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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정 Apr 27. 2023

그림책<내가 라면을 먹을 때>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내가 라면을 먹을 때>> 하세가와 요시후미, 고래이야기

요시후미가 그린 동화책은 그림체가 참 유쾌합니다. 표지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침이 고입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 그릇을 한 소년이 들고 있습니다.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지요. 기대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어요. 글도 한 두 줄로 무척 짧은 동화입니다. 소년은 라면을 먹으며 생각합니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 옆에서 방울이는 하품을 한다.” 

소년 옆에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는 고양이가 보입니다. 장면은 이웃집으로 이어집니다. 

“이웃집 미미는 텔레비전을 돌린다. 이웃집 미미가 텔레비전을 돌릴 때.”

미미가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고 있을 때 이웃집에 사는 디디는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고 있지요. 

이제 소년의 생각은 이웃에 사는 친구들에서 이웃나라로 확장됩니다. 이웃나라 여자아이는 아기를 업고 있고, 같은 순간 이웃나라 남자아이는 소를 몰고 있습니다. 소를 모는 아이 맞은편 나라에서는 여자아이가 수레를 끌며 빵을 팔고 있습니다. 같은 때에 산 너머 나라 남자아이는 쓰러져 있습니다. 쓰러진 아이는 꼼짝을 않습니다. 다음 장에서도 아이는 아무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 위로 바람이 붑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라면을 먹고 있는 아이 집 창에도 바람이 붑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책장을 열 때만 해도 설레던 마음이 금세 먹먹해집니다. 입에 고였던 침에서 쓴 맛이 났어요. 몇 장 안 되는 그림책을 읽는 동안에 말이지요. 

가족과 함께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때 세상 곳곳에서는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가난에 굶주리는 아이가 있고, 전쟁의 포화 속에서 울부짖는 아이가 있습니다. 치명적인 상처에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아이도 있겠지요.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상황에 있지만 우리 모두는 같은 해 아래 살고, 같은 바람을 맞고 사는 ‘우리’ 아니냐고요. ‘우리’라는 말이 넓어지게 하는 품이 넓은 동화책입니다.  

몇 해 전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읽었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우리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력한지 탄식하는 책이었어요. 그럼에도 한 가지. 가까이 또는 멀리 고통당하는 자들을 생각해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해주었습니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숙고해 보는 일이 뒤로 물러서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옛 성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와 동시에 누군가를 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고통이 나의 행복과 연결되었다는 생각. 나와 타인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서 내가 맘껏 가지면 누군가는 못 가질 수 있다는 미안함. 그런 연민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적어도 타인을 치명적으로 아프게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소년처럼 자주 상상해야 합니다. 그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특징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이 회복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도록(롬12:15) 만드셨습니다. 세상 곳곳이 신음소리로 아직도 겨울입니다. 함께 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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