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에서
나의 그림은 누군가의 해석 없이도
사람의 영혼을 두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귀스타브 모로
꽤 오래전부터 ‘이 화가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마음을 따라 도착한 곳이 바로, 파리 9구의 조용한 골목 속, 낡은 벽돌 건물—모로 미술관이었다.
나는 예술가의 집을 참 좋아한다. 그 집 주인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지만, 그가 앉았던 의자, 조용히 바라보았을 창, 그곳에 머물던 생각은 아직도 공간을 채우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한 파리 (때론 지겹고 따분하지만), 그 파리만 해도 이야기 책에 나올 것 같은 그런 집이 참 많다. 화가 귀스타브 모로의 나선형 계단, 조각가 로댕의 작업실과 정원, 들라크루아의 작은 스튜디오, 빅토르 위고의 거실과 이국적인 벽지들, 사티의 조용한 피아노 방까지. 그 안엔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 때론 말 없는 서사가 가득하다.
사람은 오래전에 떠났지만, 그곳에 머물던 생각과 감정은 그 자리에 전설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공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지금 내 눈 앞에 그 사람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곳에 켜켜이 머물렀던 마음들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떤 장소는 처음인데도 편안하고, 어떤 곳은 잘 꾸며졌는데도 낯설다. 그건 단순히 인테리어나 구조 때문이 아니라 공간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때문일 것이다. 때때로, 어떤 장소는 나를 꿈으로 이끌고, 어떤 창문은 또 다른 곳을 보게 한다. 우리는 다른 시간에 같은 장소를 걷는다. 우연히 그 감정의 매듭을 건드리는 순간, 낯선 풍경 속에서 뜻밖의 진심 하나가 조용히 열린다. 모로의 나선형 계단에 오르자, 마치 마법의 통로에 들어선 것처럼 말이다.
귀스타브 모로,
마음의 뒷골목에서 만난 예술가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는 상징주의 화가다. 모로는 19세기 후반, 인상주의가 대세였던 시절에도 빛과 풍경 대신, 신화와 환상, 인간의 내면을 끝까지 그려낸 고집스러운 예술가다. 그의 캔버스에는 오이디푸스, 살로메, 헤라클레스, 성서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단지 전설 속 존재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고뇌, 욕망, 침묵, 애정의 얼굴을 하고 있다.
상징주의’가 뭔지 정확히 몰라도 웬지 그의 그림은 마음을 복잡하게 흔드는 힘이 있다. 모로는 단지 화려한 그림을 그린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철학을 붓으로 그린 시인에 가까웠다.
모로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 성경 속 헤롯의 딸, 살로메가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이야기다. 모로의 살로메는 단순한 팜므파탈이 아니다. 그녀는 아름다움과 죽음, 유혹과 두려움이 얽힌 복합적 상징 그 자체다. 화려한 장식과 금빛 장신구, 정지된 듯한 장면 속에서 살로메는 마치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감정”처럼 서 있다. 화려하면서도 섬뜩했고, 정교하면서도 혼란스러웠다. 마치 ‘무의식이 그린 성서화’ 같았다. 나는 한참 그 그림을 바라봤지만, 결국 나를 더 오래 바라본 건 그림속의 그녀였다.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이 작품은 모로의 출세작이자, 그의 예술 세계를 단단히 드러낸 상징이다. 그리스 신화 속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를 마주하는 장면. 하지만 모로는 단순한 전투의 순간이 아닌, 지혜와 본능의 팽팽한 대치, 인간 내면의 갈등을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은 어떤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아는 ‘나’는 정말 ‘나’인가?
모로 미술관(Musée Gustave Moreau)은 루브르처럼 거대하지 않고, 오르세처럼 웅장하지 않다. 하지만 단언컨대, 파리에서 만날 수 있는 개인적이고 깊이 있는 미술관 중 하나다.
이곳은 화가가 살던 집 그대로 남아 있다. 침실, 거실, 작업실, 그리고 거대한 전시실. 벽마다 빽빽히 걸린 그림들과, 스케치 수천 점이 수납된 서랍장까지. 모로는 생전에 이 집을 자신의 삶과 예술을 통째로 전시하겠다는 의지로 남겼다.
그리고 여행자들에게 이 미술관은, 유명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장소가 된다. 줄도 없고, 시끄럽지도 않고, 사진보다 느낌을 더 많이 남긴다. 파리는 걷기에 최고인 도시다. 지하철보다 두 발이, 카페보다 골목이, 빠른 이동보다 느리게 바라보는 시선이 더 어울린다. 모로 미술관이 있는 9구는 관광객의 발길이 많지 않다. 샹젤리제의 화려함도, 마레 지구의 힙함도 없다. 하지만 그런 평범함 속에서 문득 마주치는 간판 하나, 작은 현관문, 낡은 벽돌 건물 하나가 여행자에게 진짜 감동을 주는 순간이 된다.
미술관을 향해 걷는 길에는 늘 설렘이 있다. 무엇을 볼지 모르고 걷는 길에는, 생각지도 못한 울림이 따라온다. 모로의 그림은 화려하고 복잡하고, 한눈에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마음의 여유를 갖고, 오래 들여다보면, 마침내 그 안에 감춰진 이야기와 상징이 서서히 말을 건다. 모로는 단지 시각적 회화를 넘어, 인간의 마음에 있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색과 선으로 풀어낸 철학자였으니까!
나는 눈이 아니라, 정신을 위한 예술을 그린다.
모로의 그림을 보면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라는 질문이 든다. 그림은 가만히 있는데, 내 마음만 소란해진다. 아마도 그게 예술의 힘일 것이다. 말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건드리는 능력. 눈이 아닌 정신을 위한 작품.
모로는 내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마주하고 있나요? 그 질문 하나면, 오늘의 미술관 관람은 충분하다. 파리에는 수백 개의 미술관이 있고, 길 위엔 셀 수 없는 작품과 장면들이 있다. 하지만 마음을 흔드는 건, 늘 그리 크지 않은 것들이다. 작은 문을 열고, 조용한 방에서, 말 없는 그림과 마주할 때.
여행이란 결국, 누군가의 인생을 잠시 빌려보는 일이 아닐까.
그날 나는 구스타브 모로의 눈으로 내 마음을 다시 그려보았다.
당신의 지나간 시간들을
맘속에 빛나는 무언가로 남겨두어요.
귀스타브 모로 뮤지엄 :
위치: 14 Rue de la Rochefoucauld, 75009 Paris (Saint-Georges역 인근)
운영시간: 수~월 10:00–18:00 (화요일 휴무)
입장료: 성인 7유로, 26세 미만 무료. 파리 뮤지엄 패스 사용 가능
포토 스팟: 나선형 철제 계단, 3층 대형 캔버스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