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빠진 미신, 프레임

우리는 여전히 미신을 믿는다 – 이름만 프레임으로 바뀌었을 뿐

by 김욱

합리적 인간이라는 착각


우리는 스스로를 꽤나 합리적인 존재라고 믿는다. 기우제를 지내는 대신 인공위성 사진을 분석하고, 질병이 닥치면 굿을 하는 대신 백신을 찾는다.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21세기에 '미신'은 박물관에나 어울리는 낡은 유물처럼 보인다. 현대인들은 확신한다. "나는 미신 따위에 의존하지 않아."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과거 선조들이 불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의 뜻을 점치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현대인들은 '과학'이라는 옷만 갈아입었을 뿐, 여전히 '프레임'이라는 이름의 강력한 미신에 의존하고 있다.


현대인은 ‘과학’과 ‘정보’라는 멋진 옷을 입었을 뿐, 여전히 주술적 사고에 쉽게 빨려 들어간다. 우리는 미신을 없앤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갈아치웠을 뿐이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세계의 모습이 사실은 누군가가 정교하게 깎아 만든 현대판 부적 프레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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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바다와 인지적 진통제


미신의 바닥에는 늘 두 가지 감정이 있다. ‘모른다는 불편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원시 인류를 떠올려 보자. 갑자기 벼락이 떨어지고, 멀쩡하던 이웃이 정체불명의 병으로 쓰러진다. 인과관계를 설명할 지식이 없던 그들에게 세상은 이해 불가능한 공포 그 자체였다.


그때 인간이 만든 것이 ‘해석’이다. “하늘이 노했다”, “악귀가 장난을 쳤다.”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이 말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재앙’을 ‘달래야 할 분노’로 바꾸어 준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을, 이해 가능한 이야기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 이유도 모른 채 고통받는 상태를 가장 견디기 힘들어한다. 그래서 인과를 알 수 없을 때, 믿음을 먼저 끌어온다.


그렇다면 과학이 이렇게 발달한 지금, 우리는 무지와 불안에서 벗어났을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겉으로 보기엔 세상이 더 안전해진 것 같지만, 개인이 감당해야 할 정보의 양과 복잡성은 과거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커졌다. 이것이 ‘현대판 무지’의 역설이다.


오늘 당신의 대출 금리가 왜 올랐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가? 단지 “은행 마음대로”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연준의 통화 정책,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문제, 기후 위기로 인한 작황 부진, 각국의 정치·경제 상황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영향을 준다. 경제, 외교, 기술, 환경이 하나의 복잡계를 이루는 시대에는, 전문가조차 “정확한 원인”을 콕 집어 말하기 어렵다. 뉴스는 매일 쏟아지지만, 정작 “세상이 왜 이렇게 움직이는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역시 옛사람들처럼 ‘알 수 없는 커다란 힘’에 떠밀리고 있는 셈이다.


이 불확실성의 바다에서 우리의 뇌는 금방 지친다. 인간의 뇌는 에너지를 아끼고 싶어 하는 ‘인지적 구두쇠’다. 복잡한 인과관계를 하나하나 따지는 일은 뇌 입장에서 상당한 고문이다. 바로 이 틈으로 ‘프레임’이 들어온다. 현대의 주술사가 처방하는 일종의 인지적 진통제다.


프레임은 복잡한 사건을 한 줄 문장으로 바꿔 준다. “경제가 어려운 건 다 저 무능한 정부 때문이다.” “범죄가 는 건 다 외국인 때문이다.” “이 모든 건 특정 기득권 세력이 짠 음모다.”


얼마나 간단하고 시원한가. 수많은 보고서와 통계를 보지 않아도 된다. 프레임 하나만 받아들이면 세상은 선과 악, 피해자와 가해자로 깔끔하게 정리된다.


이 단순한 해석은 불안한 사람들에게 강한 심리적 위안을 준다. 내 고통의 원인이 또렷해지고, 욕할 대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가뭄이 들었을 때 왕의 부덕을 탓하거나, 제물을 바쳐 기우제를 지내며 위로를 얻던 것과 기능이 거의 같다. 기우제가 실제로 비를 내리게 하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의 불안을 달래 주었다. 오늘의 프레임도 마찬가지다. 문제를 해결해 주진 못해도, “그래도 나는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과 안도감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팩트를 끝까지 확인하는 대신, 프레임을 믿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게 훨씬 덜 힘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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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가리는 현대의 제사장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프레임이 단순히 뇌의 피로를 줄이는 필터로만 작동한다면 그나마 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프레임은 자주 ‘진실을 가리는 장막’으로 쓰인다.


프레임은 투명한 창문이 아니다. 누군가의 이해관계에 맞춰 기울어져 있는 거울이다. 예전의 제사장들이 일식과 천재지변을 ‘신의 뜻’으로 포장해 권위를 유지하고 대중을 통제했다면, 오늘날에는 언론·정치·이익 집단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이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정교하게 짠다. 말 그대로 ‘현대의 제사장’들이다.


이들이 프레임을 만드는 방식은 단순하다. 먼저,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맥락과 팩트를 잘라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대중이 즉각 반응할 만한 감정 자극과 선악 구도를 채워 넣는다.


예를 들어, 복잡한 노사 갈등이 생겼다고 하자. 어떤 언론은 이를 “귀족노조의 이기심”이라는 프레임으로 몰고 간다. 다른 언론은 “악덕 자본의 횡포”라는 프레임으로 밀어붙인다. 그 사이에서 ‘글로벌 경기 침체’, ‘산업 구조 변화’ 같은 구조적 문제들은 자취를 감춘다. 사람들 눈에 남는 것은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악당’의 얼굴뿐이다. 이것은 정보 전달이라기보다, 치밀하게 설계된 감정 조작이다.


더 심각한 건, 대중이 이 조작에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올라탄다는 점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확증 편향’ 때문이다. 우리는 원래부터 “내가 믿고 싶은 것만 진실로 받아들이려는” 성향이 강하다. 유튜브와 SNS 알고리즘은 이 편향을 폭발적으로 키운다. 플랫폼은 당신이 좋아할 만한 프레임만 계속 추천하며, 당신을 ‘필터 버블’에 가둔다.


이제 사람들은 뉴스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얻으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 “내 생각이 역시 맞았어”라는 확인과, 반대편을 욕하며 얻는 카타르시스를 더 중시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중요한 능력인 ‘비판적 사고’는 서서히 기능을 잃는다. 남는 건 ‘편안한 수용’뿐이다.


상반된 자료를 비교해 보고, 반대 입장을 들어 보고, 현상의 뒤쪽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일은 점점 ‘쓸데없이 피곤한 일’로 취급된다. 결국 우리는 누군가 만들어 준 좁은 틀 안에서 세상을 해석하며 안심한다. 굿판을 벌이며 위안을 얻던 과거와, 이게 본질적으로 얼마나 다른가. 과학의 시대를 산다고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프레임이라는 허상을 사이에 두고 세상과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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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을 떼어낼 용기


어떤 사건이나 뉴스를 접했을 때, 설명하기 힘든 분노나 묘한 속시원함이 즉시 올라온다면, 그때가 잠시 멈춰야 할 순간이다. 그 감정은 당신의 이성이 논리적으로 계산한 결과라기보다, 누군가 심어놓은 프레임이 당신의 감정 버튼을 정확히 눌렀다는 신호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반복해야 한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사건 자체인가, 아니면 누군가 다듬어서 내민 틀인가?”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인과관계를 다 알 수 없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이 떠먹여 주는 쉬운 해석에 몸을 맡길 필요는 없다. “나는 모른다”는 상태를 견디면서도, 성급한 결론을 거부하는 태도. 바로 그 태도가 우리를 껍데기뿐인 현대인이 아니라, 조금은 더 깨어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이제 마음속에 붙여 둔 ‘프레임’이라는 부적을 천천히 떼어낼 때다. 세상은 여전히 복잡하고 거칠 것이고, 그 복잡함은 때때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해 보려는 그 한 걸음. 그 용기에서 비로소 진짜 ‘이성적인 현대인’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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