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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약(3)

by 개울건너

돌아보면 나는 비겁했다.

고자질을 자주 했으니까.

초등학교 4학년 때 늦은 겨울날 태자네 바깥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우리 집 사랑채에 세 들어 사는 동갑내기 기성이가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높이 쌓아놓은 볏짚 더미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그 거대한 볏짚에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동네 어른들이 몰려와 물을 길어 나르고 불을 끄느라 그 큰 동네가 난리가 났다.

불이 난 장소에서 가까운 우리 집에서도 동네 사람들이 드나들며 물을 받아 나르고 있었다. 나는 그 틈에 그의 엄마에게 가서 기성이가 낸 불이라고 전했다. 펌프질 하던 기성이 엄마의 손과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날 저녁 기성이는 그의 엄마에게 오래 맞았다.



이십 대 초반이었다.

오빠와 연애를 하며 혼담이 오가던, 나하고 동갑의 아가씨가 있었다. 오빠와 그녀가 얘기를 나누던 중에 그녀가 작은언니를 이름과 함께 ‘걔’라고 칭하는 소리를 들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성깔 사나운 작은 언니에게 그녀가 언니 이름과 함께 ‘걔’라 하더라고 일렀다. 언니가 막 벗은 코트를 방바닥에 패대기치더니 오빠와 같이 있는 그녀에게 갔다.

“야, 연경이 니가 지금 내 올케라도 돼 있는 줄 알아? 이 건방진 기지배가!” 소리쳤다. 나는 언니 뒤로 숨었고 연경인 오빠 뒤로 숨었다. (몇 달 후 연경이는 우리 집안에 다른 큰 잘못을 저질러 나의 올케언니가 되진 못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또 다른 내가 말한다.

‘기성이의 비밀을 지켰어야지, 상에 비밀은 없으니 남에 의해서라도 어련히 알려질까, 니가 기성이 엄마에게 성급하게 한 고자질은 잔인했잖아.’

‘그날 연경이가 한 말도 언니에게 일러바친 건 비겁했어. 연경에게 니가 직접 말했어야지.’

실은 부끄러운 기억 중 그나마 약한 예화를 들었을 뿐 더 컸던 실수의 이야기는 차마 이 여백에 고백 못하겠다.




이웃 텃밭 주인들과 함께 텃밭 앞 좁은 농로를 포장해 달라는 요청 서류를 면사무소에 넣은 지 여러 달이 지났다.

이제야 도로포장에 대한 설명회가 있다는 전갈을 받고 면사무소로 갔다.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직원들 출근 시간은 아직 멀었고 텃밭 이웃들도 올 시간이 되려면 더 멀어있어 그곳엔 나 혼자였다.

신축한 건물에 옅은 핑크빛 천 커버의 의자가 흰 탁자와 함께 여러 군데 놓여있는, 아늑한 일층 휴게실을 왔다 갔다 하며 둘러보았다.

가을 속을 걸어 들어왔으나 창 너머로 보이는 저편 가을은 더 구체적이었다.

휴게실 한 편에 비치된 책에 차례로 눈을 주었다.


만나기로 한 친구를 무리 속에서 찾으려면 세월을 꽤 먹은 사람들 얼굴 중에서 살펴야 하는 나이가 되어있다.

관계 속에서 버둥대며 살아내느라 애쓰던 나의 삶은 나름 고됐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썼으나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에 중년이 돼서야 눈을 떴다.

반으로 갈라진 대가족 안에서 이쪽 편 가족들이 나를 잡고 하소연할 때 그들에게 “응 그려, 맞다 맞어!” 맞장구치다가 저쪽 편 가족들이 부르면 쪼르르 저쪽으로 달려가 그들의 하소연을 듣고 “오오 그러네, 내가 떠나온 저 쪽이 잘못했구먼!” 양 편을 다 들어주다가 나중엔 결국 ‘이중간첩’이라며 양쪽에서 던지는 돌을 다 맞아야 했으니까.

두 편으로 나뉘어 있을 땐 혼자 중립을 지키는 것도, 어느 한쪽 편이 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대가족이 모였을 때 친정집은 자주 가족들이 벌이는 격투장이 되었으므로.

삶은 이래도 힘들고 저래도 복잡하다.


이젠 무시로 찾아드는 실수의 기억에서도, 관계의 힘듦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자연 이야기에 마음이 간다.


면사무소 휴게실 책장에서 도종환 시인의 산문집을 꺼내 들었다.

숲 속에서 거주하며 지내는 시인의 글 속에서 풀냄새를 맡았고 풀벌레 소리를 들었다. 그곳엔 계절 따라 어떤 꽃이 피는지 숲의 풍광을 상상하고 문장과 단락의 구성도 같이 살피며 읽었다.

커피 생각이 났다.

다시 둘러봐도 커피는 보이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여인을 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가서 이곳 어디에 커피가 있는 지를 물었다. 그녀는 아.. 여기 커피는 없는데.. 하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곤 자기 자리로 들어갔다.

그녀가 종이컵과 커피 한 봉지를 가져와 건네며 물이 있는 장소를 일러주었다.


커피와 함께 도종환 숲에 더 머물던 중 번뜩 생각이 스쳤다. 잠시지만 그녀에게 받은 마음을 소문내고 싶다고, 말은 아껴야 하지만 훈한 고자질은 많이 할수록 좋은 거라고.




그날 밤에 군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칭찬방’에 글을 올렸다.

<00 면사무소 이경란 님 고맙습니다.>

목마른 이에겐 물이, 커피가 마시고 싶은 이에겐 커피가 생명수겠지요.

오늘 아침에 제가 받은 관심으로 따뜻해져서 이 글을 올립니다.

저는 00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이웃들과 함께 비포장의 텃밭 앞 좁은 농로를 포장해 주십사 하고 몇 달 전에 요청 서류를 넣었더랬지요.

그것에 관한 설명회가 아침 9시 30분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면사무소에 갔어요.

도착하니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혼자 넓고 쾌적한 일층 휴게실로 가서 그곳에 비치돼 있는 책을 꺼내 읽었지요.

커피가 마시고 싶어 졌어요. 출근 시간은 아직 멀었는데 어느 분이 지하 계단에서 올라왔어요.

그분에게 다가가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하나 물었지요.

그분이 잠시 서서 아아... 하더니 그분 자리로 들어가 커피와 종이컵을 갖다 주었어요. 그리고 온수가 있는 장소도 일려 주었지요.

종이컵에 커피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붓고 커피를 마셨습니다.

비 온 뒤 쌀쌀해진 아침에 마신 그날의 커피가 저에겐 생명수였지요.

저는 그분의 성함이 알고 싶어 졌어요.

그분에게 가서 물었지요. 저에게 주신 따뜻한 관심을 군청 홈페이지에 올리고 싶다고.

그분이 손 사레를 치며 이름 알려주기를 계속 사양하셨어요. 제가 고집스럽게 자꾸 물어서 '이경란'님이란 이름을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직급은 물어보지 않아서 그분의 직급은 모르겠네요.

커피 한 봉지 건네준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경란 님의 발걸음엔 상대방이 원하는 걸 그냥 지나치지 않은 관심과 배려, 역지사지의 마음이 함께 한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인생에서 삶의 강물에 얹혀 흘러 흘러가다가 누군가의 선행을 받는다면, 본다면, 그 이야기 씨앗 한 알 다른 누군가의 문 앞에 심어놓고 나오는 것, 그것이 내 여생의 도약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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