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바람에 가을이 잔뜩 묻어있다.
시댁 벌초행사에 가는 날이다.
일찍 일어나 먼저 밭으로 갔다.
플래시를 내가 비추고 남편이 맏동서네 갖다 줄 늙은 호박과 애호박, 가지를 따서 사각 바구니에 담았다.
남편이 말했다. 바쁜 애들 자꾸 불러들이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고, 이번엔 서준(작은 아들)이 오라고 해 먼 지방까지 운전시키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서둘렀어도 7시 반에야 집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서준이가 운전대를 잡았다.
신혼시절부터 아이들 클 때까지 이렇게 시댁 행사에 가는 것이 우리 가족의 유일한 가족여행이었다.
서준이가 졸음을 방지하느라 그랬는지 운전할 때 늘 틀던 음악 프로가 아닌 유튜브 ‘컬투쇼’를 틀었다.
사연마다 재미있어 우리는 크게 웃었다. 남편이 어떤 사연은 너무 꾸민 것 같아서 이상하다고도 했다.
남편이 막히지 않고 이 속도로 간다면 오전 중엔 형님네 도착하겠다고 말했다.
앞 좌석에서 정면을 바라보고 얘기하는 그들의 말이 뒷좌석에 앉아있는 나에게는 잘 들리지 않아 나는 가운데로 옮겨 앞 양쪽 의자의 뒷부분을 양손으로 잡고 그들을 향해 자주 몸을 숙였다.
인천에서 서준이와 가까이에서 직장생활을 살고 있는 상욱(시누이의 아들)의 소식을 남편이 물었다. 상욱이는 얼마 전에 작은 집을 사서 이사를 마쳤단다.
스포츠 기자가 되고 싶어 했던 상욱이가 지금 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을 텐데 잘하고 있어 다행이라고 내가 말했다.
서준이가 밥벌이에 꿰어 맞추는 게 적성이라고 했다. 취미나 적성이 본업으로 연결되면 좋겠지만 그럴 경우 돈벌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남편이 머리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코스모스 키가 한 뼘밖에 되지 않는데 꽃이 피었다고 말했다.
나도 창밖을 바라보았다.
코스모스는 이미 보이지 않았고 멀리에 있는 황금들녘이 보였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고 혼자 말했다.
남편이 배추(?)가 많이 돌아다닌다고 말했다. 나는 배추가? 물으니 그들이 똑같이 “아니 벤츠가.” 대답했다.
앞에 앉아 앞에 대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아 나는 자주 앞으로 몸을 숙여 되물었고 그럴 때마다 목소리가 크지 않은 서준이가 재차 대답해 주었다.
신혼 때부터 시댁 행사에 빠지지 않고 다닌 이 길에서 우리 가족은 여러 일을 겪었다.
혼잡을 피하기 위해 새벽에 떠난 차 안에서 아침 해가 올라오는 장관을 보기도 했고, 오전에 가다가 추돌 사고를 겪고 레카 차에 묶여 도로 집으로 갔다가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간 적도 있었다.
벌초를 끝내고 올라오다가 앞차 꽁무지에서 불이 나는 모습을 보기도, 저 지난해엔 큰 아이가 휴게소에서 후진하다가 다른 차를 추돌하기도 했다.
벌초 현장에서도 여러 일을 겪었다. 몇 년 전엔 깜빡 잊고 당뇨약을 한 번 더 먹은 시동생이 저혈당 쇼크를 겪기도 했고, 작년엔 가족들이 벌에 쏘여 응급실을 가기도 했다.
해외에 살고 있는 동생은 벌초가 아름다운 한국 문화라고 하지만 죽은 사람 산소 이발한다고 살아있는 가족들이 이렇게 위험한 일을 겪어서야 되겠는가.
벌초 행사 때마다 내 심사는 편치가 않다.
휴게소에 들어갔다.
남편은 아메리카노를, 서준은 페퍼멘트를 샀다.
늘 그렇듯 나는 남편의 커피를 받아 먼저 한 모금 마시고 도로 주었다.
서준과 운전대를 바꿔 잡은 남편이 다시 길을 달렸다.
추석 전 마지막 주말이어서 예상대로 벌초 가는 차들이 갈수록 몰려들고 있었다.
주춤주춤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남편의 휴대폰이 울렸다. 남편이 오른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나에게 넘겨주었다.
시숙이었다.
시숙은 어디쯤 오고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여기가 어디쯤인지는 모르겠는데 도착 예정은 1시라고 알려드렸다.
시숙은 조심해서 오라고 했다.
집에서 떠난 지 다섯 시간 만에야 맏동서네 도착했다.
장조카가 대문 앞에 나와 있었다. 우리가 차를 세웠고 마흔네 살의 그가 다가왔다.
내가 먼저 내리자 나보다 키와 덩치가 두 배는 더 큰 그가 나를 안았다.
그가 서준이와 악수하고 남편에게 이곳에 주차하시라며 제 차를 빼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서준이가 차 트렁크 문을 열고 밭에서 따 담은 사각바구니를 빼서 번쩍 들었다.
대문이 열려있었다.
덜커덩 거리는 마음으로 도대체 삶은 왜 이리 유치한 거냐 생각하며 마음의 턱이 높아 드나들기 힘들던 이 대문을 부드럽게 넘은 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자 손녀를 안은 시숙과 상아(장조카며느리)가 나왔다.
시숙은 안 본 시간만큼 늙었고 아이가 둘인 상아는 날씬한 몸매에 잘록한 허리도, 뒤로 묶은 생머리 모양도, 윗사람 어려워하는 수줍은 웃음도 그대로였다.
서준이가 사각바구니를 길고 넓은 사각의 식탁 위에 올려놓았고 상아가 또 야채를 이렇게 가지고 오셨다며 동그란 바구니를 식탁에 올려놓고 그것들을 그리로 옮겼다.
맏동서가 보이지 않았다.
형님은 어디 가셨어요? 실내를 둘러보며 물었다.
저기.. 뭐.. 좀 배우러 갔어요. 시숙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고, 어머니는 중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다고 상아가 덧붙였다.
하필 오늘이 개학날이라서 학교에 갔다고 시숙이 보충 설명을 했다. 주 일회 토요일에만 가서 공부한단다.
깨끗한 실내와, 아직은 힘없는 머리카락을 세 갈래로 묶고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세 살짜리 손녀를 보며 우리가 여기 온다고 일찍 서두느라 바빴던 만큼이나 시숙 집도 우리 온다고 치우고 꾸미느라 바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방을 열었다. 이 순간을 깜빡 놓치면 봉투를 우리 집으로 도로 가지고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상아에게 잊기 전에 줘야 한다며 아이들 책 사주라고 문화상품권을 넣은 봉투를 주었다. 상아는 매번 오실 때마다 이렇게 챙겨주신다고, 감사하다고 작게 말하며 두 손으로 봉투를 공손히 받았다.
상아가 차를 끓여 내왔다.
시숙이 민생지원금 받았느냐고 물었다. 우리나라 복지 좋아졌다고 시숙이 말하자 남편이 지금 받는 거 좋아할 거 없다고 나중에 얘들(장조카와 서준)이 다 토해 내야 할 빚이라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장조카와 서준이 남편 말이 맞다고, 우리들이 앞으로 다 도로 내놔야 할 거라고 얼른 동의했다. 나는 남편과 얘들의 말이 언짢아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장조카가 맏동서의 점심식사는 학교에서 급식으로 해결하니까 식사는 우리끼리 하러 나가시자고 했다.
장조카 차가 앞에 가고 서준이가 뒤를 따랐다. 서준이가 말했다. 경빈(초등학교 5학년인 장조카의 아들)이에게 정이 제일 많이 간다고.
나는 경빈이 애기 때부터 여기 오면 네가 잘 데리고 놀아주었잖니 말했다.
주차한 곳은 장어 집이었다.
예약해 둔 자리에 앉으니 장조카가 뼈 탕을 떠서 경빈에게 주었고 경빈은 그걸 쟁반에 세 개를 먼저 담아 날라다 세 어른 앞에 먼저 놓았다. 경빈에게 제 아빠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모양이었다.
손녀는 포크로 콩나물을 한 번에 많이씩 서툴게 들어서 입안 가득 넣고 먹었다.
야채를 이렇게 잘 먹는 사라가 신기해 우린 웃으며 사라가 음식을 가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했고 정아와 장조카는 아우, 너무 많이 먹어 걱정이라고 했다.
좋은 고자질은 빨리 해야 한다. 내가 크게 말했다. “경빈아, 서준이 삼촌이 우리 경빈이한테 정이 제일 많이 간댄다.” 모두가 경빈이를 쳐다보며 웃었다.
나는 모여 있는 가족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고 가지런히 잘라져 놓여있는 장어 접시를 향해서도 셔터를 눌렀다. 경빈이와 손녀의 독사진도 찍었다.
잘라 놓은 장어 접시가 예술이라고 말했다. 옆에 앉아 장어를 굽기 시작하는 장조카가 저쪽 장어 접시가 더 예술이라고 저쪽 걸 한 번 더 찍으시라고 했다. 나는 그쪽 접시를 향해서도 셔터를 눌렀다.
장조카가 노릇노릇하게 구운 장어를 시숙과 남편, 내 접시에 골고루 놓아주었다.
그가 구운 장어를 시숙 접시에 놓아줄 때 시숙은 자꾸 자기의 접시를 들었다. 그럴 때마다 장조카가 접시 들지 말고 바닥에 그냥 놓아두시라고 크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가 귀가 잘 안 들려서 이런 데선 크게 말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장조카에게 너도 어서 먹으라고 권했다. 그는 걱정 마시라고 저도 먹으면서 굽고 있단다.
우리 세대의 해는 기울어가고 장조카 세대는 중천에 떠있다. 경빈 세대는 오르고 있다.
장조카에게 말했다. 사진은, 특히 가족사진은 가족의 기록이니까 우리 죽으면 나중에 너희들 보라고 찍어두는 거라고,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특히 그 윗대에 대해, 우리 가족의 뿌리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데 기록이 없으니 아쉽다고 말했다. 장조카가 네에 하며 웃었다.
기름기가 많아 즐겨 먹지 않던 장어가 오늘은 맛이 좋았다.
장어를 다 먹어갈 때쯤 장조카가 슬며시 일어나더니 한 접시 더 주문한 모양이었다. 장어가 한 접시 더 들어왔다.
나는 뭘 또 시켰냐며 놀랐고 그는 많이 드시라고 했다. 나는 또 먹었다.
남편의 휴대폰이 울렸다. 정읍에 사는 시동생이었다.
시동생이 저녁은 자기가 살 테니까 이따 장항으로 넘어오라고 했다. 남편이 휴대폰을 장조카한테 넘겨줬다. 시동생이 장조카에게 저녁에 부모님 모시고 장항으로 오라고 했다.
장조카가 이제 카페로 이동하시자고 했고 우리는 커피는 집으로 가서 마시자고 했다. 맏동서도 곧 귀가할 테니.
시숙 집에 도착해 남편이 거실로 들어가지 않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나도 따라 올라갔다. 젊어서 암수술을 한 맏동서가 가꾸는 옥상 텃밭이 나도 궁금했으니까.
넓은 옥상에 키 작은 와송은 줄기 속에 초록물을 잔뜩 안은 채 탱탱하고, 다른 여러 야채들은 이미 다 말라있었다. 초록 고추는 땅이 아닌 화분 안에서 맘껏 자라지 못한 탓에 작게 달려있었고, 이미 딴 홍고추는 세로로 갈라져 나무 채반에 널려있었다.
상아가 맏동서를 데리러 학교로 갔고 장조카가 과일을 깎아 과자와 함께 내놓았다.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공부로 제2의 도약을 하고 있는 일흔다섯 살의 맏동서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가 작은 종이를 급히 내밀며 말했다. 나 우째야 옳어!
건네주는 표를 받아서 보니 혈압이 꽤 낮은 숫자로 기록돼 있었다. 계속 어지러워서 오면서 병원에 들러 혈압을 체크했단다.
몇 년 전 그녀의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셔 문상을 간 자리에서 그녀가 말했었다. “나 번호 탔어.”
친정 형제 중에 맏이인 그녀는 그녀의 부모가 이제 다 떠났으니 다음은 그녀 차례라는 뜻이었다. 떠나는 데는 순서가 없다지만 누구나 그렇듯 그녀도 급히 그녀에게 달려오는 것 같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남편이 형수님 왜 이리 혈압이 낮으냐고 물었고 나는 형님 혈압이 높아 약 먹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동안 약을 먹었는데 이제 의사가 혈압 약 먹지 말라고 했단다.
상아가 탁자에 앉는 그녀에게 무슨 차를 드릴까 물었고 그녀가 말한 녹차를 그녀 앞에 놓았다.
나는 홍고추를 저렇게 갈라서 말려도 빻았을 때 색깔이 괜찮은지 물었다. 그녀는 저렇게 말려도 가르지 않고 건조기에 말린 것과 색이 같다고 대답했다.
서준이가 남편에게 제2의 도약을 권했다. 아버지는 퇴직 후에 색소폰을 배우시라고.
남편이 색소폰은 독학할 수 있느냐고 묻자 서준이는 그건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우린 일정이 급했다.
이따 장항에서 다시 만나자며 일어났다.
나오면서 서준이가 맏동서 손에 봉투를 살며시 쥐어주었다.
우리를 배웅하러 먼저 밖에 나가있는 시숙의 손에도 맏동서에게 봉투를 쥐어주느라 조금 늦게 나간 서진이가 몸을 밀착하며 살며시 봉투를 쥐어드렸다.
서준이가 운전대를 잡았다. 우리는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막내시누이네로 향해 출발했다.
나는 차 안에서 시누이에게 지금 출발했다고 문자를 했다.
남편은 내일 비가 온다니 걱정이라고 했다.
나는 우리 가족 벌초행사에 비 온 적 없었는데 이번엔 올 모양이라고, 일기예보가 틀리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누이 집에 거의 와가고 있었다. 남편이 어? 저 위에 시누이와 그녀의 남편이 있다고, 우리 조부모 산소에서 벌초 중이라고, 갈퀴질 하는 걸로 봐서 마무리 중인 가보다고 했다.
우리는 그리로 오르는 비탈 아래에 차를 세웠다.
마음이 급해진 남편이 경사가 높은 비탈길을 부지런히 앞서 오르고 있었다.
헉헉대며 천천히 오르는 나와 보폭을 맞추는 서준에게 내가 아버지는 몸이 가벼워 저렇게 빨리 오를 수 있나 보다고 말했다. 서준이가 내 손을 잡아주다가 허리를 밀어주다가 했다.
삶은 견디는 것일까.
나는 매일 마음의 무릎을 꿇고 혼잣말을 한다. '서준아 미안해'
왜 이렇게 느려 터지냐고 답답하다고 소리소리 지르고 닦달해서, 너를 믿지 못하고 너무 걱정을 해서.
돌아보면 그 한 구간에서, 이 어미는 사는 게 죄였다.
그 닦달을 견디고 지금 어미의 스승이 되어있는 서준에게 나는 늘 미안하다.
알밤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툭, 투둑!
돌아가신 지 아주 오래되었다는 시조부모의 산소에 도착하니 산소는 깨끗하게 벌초돼 있었고 시누이 내외는 없었다. 아마 그들은 조금 전에 막 끝내고 저 쪽 산길로 내려간 모양이었다.
우리는 산소에 절을 하고 바로 내려왔다.
시누이네 도착했다.
그녀 내외는 벌초 마치고 막 집에 도착했단다.
우리가 그들을 보고 올라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그들은 저쪽 산길로 내려간 것이었다. 내일 비가 종일 온다는 예보가 있어 얼른 가서 거기만이라도 깎았다고 말했다. 그들도 우리 도착시간에 집에 있어야 하기에 벌초를 급히 마치느라 바빴으리라.
시누이 남편이 서준을 안았다. 그는 늘 만나면 우리의 아이들을 어렸을 때도 안아주었고 어른이 된 지금도 이렇게 안아준다.
시동생도 도착했다.
시누이가 벌초하러 산소에 오르고 내려오는 길에 주웠다며 밤 봉지를 내놓았다 시동생과 나눠 가지고 가라고 했다. 시동생이 형수님 다 주라고 했다. 나는 시동생과 나누자고 또 말했고 시동생이 집에 밤이 있어서 자긴 안 가져가도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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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금 쉬었다가 차로 삼십 분 거리에 있는 식사 장소로 또 달렸다.
남편이 옛날엔 여기서 장항까지 가려면 하루 종일 걸렸는데 이렇게 삼십 분 정도 걸려 차로 식사하러 다니는 세상이 됐으니 얼마나 좋아진 거냐고 말했다.
남편이 말을 이었다. 지금은 경사도 별로 없는 길이지만 옛날엔 여기가 꽤 높은 고개였다고, 처녀가 죽어 여기 어디에 묻어서 이 고개를 넘을 때 그 귀신이 쫓아온다는 소문이 돌아 어린 나이에 무서웠다고.
한산 모시 장을 지났다.
옛날에 어머니가 마당에 모시 나무를 심어 다 자라면 그 대를 잘라 실을 만들어서 장날에 이곳으로 팔러 나오셨단다.
등 굽어 하얀 모시실 같던 내 어머니.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침을 삼켰다.
식사 장소는 금강과 군산 서해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횟집이었다. 점심에 식사를 같이 했던 맏동서네 가족도 익산에서 이곳으로 와 다시 합류했다.
시누이 내외의 단골이라는 이 집에 들어서니 미인의 여사장님이 반갑게 맞이했다.
나는 점심식사의 포만감으로 더 먹을 수가 없었다.
얼른들은 술을 마셨고, 장조카는 세 살짜리 그의 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어주었다. 좋아한다는 회를 잘 먹고 있는 경빈이는 서준이가 옆에 앉아 떡갈비도 잘라주며 살폈다.
맏동서 암수술 했을 때 장조카가 돌이 막 지났을 때였단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시누이가 맏동서네 집을 오가며 동서 병시중과 장조카를 돌보았다.
시누이가 잠깐 자기 집에 가서 없으면 장조카가 시누이 사진을 보고 고모, 흑흑 고모, 하며 울고 제 배 위에 사진을 놓았다가 다시 사진을 들어 보며 또 울었다는 말을 맏동서가 했다. 우리는 모두 웃었고 제 딸 입에 음식을 넣어주던 장조카도 씩 웃었다.
나도 고모에게 고마운 마음을 어찌 잊겠느냐고 말했다. 우리 애들 낳았을 때 와서 한 달씩 다 산바라지 해주고 나 아플 때마다 와서 애들 건사해 주고 아휴..
시동생이 서준에게 다음 달에 있을 자기 딸 결혼식 때 오늘은 함께 하지 못한 큰 아들 민준과 함께 축의금 접수 좀 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인심 좋은 여사장이 서비스 음식을 자꾸 내 왔다. 우리는 모두 이젠 못 먹겠으니 그만 달라고 손 사레를 쳤다.
시동생이 사겠다는 저녁을 어느새 시누이네가 계산을 했단다. 시동생이 어어, 내가 사려고 했는데, 하며 놀랐다.
모두 식당을 나와서 시숙네 가족과는 여기서 헤어지고 내일 시부모님 산소에서 또 만나자며 인사를 나눴다.
남편이 지갑을 꺼내 만 원짜리 여러 장을 빼서 열려있는 장조카 차창 너머로 경빈에게 주는 모습이 우리 차의 창 너머로 보였다. 차암, 내가 어련히 알아서 다 챙겼을까, 뭘 또 주고 있나! 나는 남편 등 뒤로 못 마땅해했다.
시숙네 차가 떠나고 남편이 와서 우리 차에 올랐다. 그가 경빈이에게 용돈을 주었다고 보고 먼저 했다. 나는 잘했다고 대답했다.
우린 시누이네 집으로 돌아왔다.
시누이가 배를 깎아 내왔다. 배 맛이 시원하고 달았다.
아까 조부모님 산소 벌초할 때 옆에 있는 배 과수원 주인이 까치가 한쪽 파먹은 거라며 한 상자 주더란다.
남편이 시누이 남편에게 처갓집 산소 벌초까지 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시누이가 그녀의 남편에게, 그러게 왜 나랑 동네 결혼을 해서 당신 이 고생이냐고 말했다. 시누이 남편이 그러게, 당신이 그때 선 본 포항제철 남자한테 갔으면 내가 이렇게 처갓집 벌초 안 해도 될 것인디, 응수하자 모두 웃었다.
그들이 처녀 총각일 때 뒷집 사는 시누이가 읍내로 포항제철 다니는 남자와 선을 보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앞집 사는 시누이 남편이 못 마시는 술을 마구 마시고 밤새도록 방에서 울었다는 일화가 있다.
중학교 졸업 후 동네 농협에 취업한 시누이 남편은 시누이와 결혼하고 농협에서 계속 일한 지 오래되어도 학력 때문에 승진에서 번번이 탈락했다. 몇 번째인가 또 탈락하던 날 자기 아버지 산소에서 실컷 울고 나서 그 길로 방송통신 고등학교에 입학해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했다. 바로 직장에서 승진했다. 그는 바로 대학원에 진학했고 졸업하던 해에 정년퇴직을 했다.
대학원 졸업과 직장 퇴직 후엔 폴리텍 대학에 다시 입학해 기술을 배워 여러 기술 자격증을 취득하고 지금은 읍내 자기 집 옆에 보일러 대리점을 내서 설비 가게까지 운영 중이다.
그는 그 고장 토박이에 어려서부터 신임을 얻어 일거리가 밀릴 정도여서 퇴직 전 보다 수입이 훨씬 많아 그들 부부는 요즘 신바람 나는 삶을 살고 있다.
형제들이 모두 노래를 좋아하고 잘 부른다.
시숙은 이십 대 때 전주 방송국에서 하는 라디오 노래 경연대회에 나가서 ’ 라노비아‘를 불러 2등을 했었단다. 시숙은 가수가 되고 싶어 했으나 너 가수 만들다간 동생들 굶게 된다며 시아버지가 반대해 그 길을 가지 못했다.
거실에 엎드려있던 시동생이 휴대폰으로 ‘린’ 노래를 틀었다.
나는 린 목소리가 처음엔 좋더니 지금은 싫증 난다고 말했다. 시누이가 자기도 그렇긴 한데 ‘찻집의 고독’은 안 그렇다고 말했다. 시동생이 바로 ‘찻집의 고독’을 틀었다. 난 그 노래 역시도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시동생에게 이찬원 노래 ‘시절인연’ 틀라고 했다. 시누이 남편이 그 노래의 가사를 먼저 읊었다.
“가는 인연 잡지를 말고 오는 인연.. 뭐더라?” 나머지 가족이 여기저기서 말했다. “오는 인연 막지 마세요.”
시누이가 임영웅 공연 티켓은 사기가 어렵다고, 매번 해봐도 안 돼 더라던 아들 상욱이가 어쩌다 해보니 이번엔 됐다고, 외숙모 티켓까지 두 매 샀다더라고 다음 달에 올림픽공원에서 하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기뻐서 놀라며 박수를 쳤다. 세상에, 상욱이 녀석 이쁘기두 하지.
피곤이 몰려왔다. 나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열려있는 방문으로 그들의 이야기 소리가 계속 들렸다.
시누이가 틀었는지 임영웅 노래 ‘돌아보지 마세요’가 잠결에 들렸다.
“어? 비 오네?”
새벽 비 소리에 놀란 남편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시동생이 일기 예보에 새벽부터 종일 비 온다 했다고 잠에 취한 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남아있는 부모님 산소 벌초를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니기에 나는 여유 있게 돌아누우며 빗소리를 들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주방에서 시누이가 식사준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전엔 벌초를 끝내야 해서 벌초 날엔 이렇게 아침을 일찍 먹는다.
나는 뒷마루 문을 열고 뒤뜰로 나가보았다. 장독, 감나무, 꽃무릇을 지나 더 들어가 보았다.
작년 같질 않고 가지도 깻잎도 뭐 하나 튼실한 게 없었다.
더 둘러보는데 시누이가 불렀다. 빨리 나오라고, 거기에 모기가 엄청 많다고.
시누이가 정갈하게 차려낸 둥그런 밥상에서 둥그렇게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뒤뜰에 서 있을 땐 몰랐는데 그제야 여기저기가 가려웠다. 나는 손으로 자꾸 긁었고 시누이는 내 그럴 줄 알았다며 긁는 곳마다 약을 발라주었다.
남자들은 수저를 놓자마자 작업복을 입고 연장을 들고 산소로 출발했다.
집에는 나와 시누이만 남았다. 우린 커피를 마셨고 배를 또 깎아 먹었다.
나는 식탁 위에 명절 비용 봉투를 올려두었다.
시누이가 어제 과수원 주인이 준 배를 내가 가져가도록 몇 개 담아 차에 넣으라고 했다. 나는 몇 개나 넣을지 시누이더러 직접 담아 달라고 했다.
그녀가 봉지를 가지고 나와 현관문 밖에 있는 배를 여러 개 담아줬다. 그리고 그녀가 현관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가 들어간 걸 다시 확인하고 큰 배 다섯 개를 봉지에 얼른 더 담아 봉지 입구를 오그려 잡고 우산을 찾아 쓸 새도 없이 빗속을 뛰어 우리 차에 실어놓고 들어왔다.
이래 봬도 나는 결혼하고 첫제사 때 부엌에서 혼자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시렁 위에 올려져 있는 곶감을 들키지 않고 까치발로 여러 개 집어 먹었던 실력자이다.
벌초를 끝낸 남자들이 비를 흠뻑 맞은 채 들어왔다.
모두 차례로 샤워를 하고 마른 옷들로 갈아입었다.
아침에 익산에서 또 산소로 직접 온 시숙과 맏동서도 들어왔다.
시누이가 봉지를 가지고 나가더니 맏동서를 불렀다. 나도 궁금해 쫓아 나갔다.
시누이가 맏동서에게 이거 짝은 오빠(시동생)와 반씩 나눠가지고 가라며 배를 봉지에 담았다. 나는 찔끔했다. 남은 배를 그들에게 나눠 줄지 몰랐으니까. 그럴 줄 미리 알았더라면 시누이가 싸준 그대로만 차에 실어둘 걸, 몰래 더 넣지 말고.
배의 숫자가 여러 개 줄어있는데도 시누이는 개의치 않고 남아 있는 것 몇 개중 반 씩 나눠 두 봉지에 담았다.
아버님 제사 때 시렁 위 곶감도 나중에 제사상에 올릴 걸 모르고 꽤 많이 먹었을 때 줄어든 곶감 개수에 시어머니도 개의치 않았었다.
시동생이 직접 담갔다는 복분자주를 집집이 두 병씩 주었다.
아직 오전이지만 마음이 급한 우리는 모두 시누이 집 바로 옆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점심을 어서 먹고 어서 출발해야 하기에.
시누이 친구이기도 한 옆 식당 여사장이 만드는 음식은 집 밥과 같다.
여러 해를 벌초 때마다 이 식당에 다녔는데 여사장은 지난해 남편을 떠나보내고 혼자가 돼있었다. 남편을 보낸 상실감으로 그녀는 얼굴이 꽤 상해있었는데 음식 맛은 그대로였다.
어제저녁 식사 때처럼 누군가가 식사비를 또 먼저 계산할까 봐 시동생이 일찌감치 계산을 마쳤다. 남편이 이번에 우리는 얻어만 먹고 다닌다고 말했다. 맏동서가 에이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비는 계속 내렸다. 식사 중에 비 오는 밖을 바라보며 제일 멀리에 살고 있는 우리의 귀갓길이 얼마나 걸릴지 심란했다. 우리를 집에 태워다 주고 자신의 일터가 있는 인천으로 가야 하는 서준이는 더 심란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식당 문을 나서려는데 맏동서가 다가와, 올라갈 때 휴게소에서 음료수 사마시라며 몇 번 접은 흰 봉투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보다 소리가 크려면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추석 명절 잘 보내라고, 잘 가시라고 큰 소리로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 다시 차창 문을 열어 들이치는 비를 맞으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에게 만나야 하는 이가 한 사람 더 남아있다.
가락시장으로 모이는 여러 종류의 과일을 선별하는 곳에서 일하고 있어 이번 벌초 행사에 함께 하지 못한 나와 동갑인 큰 시누이다.
달리는 차 안에서 그녀에게 전화했다. 그녀는 일터로 오라고 했다.
사십 분을 달려 그녀의 일터로 가니 바깥에 있는 주차장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가 멜론 한 박스를 들고 빗속을 뛰어 우리 차 안으로 들어왔다.
카페로 들어갈 시간도 서로 되질 않아 차에 앉아 얘기를 나눴다.
내가 배우려고 샀던 뜨개실 상자를 뜨개질도 전문가인 그녀에게 주었다.
지난해에 배우려고 샀는데 아이고, 안 배우고 말지, 머리 아파 포기했다고, 같이 샀던 바늘까지 그대로 주니 에이구 참, 그녀가 그 실로 그릇 닦는 수세미를 다 짜서 보내줄 테니 지인들과 나눠 쓰란다.
멜론은 회사 사모가 주는 거라고 했다.
그녀가 힘 있게 말했다. “이 나이에 월 삼백 받으면 나 괜찮은 거 아녀?” 나는 어머 부럽다며 놀랐다.
그녀도 얼른 들어가 일을 해야 하고 우리도 얼른 떠나야 했다. 내리려고 차 문을 여는 그녀의 상의 주머니에 명절 비용 봉투를 넣어주었다.
그녀가 빗속을 달려 공장으로 들어가고 우린 차를 돌려 또 달렸다.
서준이가 말했다. ‘일 근육’이라는 게 있다고.
고모가 지금 이렇게 많은 급여를 받으며 일하는 건 처음부터 요령 피우지 않고 힘든 일을 견뎌왔기에 가능한 거라고, 일 근육이 하루아침에 붙는 게 아니라고, 딴딴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서준이도 신입 사원 때 사무실 바닥 카펫에서 책 베고 누워 잠시 눈 붙이고 일어나 밤새워 일하던 과정을 견디었기에 그때 붙은 일 근육으로 지금 안정되게 일하고 있단다.
웬 비가 그치지도 않고 이렇게 계속 내리냐며 남편이 자주 말했다.
일찍 떠났기에 도로는 막히지 않고 잘 빠졌다.
달리는 중간중간에 시동생이, 작은 시누이가, 큰 시누이가, 빗길에 도로가 막히지 않고 잘 가고 있는지 전화로 물었다.
크게 앞서가는 형제도 처지는 형제가 없이 다 비등하게 살아가고 있음이 다행이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한 형제, 퇴직 후 공부를 끝내고 다시 기술을 배워 새 사업에 성공 중인 형제, 이 나이에 직장에서 인정받아 월급을 많이 받으며 일하고 있는 형제.
모두가 힘차게 오른 제2의 도약에 성공하고 있다.
사십 년 전에 남편과의 결혼으로 그들을 만났고, 어느 형제와는 삐딱한 관계도 거치면서 지금까지 만남을 이어왔다.
어느 결엔가 이미 내 안에 들어와 마음에서도 형제가 돼있는 그들과의 관계를 잘 가꿔가는 것.
내 여생 제2의 도약은 이것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