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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왕자 Sep 08. 2024

어? 내가 간병인이라고? (上)

아버지와의 이별 그리고...


"아버지가 암일지도 모른다구요?"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아버지가 암이라는 소식에 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온갖 매스컴 등에서 암에 대한 이야기를 수시로 들었고, 내 주변에서도 간혹 암에 걸렸다는 말은 들은 적은 있었지만, 내 가족이 암이라는 덫에 걸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암에 걸렸다는 말을 하는 어머니의 음성이 마치 딴 세상에서 울려펴지는 것과 같이 나의 귓가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내 귓속을 들어와 내 뇌에 전달되어야 하는 소리들이 내 귓바퀴를 통해 다시금 허공으로 날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믿을 수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당장에라도 아버지가 어떻게 될 것 같았고, 또한 낫더라도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거는 아닌가? 하는 막연하고 불길한 생각만이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내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시점에는 아버지가 거동에 문제가 전혀 없었던 상황이라 어머니와 같이 병원에 진료를 갈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고, 아버지의 암이 확실하지도 않았던 시점이었기에 내가 굳이 가서 뭘 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대학병원에 의뢰한 조직검사의 결과가 암이라 것이 맞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난 바로 집으로 내려왔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고 이제부터 수습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대학병원에서 치료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가족이 모인, 가족이라고 해도 아버지, 어머니, 나 밖에 없었지만, 자리에서 내가 말을 뱉었고, 부모님은 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 주셨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지역 내 종합병원에서는 대학병원에 치료하겠다는 말에 자신들의 상급병원이기에 섭섭하다는 모습보다는 오히려 좋은 결정이라고 하면서 더 적극적으로 대학병원에서 치료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었고, 심지어는 교수님까지 연결해 주었다.


대학병원에 가자마자 아버지는 바로 입원하였고, 정말 많은 검사를 받았다.


"림프암이고, 항암치료로 완치 가능한 수준이고, 서울 어디 병원을 가더라도 치료방법은 같으니 여기서 치료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네요."


자신감에 가득 찬 교수님의 말을 듣고 우리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면서 난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이제까지 받았는지 대충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소화가 잘 안되는 것으로 병원을 찾았고, 그 증상이 잘 낫지 않자 담당 의사가 암일 수도 있으니 큰 병원에 가볼 것을 추천했다는 거, 그리고 종합병원에서 암인 것 같다는 말을 들었던 거.


이렇게 글로 쓰니 두줄에 모든 것이 정리될 정도로 짧지만, 아버지의 고통은 심히 긴 시간이었던 것이었고, 그 고통을 홀로 지고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니셨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 그런 일이 생겼으면 미리 전화를 주시지 그랬어요."


난 당시 이야기를 들었어도 별 도움이 되지도 못했을 거면서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에 괜히 말을 던졌다.


"너희들 걱정할까봐."


항상 그러셨다.

아들들이 걱정할까 무슨 일이든 해결이 되고나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부모님이셨고, 이번에도 그랬던 것이다. 


"......"


난 아버지의 말에 단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난 마음 속에서 은연 중에 부모님의 문제는 미리 듣기보다는 해결이 되고 나서 듣고 싶었던 것 아니냐는 것에 대해 강하게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항암치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항암제도 아버지에게 잘 맞았고,

교수님도 완쾌에 대한 확신이 가지고 아주 적극적인 치료를 해주었고,

아버지의 암도 말기도 아닌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암에 대한 저항력이었다.


아버지는 암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이기겠다는 강한 결심을 가지신 듯 보였다.

아버지는 먼저 교수님이 다른 환자에게 머리카락을 자르라고 했다고 하면서 본인도 자르고 치료를 받겠다고 하면서 삭발을 하여 교수님이 보고서 아주 흡족해 하면서 완쾌의 의지가 있다고 칭찬을 할 정도였고,

교수님이 보자고 할 때 바로 볼 수 있도록 병원 근처에 원룸을 잡아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아버지는 암에 대해서 완쾌의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체력도 아버지의 결심을 받쳐줄 만큼 강했던 것도 있었다.

아버지는 70대가 넘어도 세상 누구와 힘겨루에서 질 자신이 없다고 할 정도로 체력적으로 한결같이 강한 면이 있었다.



"완전히 완쾌되었네요. 5년에 한번씩 하는 검사를 안해도 될 정도네요. 좋네요."


"아~!"


교수님의 말에 우리 가족은 기쁨과 안도의 탄성을 질렀고, 아버지의 모든 불행이 끝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후로 1년만에 돌아가셨다...


난 아버지를 대전 현충원에 묻으며 눈물로 땅을 칠 수 밖에 없었다.

내 무지로 인하여 오래 살 수도 있었던 아버지가 이렇게 빨리 돌아가신 거라는 자책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었다.



"급성 간염으로 인한 합병증"

아버지 사망 원인이었다.



항암제를 쓰게 되면 몸 속에 있는 모든 병균을 죽이게 된다.

그게 암처럼 나쁜 병균일 수도 있고, 몸의 균형을 이루게 도와주는 좋은 병균일 수도 있다.

항암제는 그러한 모든 병균을 죽임으로서 몸 속의 모든 균을 하얀 도화지처럼 리셋을 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항암치료를 끝내고 나면 사후 관리가 대단히 중요한데, 난 그 부분을 망각하고 있었다.

1년 정도 몸에서 충분히 좋은 균을 보유할 때까지 잘 관리 후 밖의 생활을 해야 하는데, 우리들 중 그 누구도 그 사실에 대한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고, 아버지는 병이 완쾌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완전히 일상적인 생활, 즉 사람들과 모임을 하고, 다 같이 운동을 하고 어머니와 시장과 마트를 다니는 삶을 살았던 것이었다. 그것도 코로나가 아주 유행하던 시기에 마스크 따위는 개나 줘 버리라는 마인드로 말이다.


당연히 아버지 주변의 병균들은 '앗싸~'하는 생각으로 아버지 몸속에 아주 자연스레 들어오게 되었고, 그 중, 그 많고 많은 병균들 중 간염이 아버지 몸에 슬그머니 들어와 서서히 아버지 몸을 지배하기 위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시작은 황달이었다.

황달은 솔직히 몸에 당장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기에 부모님은 그 심각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고, 눈이 노랗게 변한 것만으로 아버지는 병원에나 가보자는 생각으로 원래 다니시던 종합병원에 가게 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죽음의 서막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병원에 가자마자 아버지는 바로 입원 조치되었다.

지금 보면 당연한 조치였지만, 당시 부모님은 황당하게 생각하셨다. 눈이 좀 노래서 온 것 뿐인데, 또 입원을 하라고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입원생활에 대한 엄청난 거부감이 있던 분들이니 얼마나 놀라셨겠는가?


부모님은 병원생활에 대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계셨다.

맛없는 밥, 주변의 소음, 통제된 생활 등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서 아버지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심지어는 간염이 심해졌을 때도 입원을 안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신 적도 여러번일 정도로 싫어하셨다.


결국 또 그 종합병원에서는 간수치를 잡지 못하여 또 대학병원으로 옮겼고 그곳에서도 쉽사리 잡지 못했고, 심지어는 복수가 차면서 아버지의 건강상태는 극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아버지는 복수를 강제적으로 빼는 시술을 받았고, 물을 빼는 것은 최악의 방법인 것을 알았지만, 아버지는 완쾌보다는 당장 편한 것을 선택할 만큼 이번엔 암 치료때와는 달리 의지가 없었다.


아버지 입장에서도 얼마나 억장이 무너질 이야기겠는가?

그 무서운 암이라는 산을 넘어섰는데, 자신이 또 이겨내야 하는 거대한 산을 다시 눈 앞에 만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더이상 그 산을 넘을 용기도 체력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몇 달에 걸쳐 의지만 계속 꺽여가면서 결국 돌아가셨다.

복수에 물을 강제적으로 빼기 시작하면서 어머니와 난 마음의 준비를 하였기에 돌아가신 것에 대한 충격은 아주 크지는 않았다.

당시 교수들도 복수라는 것이 장기에서 나오는 물인데, 그 물이 몸이 회복하면서 서서히 장기로 다시 녹아들게 해야지, 그것을 강제적으로 빼는 것은 매우 좋지 않으며, 일시적으로 치료를 위해서나 급한 사정이 생겨 한 번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저렇게 계속적으로 빼는 건 결국 사망할 수 있다고 했고, 번외적으로 그렇게 된 환자들의 생명이 1년 정도라는 말도 들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우리 곁을 떠난 것이었다.

아들의 무지로 인하여 말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끝내고 지금까지 내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이 두가지 있다.

'간염에 걸리지 않도록 했어야 하는데'라는 것은 후회스럽기는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우 고집이 강하신 분들이고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집에만 계실 분이 아니라는 생각에 면피를 스스로에게 주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 마음을 괴롭히는 건...

외출하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아버지와 치료해야 한다는 이유로 꽃 구경 한 번 못 모시고 간 것.

그리고 그렇게 먹고 싶다는 과자를 당뇨 등 치료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마음껏 사드리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게 난 아버지에게 아무 것도 해드린 것이 없이 떠나보낸 불효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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