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치다. 지독히도 어마어마하고 지긋지긋한 길치다. 길눈이 어두운 보통의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더욱 고약한 이유는, 개뿔 아무것도 모르면서 걸음은 또 빠르기에 어느 순간 돌아보면 항상 앞장서서 걷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같이 걷는 일행들까지 미궁에 빠뜨린다는 것이 참 사나운 점이다.
어느 정도 길눈이 어두운가 하면 큰 지하철역에서 출구를 못 찾는다거나 대형 쇼핑몰에서 몇 번이나 같은자리를 맴도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심지어 찜질방이나 사우나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나의 길치능력(?)은 군대에서 크게 발휘된 적 있다.
장교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을 때는 독도법(讀圖法)이라는 과목을 수료해야만 한다. 독도법은 말 그대로 지도를 읽는 방법이다. 그 취지에 맞게 3인 1조로 결성하여 지도 한 장을 가지고 오후 6시에 출발하여 산속에서 각각의 임무를 수행 후 목적지까지 무사 귀환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중간중간 교관들이 배치되어 있지만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루트로 갔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경로를 벗어나면 그때부턴 생존과 직결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조는 그날 6시에 출발하여 다음날 새벽 5시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비까지 오는 날이라서 거의 나라 잃은 몰골을 한 채로 제일 마지막으로 복귀하여 성적과 자존심 모두를 잃었던 날로 기억한다. 그때의 교훈으로 임관 후 소대장 임무를 수행할 때는 내 평균 이하의 능력 때문에 소대원 모두를 고생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대열의 선두에서 길을 만들어야 하는 경우에는 다른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눈에 불을 켜고 임무완수를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고통받는 이가 한 명 있는데, 바로 아내이다. 아내는 아직까지 조수석에 타서 몇 번이고 화를 삭이며 나에게 길을 안내해 준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에게 내비게이션은 단순히 길 찾는 기계가 아닌 생존의 동반자 정도까지 격이 올라간다. 이 인류 최대의 기술력이 없었다면 나는 운전은커녕 행동반경이 지금의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을 것이고, 만약 전국지도를 가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간다고 가정한다면 아마 자전거보다 늦게 도착할 수도 있다는 추측이 무리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내비게이션은 나에게 편리함을 넘어 정상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과학이자 발명품이다. 그리고 언제든 떠날 수 있고 어디서든지 원하는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는 충만한 자신감의 원동력이다.
길을 잃어본 사람들은 안다. 등골이 서늘하고 식은땀이 흐르는 상황에서 구조를 바라지만 불가능하다면, 길을 찾을 수 있는 작은 단서나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는 한 사람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하는 간절함을 말이다.
그런데 길을 잃는다는 것은 인생이라는 과정에서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이벤트이다.
어느 날 문득 하루하루에 집중하다가 인생의 긴 여정에서 길을 잃었다는 불안감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면, 자신만의 내비게이션을 작동시켜보자.
본래 목적지가 정해져야만 움직이는 시스템이기에 그곳만 올바르게 찍어놨다면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이다. 길을 잃은 자리에서 잠시 멈춰서 나는 지금 나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들어보자.
곧 비포장도로에 진입할 테니 주의하라고 하는가?
이제 고속도로가 나오니 안전띠를 조여 매라고 하는가?
차라리 조금 더 가서 유턴하라고 하는가?
적어도 못들 은척 하거나, 내비게이션을 아예 꺼버리는 오래 못 가서 후회할 행동은 하지 말자.
어떤 핑계를 대고 혼란스러움을 어필해도 어차피 자기 자신은 본인이 제일 잘 안다는 것도 부정하지 말자.
나 같은 구제불능의 길치도 내비게이션만 있다면 어리바리하고 우왕좌왕하겠지만 꾸역꾸역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다. 바로 그 점에 집중하자.
길을 잃었어도 내면에 귀를 기울인다면 언젠가 도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
우리는 겁부터 먹고 불필요한 행동들로 체력과 정신력을 낭비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내비게이션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길을 잃었을 때, 비로소 진가를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