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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

by 개울건너

하짓날에 감자와 마늘을 캤다.


이만하면 올 농사는 풍년이다.



돌아보면 나의 삶도 풍년이었다.

부모님에게서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 모두가 어렵던 그 시절에 굶지 않고 자랐으니까.



운명은 내 편이었다. 사고나 우연 등으로 죽을 뻔했던 몇 번의 순간에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났으니까. 그 누군가는 가족, 이웃, 지인이었고 나 자신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시어를 종종 발견한다. 그 시어들을 바람에 날아가기 전에 잡아두기 위해 나는 메모장에 채집한다. 채집해 놓은 시어들을 읽을 때면 통장에 쌓인 돈을 보는 것처럼 뿌듯하다. 그래서 나의 삶은 풍년이다.




남편이 캐서 밭고랑에 놓은 감자를 나는 뒤에서 작은 대야에 담아 농막으로 옮겨 바닥에 쏟아 쌓았다.

친구 결혼식에 다녀오느라 민준(아들)과 예빈(며느리)이 늦은 오후에 도착했다.

감자대야를 들고 일어서는데 까만 원피스에 반짝이가 박힌 단화를 신은 예빈이 쫓아와 그것을 받아 들었다.

농막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뒤를 나는 양팔을 벌리고 살금살금 따라갔다. 혹여 그녀가 넘어지면 그녀를 받아 안을 요량으로.



비닐 천으로 깔아놓고 바닥에 이미 쏟아 쌓아 놓은 감자 위로 그녀가 가만가만 감자를 쏟았다. 내가 쏟을 땐 번번이 여러 개가 밖으로 튀어 나가 굴렀지만 그녀가 쏟은 감자는 하나도 밖으로 튀지 않고 쌓였다.



나는 그녀의 옷에 흙 묻으니 그만하라고 했고 남편은 이제 두 포기만 캐면 끝나니까 조금 기다리라고 했다.



그들이 텃밭을 둘러보다가 고추 금속 지지대에 페트병을 왜 거꾸로 씌워놓았는지 물었다.

나중에 고춧잎이 커서 우거지면 몸 숙일 때 금속 지지대에 눈을 다칠 위험이 있어 충격 완화를 위해 씌워둔 거라고 대답했다.



예빈이 민준에게 아직도 페트병을 씌우지 않은 지지대가 많다고, 집에서 페트병 모아두었다가 다음에 올 때 가지고 와서 씌워야겠다고 말했다.


그들이 휴대폰을 들고 맛집 검색하더니 더덕구이는 먹어보지 않았으니 오늘은 그리로 가자고 했다.



식당은 넓고 깨끗했으나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손님이 왜 이렇게 없는지, 음식 맛이 없으면 어쩌나 예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주인 혼자 차려낸 음식은 다행히 정갈하고 맛이 좋았다. 더덕향도 진했다.

남편이 맛있다고 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음식이 맛있기도 하지만..”

그가 미처 표현하지 못한 말을 내가 이었다. “애들이랑 같이 먹으니 영혼이 맛있어!”



예빈이 직장에서 양가 부모님 건강검진받는 혜택을 주었다고 받아보시자고 지난 번에 했던 권유를 재차 했다. 2주 후로 아예 날짜를 잡겠단다.



우리는 돌솥 바닥에 붙은 누룽지까지 물 부어 깨끗이 비웠다.

민준이가 맞은편 통유리 너머에서 신장개업이라고 광고 중인 중국음식점을 바라보며 다음엔 저기서 먹어보자고 했다. 이 동네에서 중국음식은 아직 먹어보지 않았다고.




농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남편이 식당에 손님이 너무 없어 운영이 어렵겠다고 말했다.




농막에 도착해 나는 작은 상자 큰 상자 한 개씩을 창고에서 가지고 왔다.

애들이 마트에서 산 채소는 신선도와 맛이 우리 밭에서 캔 거랑 다르더라고 말했다.


남편이 그들과 가까이에 사는 예빈의 부모님께 보낼 감자를 큰 상자에 넣었다. 알이 굵은 것만 넣었다. 상자 가득 채운 굵은 감자 사이사이로는 작은 조림감자를 밀어 넣었다.

넓은 테이프로 상자 입구를 붙였다.

민준이 상자를 번쩍 들어 그들의 차에 실어 놓고 왔다.



작은 상자엔 민준 예빈이 먹을 감자를 역시 알이 굵은 걸로 골라 넣었다.

다 넣은 남편이 상자 입구를 붙일 그 테이프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거기 있던 테이프가 금방 어디로 간 거냐고, 아니다 참, 내가 방금 들고 있었는데 그게 어딜 갔지? 하며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애들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애들은 그곳에 있을 리 없는 비닐하우스까지 찾으러 다녔다.

결국 찾지 못하고 나는 연장 선반에 있는 새 테이프를 꺼내주었다. 남편이 테이프로 상자 입구를 또 막았다.

민준이 상자를 또 들어다 그들의 차에 실었다.


마늘은 며칠 더 말려 놓을 테니 나중에 와서 가져가라고 했다.


밖으로 나서려는데 작은 탁자 위에 우리가 이리저리 다니며 찾던 테이프가 놓여있었다. 이게 여기에 있는 걸 그렇게 찾아다녔다며 내가 웃었다. 애들도 웃었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하늘을 보며 오늘은 흐려서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민준이 옆집 텃밭에 세워둔 차를 가지러 갔다.

그를 기다리며 예빈이 말했다. “저희는 늘 이렇게 받기만 하네요.”

나는 대답했다. “우리도 너희들한테 많이 받고 있단다.”


민준이가 끌고 온 차를 우리 앞에 세우더니 조수석으로 옮겨 탔다. 예빈이 운전석에 올랐다.

허둥허둥 구두부터 벗어 차에 넣고 맨발인 채 불안한 표정으로 운전석에 올라 운전대를 꽉 잡던 작년 봄 보다 그녀는 이제 꽤 여유가 있다.

그들이 “가볼게요.” 말했다.

나와 남편은 밤길이니 운전 조심하라고 말했다.


좁은 농로를 따라 천천히 가는 애들의 차가 왼쪽으로 돌아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만하면 내 현재의 삶도 풍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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