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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씨 Oct 27. 2024

푸른 생명

2장 : 유키의 카메라


시내로 빠져나왔을 때, 하늘은 어두웠고 건물 조명은 밝았다. 어젯밤 보슬비가 긴 시간 내린 탓에, 사방에 웅덩이가 고여있었다. 반사된 조명은 길거리를 더욱 환하게 비췄다. 우리는 학교 근처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에서 저녁을 때우고, 템스강을 좌측에 끼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온종일 걷다 보니 발바닥이 부어 열감이 느껴졌지만, 이렇게 시내를 돌아다니며 관광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나보다 더 피로할 유키와 나츠 조차 군말이 없었으니까. 거리에는 꽤 늦은 시간임에도 버스킹 공연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 앞에 놓인 악기 케이스가 관객을 향해 열려있었고, 얼마쯤 모여있을지 모를 지폐와 동전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나츠는 해보고 싶었던 게 있다며, 주머니에서 동전 지갑을 꺼내 1파운드를 악기 케이스에 넣었다. 기타를 든 이가 노래를 부르는 와중에 “땡큐(Thank you)!”라고 외쳤다. 일순간 주목을 받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는지 부리나케 우리 곁으로 돌아와서 멋쩍게 웃었다. 유키는 그 모습을 쉬지 않고 촬영했다. 다시 십 분여를 걷자 런던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타워브리지가 보였다. 타워브리지는 템스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인데 시내에서 야경을 만드는 것 중 단연 돋보였다. 템스강 위로 선박이 움직이자, 타워브리지 양 끝에 있는 두 개의 타워 사이가 갈라지며 수로를 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인파가 다리 주변으로 몰렸고, 나츠 또한 강변 돌담 앞으로 뛰어가 기대었다.

“유키, 너는 가까이 안 가봐도 돼?” 야경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만지는 유키를 보며 물었다.

“응, 이거면 돼. 그러고 서 있지 말고 너도 나츠 옆으로 가봐. 곧 들어갈 틈도 없어지겠다.”

“런던에 소매치기가 많대.”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유키가 카메라를 꼭 쥐며 고개를 들었다.

“너 지금 혼자 두면 누군가 카메라를 낚아챌 것 같단 말이지.”

유키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다시 카메라를 들여다보았다.

“사진 찍는 건 어쩌다 좋아하게 된 거야?”

“이유가 있나- 그냥 좋아서 하는 거지-” 유키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나츠가 있는 방향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나는 야경 때문에 마음이 누그러진 것인지, 알리고 싶었던 것인지, 학교에서 허영심에 관해 기억했던 과거를 유키에게 털어놓았다. 네가 제대로 본 거라고. 내 자존심을 위해 거짓말을 일삼아 왔다고. 그게 허영심이라면 네 말이 맞다고.

유키는 긴 생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말하는 동안 귀를 기울여주기라도 하듯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찬바람에 흔들리는 잔머리 사이로 무뚝뚝한 표정과 날이 선 콧대, 진한 흑색 눈동자, 흰색 고리의 귀걸이가 드러났다. 빛이 났다. 유키는 이야기를 덤덤하게 빠짐없이 들어주었다. 그리고 무안할 정도로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았다면. 윤리적 이기주의 같은 거지.” 유키가 내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로 피해 준 적은 없어. 나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지.”

“피해자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어? 아니야, 미안. 나한테도 그런 거야. 이 카메라가. 유일한 안식처, 도피처였거든.” 유키는 카메라를 복부 부근으로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먼저 비밀을 털어놨으니까, 나도 말해주는 게 공평하겠지.

한국에서 일본으로 이주하게 된 건 중학교에 입학할 때부터였어. 아버지가 일본으로 이직하게 되면서 한 가정이 새 환경에 터를 꾸린 케이스야. 부모님이 다른 국적을 가지고 있으니까, 어릴 적부터 한국말, 일본말 고루고루 배워왔고 어느 정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거든. 근데 웬걸, 막상 일본인들에게 둘러싸이니까 하나도 들리지 않더라. 내겐 일본어의 표본이 아버지 말고는 없었던 거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뿐이었어. 부모님은 낯설어서 그런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고.

하지만, 벌어진 모든 문제는 내가 일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점이 화근이었어. 등교한 지 며칠 채 되지 않았을 때, 몇몇 녀석들이 휴지에 물을 적시고 뭉쳐서 내 등과 머리를 향해 던졌어. 작지만 여러 개를, 수업 시간 내내. 난 원래 친구들을 대동하고 다닐 만큼 활발한 성격이었는데, 말을 듣지 못하고 내뱉지 못하니까 처음에는 숨을 죽이게 되었어. 말할 수도 없었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반복해서 그러니까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어. 그만둬! 하고 말이야. 생각해 봐. 말도 어눌하게 하는 애가 수업이 한창인 순간에 박차고 일어나서 소리를 꽥! 하고 낸 거야. 머리와 등에는 축축한 휴지를 장식으로 달고 말이지. 교실은 비웃는 소리로 휩싸였어. 잊을 수 없었던 건, 선생이란 작자도 그저 웃고 있었단 거야. 그때부터, 내가 당하는 일들은 ‘장난’으로 치부되었어. 어깨를 밀치며 지나가는 건 물론이고, 체육 시간이 끝나 교실에 돌아오면 갈아입을 교복이 갈기갈기 찢겨있지. 그 덕에 땀내 나는 체육복을 온종일 입게 됐고. 동아리 참여든, 교내 활동이든 뭔가를 하려 하면 바로 내 뒤에서 험담을 일삼았어. 그 녀석들, 언제 어디서든 나를 지켜보고 있었어. 학급 게시판에는 날이 갈수록 나를 위한 비방으로 가득한 종이가 빼곡해졌지. 이 모든 게 일본어가 어눌했다는 게 이유라면 믿겠어?”

“고약한 녀석들.” 나는 반사적으로 읊조렸다.

유키는 어색한 미소를 짓다가, 우리를 향해 팔을 흔드는 나츠를 보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반갑게 화답했다. 나츠가 타워브리지를 향해 돌아서자,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유키의 표정 변화에서 무척 묘한 기분을 느꼈다.

“학교에 ‘다른 잡초가 자랐다’라는 말이 있었어.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잡초’는 당하는 대상이고, ‘다른’이라는 말은 잡초가 하나가 아니라는 소리였지. 장난으로 여겨지는 나를 향한 괴롭힘이 한 주를 지나, 한 달이 되어가면서 나한테는 버릇이 하나 생겼다? 교실 문을 열 때 그 녀석들이 안에 있을지 없을지 생각하게 되는 거였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아니.” 심각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 순간부터는 내가 녀석들에게서 벗어날 궁리를 하지 못한다는 거야. 어떻게 견뎌야 하지, 내일은 조용히 지나갈 수 있을까. 그 불안감에 완전히 잠식. 전학이라는 강수도 있었는데 말이지. 떨쳐낼 생각은 하지도 못하는 거야. 나츠는 다른 잡초였어. 정확히는 내가 오기 전까지 괴롭힘을 당했었다고 하더라. 뭐, 새 장난감이 생기고서부터는 나츠쪽으로는 관심을 껐더라고.

여름이 가까워진 어느 날, 창고에 가둬졌어. 가지가지하지? 그때 정말 무서웠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문 틈새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하며 두어 시간 있었던 것 같아. 그때 나츠를 처음 만났어. 문을 열어줬거든. 두꺼운 철문이 열리면서 빛이 쏟아지듯 퍼지는데, 눈부셔서 무슨 천사인 줄 알았다니까.”

“그렇게 친구가 된 건가?”

“응, 그 상황에 같이 여행도 갔었어.”

“어디로?”

“나가사키. 후쿠오카에서 버스로 세 시간 정도면 갈 수 있어. 좋은 도시였어. 평화롭고, 따뜻하고, 위로받을 수 있을 정도로. 하교 시간이 되면 마을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그게 뭐라고 눈물이 나더라. 평범한 학생 중에 하나로, 평범한 하교를 바라야 한다는 게. 고작 도시 몇 개만 건너와도 마음이 이렇게 편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함이.

그대로 노면전차를 타고 아무 생각도 없이 회차지까지 갔어. 내리자마자 과일가게와 자동차 정비소 사이 골목으로 홀린 듯이 들어갔어. 그 길은 오르막길로 이어졌고, 사선으로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도록 안내문이 붙어있었어. 1층과 3층 버튼만을 누를 수 있게 되어있어서, 3층. 산 중턱까지 단번에 이동할 수 있더라. 언덕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를 반겨준 건 고양이 무리였어. 산에 무슨 고양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주변은 마을로 가득했고, 도보 블록까지 깔려있었거든.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야. 나는 그곳을 잊을 수 없어. 앞으로도 그렇겠지. 그곳엔 단지 벤치 세 개와 고양이 무리, 안전상의 이유로 설치된 철창만이 있었지만 더할 나위 없는 전경을 가진 곳이었어. 철장 너머로 보이는 건 파란 하늘과 바다를 배경 삼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마을 풍경이었지만, 아름다웠어. 가슴이 저릴 만큼이나. 그 순간만큼은 내 삶의 다음을 생각할 수 있었어. 그래서 사진을 찍었고, 그 감정을 다시 한번, 담고 싶다는 일념으로 취미가 되었지. 내 사진은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야.”

유키는 말하는 내내 굳은 표정이었지만, 나가사키의 기억을 떠올리며 표정이 풀어지더니 이내 미소까지 지었다. 그곳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으나, 유키의 회상과 표정 변화는 그 전경이 얼마나 따스한 평화인지, 또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 사진 보여줄 수 있어?”

유키는 곁눈질로 나를 힐끗 보며 고민하더니, 카메라를 가슴팍으로 휙 하고 가져갔다.

“아니. 방금 결정했는데, 후쿠오카에 놀러 오면 길을 알려줄 테니 나가사키까지 직접 가보도록 해. 너도 거기서 무엇인가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머리 아픈 고민을 지닌 사람일수록 큰걸 쥐여주는 곳이니까.”

전경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서인지, 유키의 말에 어이가 없어질 지경이었지만, 구슬픈 사연까지 들은 이상 따지고 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곳까지 가보겠다는, 내 딴에는 지키기도 어려운 약속까지 해버렸다. 유키의 입이 완전히 텄는지,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도 과거 이야기를 쉬지 않고 들려주었다. 나츠와 규슈 남부에 있는 가고시마까지 가서 기억도 나지 않는 이유로 다투고는 호텔 침대 위에서 껴안고 펑펑 울었다던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브리즈번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했다.

“브리즈번? 어디에 있는 나라야?” 내가 물었다.

“호주의 도시 이름이야. 호주 알지? 시드니 위로…”

유키는 허공에 손가락으로 위도를 그어가며 위치를 설명해 주었다. 해변과 노을이 무척 아름다운 도시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엔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에 대한 의견을 남기자, 유키는 또다시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유학 시절 사진들을 뒤적거렸다.

“왜 웃어?” 유키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내 눈을 보며 물었다.

“네가 웃고 있길래.”

“내가 웃고 있었어? 그럴 리가-” 유키는 부끄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유키에게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가 극복의 계기였을까. 일종의 도피처로 작용했던 것일까. 튀지 않고 평범하게 자라, 한국에서도 자라온 동네를 벗어나지 않은 나로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내심 그런 것을 계기로 카메라 촬영이라는 취미와 유학 경험을 쌓게 되었으니 다른 면으로는 잘 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유키에게 그것이 어떠한 이유로부터 비롯된 건지 알면서도. 그 순간 처음으로 내 허영심을, 나의 썩어버린 머릿속을 원망했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음에도 죄책감을 느꼈다. 그것은 너무도 불쾌하고 끈적한 덩어리 같이 느껴져서 일순간 표정을 찡그렸다. 나는 그것을 한시라도 빨리 떨쳐버리고 싶은 마음에 런던의 공기를 단숨에 흡입하고 내쉬었다. 뭐가 피해를 안 주고, 뭐가 윤리적 이기주의란 말인가. 구제불능(救濟不能)의 격이다.


그날 자정, 기숙사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방은 4평 정도로 혼자서 생활하기에 불편하지는 않았다. 매트리스만 교체된 낡은 침대와 책상 하나, 옷장 하나가 다였지만 말이다. 코와 입을 베개에 완전히 묻어 숨을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다가 한 번에 터트리며 뱉었다. 고작 숨을 참는 것으로 머리를 비워버리고만 싶은 간사한 마음이었다. 숨을 고르다 책상 앞에 앉아 주홍색 램프를 켰다. 내 책상 위에는 입주할 때 루카스 씨에게 받은 런던 시내 지도와 영어로 된 교재들, 종이봉투가 하나 있었다. 템스강을 떠나 기숙사로 오는 길에 나츠가 들러보자며 끌고 들어간 오르골 제작소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인자하고 늙수그레한 남성 노인 혼자서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나츠는 하루 동안 동행해줘서 고맙다며 적당한 것으로 하나 선물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손사래를 쳐가며 사양했지만, 기어코 사주겠다며 등을 밀었다. 결국 진열된 크고 작은 오르골을 둘러봤다. 개중에 가장 작은 오르골을 집어 손잡이를 돌렸다. 단순한 구조로 생긴 아기자기한 몸체에서 맑고 고운 소리가 울렸다. 5.99파운드(약 1만 원)로 저렴한 오르골이었지만 마음에 쏙 들었다. 나츠는 정말 그걸로 괜찮냐고 되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인에게 건넸다. 그는 인자한 표정을 유지하며 그것을 종이봉투에 담아주었다. 내 책상 위에 있는 봉투가 그것이다. 봉투에서 오르골을 꺼내 손잡이를 몇 바퀴 감자 고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목도 모르는 음이 흘러나오는 그날 밤, 나는 유키의 카메라를, 무뚝뚝한 표정을, 이야기를 하염없이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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