까? 어떤 말이 그 사람에게 통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가식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여러 경우의 말들을 생각한다. 그 말들 속에 내 진심이 얼마나 들어있을지는 상대방이 멋대로 만든 잣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동안 보였던 내 행동과 말들이 나를 변호해 줄 것이다. 아마 내가 진심 100%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은 반도 알아듣지 못할뿐더러 가끔 나 자신도 내 맘이 진심과 얼마나 가까운지 모를 때가 많다. 속 편하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에 책임을 넘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한낱 인간은 참과 거짓이 넘나드는 미지의 경계에서 겁도 없이, 때로는 줄타기하듯 조심조심 숨차게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양면성에서 어느 편이 승리할 것인지 내 양심에 맡기고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은 너무 험난하다. 그동안 다 아는 것처럼 오만을 떨고 살았던 내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진심에 닿으려고 지독하게 애쓴 내 양심에게 깊은 찬사의 박수를 보낸다. 제 잘난 맛으로 뿜어내는 말과 행동이 아닌 나이 든 자의 지혜였기를 바란다.


"진심은 엄청나게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적당히 해서도 안 된다. 너무 꾸며도 안 되고 또 너무 대충 해도 안 된다. 그 중간이 참 어렵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아주 미묘한 선이 있는데 두 사람 모두의 마음이 그 선에 닿으면 그제야 진심이 통하게 된다." 
-최대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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