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익은 겨울 11월이다.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있고 새로 시작하기엔 늦었고, 포기하기엔 미련이 남아있는 지점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늦었다는 생각을 했다. 수학이 너무 어려운데 지금 기초를 다지기엔 늦었지, 일 학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잘할 수 있을 텐데.
중학교 졸업 때 오빠에게 통기타를 선물 받았다. 기타를 조금 만지다가 벽에 걸어둔 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기타를 배우기엔 너무 늦었지, 그때 바로 배웠어야 했는데..'
1990년 11월 1일 가을 가수 김현식이 세상을 떠나자 그가 부른 노래 ‘내 사랑 내 곁에’가 전국을 강타했다.
좁은 욕실에서 쪼그려 앉아 빨래를 비비다가 벌떡 일어났다. 작은 아이를 포대기로 끄려 업고 발목까지 올라오는 은행잎을 발로 차며 걸어 상가로 가서 그 노래 테이프를 샀다.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이어 간주로 나오는 바이올린 선율이 얼마나 가슴에 휘감기던지.
나는 아쉬워했다. 서른두 살이던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젊었다면 바이올린을 배워 저 멋진 곡을 연주할 텐데, 지금은 너무 늦었지.’
흘러간 날들은 떠나보내고 남은 날들은 푹신할 삶으로 가꿔가겠다고 마음먹는 때가 11월이 아닐까.
수학을 못해 일학년으로 되돌아가지 않았어도, 기타를, 바이올린을 배우지 않았어도 내 삶은 그대로 고마웠다.
열두 달이라는 한계를 지어놓고 계획한 일을 올 십이월까지는, 겨울 안에는 끝내야 한다며 스스로 초조한 마음을 불러들였지.
삼월도 팔월도 가을도 겨울도 달과 계절일 뿐, 시작과 끝은 없지 않은가.
내일은 비가 온다는 예보다.
비가 그치면 추위는 더 바짝 다가와 있을 것이다.
추워진다고,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걸음을 재촉할 일도 아니니 가던 길 천천히, 이대로의 속도로 그냥 걸어야지. 하루하루 연결되는 날들이 겨울이 되고 다시 봄을 만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