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국과 현수 그리고 채원
벽 앞의 퍼즐
처음 클라이밍 센터에 갔을 때 나는 단순히 몸을 쓰는 운동을 하러 간다고 생각했다. 손으로 잡고 발로 딛고 그렇게 벽을 오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벽 앞에 서보니 그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루트를 바라보며 나는 문득 이게 퍼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색의 홀드는 마치 조각조각 흩어진 단서들처럼 보였고 그 사이를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고민하는 내 모습은 문제를 푸는 사람과 닮아 있었다.
하나의 루트를 마주했을 때 그것은 마치 문제 하나를 받아 든 것처럼 느껴진다. 시작 지점과 끝 지점은 명확하다. 그러나 그 사이를 어떻게 연결할지는 오직 나에게 달려 있다. 눈으로 먼저 동선을 그려보고 가능한 손과 발의 움직임을 상상한다. 그러나 상상은 언제나 벽 앞에서 무너진다. 내가 예상한 움직임이 벽 위에서는 그대로 실현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다시 내려와서 다시 고민한다. 그것은 마치 수학 문제를 풀다가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른 접근 방식을 시도하는 것과도 닮아 있다.
명국과 현수, 그리고 채원
클라이밍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그저 벽 하나만을 생각했다. 손에 잡히는 홀드, 발에 닿는 스텝, 그리고 마지막에 도달하는 탑. 그게 전부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이 운동은 절대 혼자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사실을 가장 처음 가르쳐준 건 명국과 현수였다. 처음엔 루트 하나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어디에 손을 두어야 할지도 몰랐던 날들이 있다.
내 동작 하나하나가 어색하고 높이 올라가는 게 두려웠던 그 시절. 그때마다 그는 크게 뒤에서 말했다. "오른쪽 홀드 오른손으로 잡아봐. 거기서 왼발 딛고 몸을 틀면 올라갈 수 있어." 이 말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었다. 나보다 먼저 겪은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다정한 안내였다. 그는 내가 스스로 깨닫게 될 시간을 존중하면서도 그 안에서 길을 잃지 않게 도와줬다. 명국은 내 루트를 늘 끝까지 지켜봤다.
괜찮아. 너 요즘 많이 늘었어.
실패하든 성공하든. 그는 언제나 벽 아래에서 내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때로는 박수 대신 "다시 해보자"는 짧은 한마디로 때로는 내가 놓친 흐름을 함께 되짚어보며. 그는 나에게 클라이밍이 '함께 생각하는 운동'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가 있어서 나는 벽 앞에서 덜 초조했고 덜 외로웠다. 명국은 내 실수를 가장 많이 본 사람이다.
루트 중간에서 겁이 나 주저앉을 때. 동작이 꼬여 떨어질 때. 한참 벽 아래서만 맴돌 때. 채원은 그럴 때마다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너 요즘 많이 늘었어." 이 말 한마디에 이상하게도 다시 해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나보다 내가 나아졌다는 걸 먼저 알아차렸고 그걸 말해줄 수 있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요즘에는 특히 그런 존재가 생각보다 드물고 귀하다.
클라이밍의 진짜 매력
이 세 사람 덕분에 나는 천천히 클라이밍이란 운동의 진짜 매력을 알게 되었다. 혼자 오르는 것 같지만 결코 혼자 오를 수 없다는 것. 뒤에서 누군가 나를 보고 있고 응원하고 있으며 함께 실패를 기억해 준다는 것. 그 사실 만으로 벽 위에서 큰 위로가 되었다. 함께 클라이밍을 하며 우리는 때로 말없이 응원했고 때로 격하게 기뻐했다. 누군가 완등하면 자기 일처럼 박수치고 떨어지면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다음을 기약했다. 그 순간들이 쌓이면서 우리는 벽을 넘어선 유대감을 만들었다.
클라이밍 센터는 점점 운동 공간이 아니라 서로를 알아가는 작은 세계가 되어갔다. 나는 이제 홀드만으로는 벽을 오를 수 없다. 손과 발 사이엔 사람이 필요하다. 조언해 주고 기다려주고 말없이 믿어주는 사람. 나에게 명국과 현수, 그리고 채원이 그랬던 것처럼.
어떤 홀드를 먼저 잡을 것인지. 어디에 발을 두고 몸을 어떻게 회전시킬 것인지. 모든 게 고민이었다.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수십 번 돌려보았다. '왼손으로 저걸 잡고, 오른발을 저기 올려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올라가 보지만 막상 벽 위에서 그 계획은 쉽게 무너진다. 손은 생각보다 멀고 발은 예상보다 미끄럽다. 당황한 채 중간에서 멈춰버린다. 결국 떨어지고 다시 바닥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또 벽을 바라본다. 이건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다시 문제를 분석하고 다른 접근을 찾아내는 과정이었다.
내가 벽 앞에서 반복해서 느낀 감정은 왜 안 되지?라는 당혹감과, 다음엔 될 것 같아 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뒤섞인 어떤 감정이었다. 실패는 찰나였고 다시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그보다 오래 남았다. 클라이밍이 점점 재미있어진 건 아마 그 순간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단순한 성공보다는 실패 이후의 생각과 시도가 주는 몰입감. 그게 나를 다시 벽 앞에 서 있게 만들었다.
같은 루트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푸는 사람들
인상 깊었던 건 같은 루트를 두고도 사람마다 다르게 푼다는 점이었다. 어떤 사람은 유연하게 휘어서 오르고 또 어떤 사람은 폭발적인 근력으로 끌어올린다. 나와 같은 루트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푸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또 배운다. 이 퍼즐은 해답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클라이밍은 정답을 맞히는 일이 아니라 자신만의 해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특히 내가 자주 실패했던 루트를 결국 완등했을 때의 기분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체력적으로 고된 것은 맞지만 정점에 손을 올렸을 때는 이상하게도 몸보다 마음이 먼저 가벼워졌다. 단순히 '올랐다'는 성취감이 아니라 '풀었다'는 해방감이었다. 내 방식으로 내 몸으로 이 퍼즐을 해결해 냈다는 것이 크게 성취감으로 다가왔다.
퍼즐을 맞추는 사람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클라이밍을 통해 내 성격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나는 실패를 꽤 오래 곱씹는 사람이고 새로운 루트를 시도하기 전에 한참을 망설인다. 그러나 한번 시도하고 나면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운동은 내 안의 습관과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드러냈고 나는 그걸 하나씩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는 벽 앞에 설 때마다 생각한다. 또 하나의 퍼즐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이번엔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나는 여전히 벽을 오르고 있다. 손과 발로, 그리고 생각과 감정으로.
그 벽 위에 놓인 퍼즐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이 과정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묘하다. 좌절감과 함께 찾아오는 흥미.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과 동시에 "이번엔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그래서 클라이밍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벽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전략과 인내, 직관을 끌어올리는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감정과 사고의 흐름은 손끝과 발끝을 통해 현실화된다.
퍼즐을 맞추는 클라이머들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점은 같은 루트라도 사람마다 접근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클라이머는 유연함으로 또 다른 이는 폭발적인 힘으로 또 다른 이는 영리한 무게 이동으로 문제를 푼다. 마치 같은 문제를 여러 방식으로 해결하는 다양한 해답을 보는 것처럼 클라이밍도 개개인의 해석이 반영된 퍼즐 풀이이다.
그리고 이 퍼즐은 실패를 통해서만 풀린다. 첫 도전에서 성공하는 일은 드물다. 실수하고, 미끄러지고, 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나는 나만의 루트를 배워간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반복할 수 있는 사람만이 결국 위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클라이밍은 삶의 축소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계획을 세우고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방향을 고치며 조금씩 올라가는 것. 그래서일까. 정점에 도달했을 때 단순한 성취감 이상이 밀려온다. '이 퍼즐을 내가 풀어냈다'는 실존적 만족감이 컸다.
마무리
처음엔 단순한 운동이라 여겼던 클라이밍이 이제는 내가 나를 이해하고 다듬어가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어떤 벽 앞에서는 두려움을 마주하고 어떤 벽 앞에서는 전략을 짜며 내 사고의 패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한 조각 한 조각 내 삶의 퍼즐을 맞춰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오늘도 나는 클라이밍 센터에 간다. 새로운 루트를 풀기 위해서도 내 한계를 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들과 함께 오르기 위해서. 그들과 함께 나를 조금 더 끌어올리기 위해서.
"오늘도 나는 퍼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이 벽을 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