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밭 아낙의 손끝 놀림은 얼마나 야문지.
반면 나의 손끝 놀림은 왜 이리도 둔한지.
늦잠을 자고 일어나 밭으로 나갔다.
옆 밭 아낙은 일찍 나와서 호박잎을 따다 로컬마켓에 내려고 포장 중이었다.
여러 장의 호박잎을 거꾸로 들어 줄기 쪽을 잡고 키 맞춰 잘라 비닐 포장지에 살살 밀어 넣고 나서 봉지를 똑바로 세워 양 쪽을 잡고 흔드니 호박잎들이 초록 다리를 세우고 병렬로 섰다.
날씬한 다리로 키 맞추고 서있는 호박잎들이 얼마나 예쁜지.
앉아서 작업하는 그녀의 손놀림을 서서 바라보던 나는 예술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
지난봄에 거름기 많은 밭 한 편에 호박 모를 수북하게 부어 놨더니 그것이 쑥쑥 자라 나무를 타고 올라가기도, 늘어지기도 하며 싱싱한 호박넝쿨을 많이 선물했다고, 여름부터 매장에 여러 봉지씩 내고 있는데 낼 때마다 완판 되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나도 지난봄에 저 아낙처럼 밭 한 편에 호박모를 많이 부어놓을 걸, 생각하며 우리 밭으로 왔다.
있는 것만으로 이제라도 내볼까?
나는 울타리를 돌며 울타리 윗길을 기어 다니기도 하고 처져서 흔들거리기도 하는 호박잎을 상태 좋은 것만 똑똑 따서 사각 바구니에 담았다.
그녀는 벌써 매장으로 떠난다고 했다. 먼저 다녀오시라며 보내고 나는 호박잎을 더 땄다. 생각보다 많이 딸 수 있었다. 큰 사각 바구니에 수북하도록.
그것을 농막 탁자 위에 쏟아놓고 줄기 쪽을 차곡차곡 모아 잡고서 그녀처럼 키 맞춰 잘라 그녀가 넣은 양만큼 계량해 그녀처럼 봉지에 찬찬히 밀어 넣었다.
그녀처럼 봉지 양 옆을 잡고 살살 흔들어도, 다시 봉지 안으로 손을 넣어 다리를 나란히 세우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위쪽에 있는 잎사귀 뭉치가 자꾸 옆으로 누웠다. 따라서 줄기는 반대편으로 쓰러졌다. 손끝은 야물게 타고나지 않으면 모방조차도 어려운 모양이다.
나는 한숨 쉬며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순간 오래전에 시장 입구에서 야채를 팔던 할머니가 생각났다.
손님이 야채를 살 때 할머니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봉지에 풋고추 너덧 개를 꼭 덤으로 넣어주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된장찌개에 넣을 고추를 따로 사지 않아도 돼서 기분이 좋았었다. 할머니의 인심 때문인지 그 노점은 늘 손님이 많았다.
나는 비닐하우스로 가서 찬바람에 이젠 더디 붉어질 초록 고추를 따다가 열두 개씩 호박잎 봉지에 넣었다.
매장에 도착하니 옆 밭 아낙은 호박잎 여러 봉지 진열을 이미 끝내고 매장을 떠나 없었다.
나는 그녀가 내놓은 가격을 살피고 같은 가격에 클릭했다. 그런데 호박잎과 초록 고추가 같은 색이어서 손님들 눈에 고추가 바로 눈에 띄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표 품종란에 '호박잎'이라 쓴 다음 설명을 덧붙였다. ‘(고추는 덤)’이라고.
그녀의 것과는 멀리 떨어진 반대 편 매 대에 우리 것을 진열했다.
농사엔 쓸데가 없는 가을비가 그치지 않고 내렸다. 잦은 비로 습해진 땅에서 자라고 있는 김장배추에 무름 병이 찾아와 배추 몇 포기를 뽑아서 버렸다.
이렇게 질긴 비는 처음이라고, 어쩜 이렇게 쉬지도 않고 며칠을 내리 오는 거냐고, 하늘이 종일 나와 남편에게 원망을 들었다.
그녀가 장어를 가지고 우리 밭으로 왔다. 동행한 그녀의 남편 손에 산삼주도 들려있었다. 추석에 선물로 들어왔단다.
농막에서 장어파티가 열렸다.
팬에 열을 가하고 남편이 장어를 올렸다.
찍어먹을 여러 소스와 소금, 집어먹을 초 마늘, 생강 팩을 뜯으며 요즘은 참 편한 세상이라고 서로 말했다.
그들 밭에서 뜯어온 여린 상추와 미나리도 씻어서 같이 놓았다. 나는 찐 떡과 함께, 배를 깎아 잘라 접시에 담아 내놓았다
모두 건강하자는 건배사를 하고 추석 명절 보낸 이야기, 이 비에 물웅덩이가 더 깊어진 앞 길 도로의 포장이 자꾸 늦어지는 이야기 등을 나누었다.
남자가 생마늘을 찾았다. 까놓은 마늘이 없다고 하자 그가 안 깐 거라도 있으면 한 통만 까라고 했다. 장어는 생마늘과 꼭 같이 먹어야 제 맛이라고.
내 손끝 무딘 거야 타고났을 테지만, 가끔 겪는 그의 무례는 참.. 그의 어느 생활의 긴 과정 중에서 고착됐을 거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남편이 일어나 바깥 기둥에 걸려있는 마늘 한통을 따다가 까서 씻어 저며 작은 접시에 담아 내놓았다.
추수철이 되니 새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극성이라고 아낙이 말했다. 남자가 새들이 처남, 처남댁까지 데리고 다니나 보다고 말했다.
저녁 7시가 조금 넘었다.
하루 판매가 끝난 로컬마켓에서 보내는 web 발신이 뜰 시간이다. 그녀도 나처럼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그녀가 휴대폰을 열었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늘 한 봉지도 남지 않고 다 나가던 호박잎이 오늘은 두 봉지밖에 나가지 않았다고.
남자가 아마 명절 끝이어서 그런가 보다고 말했다.
나는 잘 구워진 장어 한 토막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고 가만가만 먹었다.
아낙이 남자보다 농사에 더 고수이다 보니 알려줄 말이 많고 몸집이 큰 남자는 아낙의 말에 자존심이 상해 예정에 없는 큰소리가 자주 난다.
들깨를 베거든 말릴 때 위에다 비닐 씌우지 말라고, 비닐을 씌우면 습할 경우 바람이 안 통해 들깨가 썩어 쭉정이만 남는다고 아낙이 말했고 남자는 내 어련히 알아서 할까 또 잔소리한다고 화를 냈다.
그때를 틈타 나는 살그머니 휴대폰을 열어 로컬마켓에서 나에게도 보냈을 매상을 들여다보았다.
호박잎 여러 봉지가 다 팔렸다는 소식이 들어있었다.
그들이 다투는 화제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었다. 그러게 거름도 주는 시기가 따로 있다고, 너무 어린싹일 때 주면 안 된다고 걔들이 어느 정도 땅 내를 맡고 적응한 후에 줘야 한다고, 제발 내 말 좀 들으라고.
당신이 나 아니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줄 아느냐, 그동안 고랑은 누가 팠고 고랑에 비닐은 누가 씌웠냐!
나는 그들 싸움에 신경 쓰지 않고 팬 위에서 노릇노릇 잘 익은 장어 한 토막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끈적거리는 복분자 소스에 찍어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으며 생각했다.
아낙이 낸 여러 봉지의 호박잎을 두 봉지만 팔리게 하고 나머지 여러 봉지를 그대로 남게 한 범인은 사람이 아니라 네 개의 활자일 거라고.
‘고추는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