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씨 Oct 27. 2024

푸른 생명

3장 : 나현의 레몬맛 사탕


같은 해 12월의 어느 날, 한국에는 이상기후로 기록적인 한파가 찾아왔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허리춤이 박힐 정도로 폭설이 온 건 이례적이라는 기사가 폭발적으로 실렸다. 며칠이면 잦아들 것이라는 기상청의 예보와 함께, 정부는 한 주 동안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누지 않고 전국에 ‘자연재해로 인한 비상 휴일’을 선포했다. 기업과 대학교는 자율성을 부여했지만, 내가 재학 중인 학교를 포함한 대학교 대부분은 수강 일정을 공식적으로 취소했다. 지상의 도로에서는 지자체 주관으로 쉼 없이 제설 작업을 이어갔고, 지하철은 편성된 차량편 수는 적었지만, 운행을 지속했다.

대학생이 된 이후로 본가에서 빠져나와 독립했다. 다만, 서울 지하철역 근처의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방들은 아르바이트로는 감당할 수 있는 금액대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서울에서 통학하고 싶은 마음에 오래된 빌라 꼭대기 층 원룸을 계약했다. 엘리베이터는커녕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와 같은 가전도 연식이 오래된 녀석들로 설치돼 있었다. 재해가 찾아오긴 했지만, 단비 같은 휴일을 지어진 지 이십 년도 넘은 낡은 빌라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내 이른 아침부터 학교 도서관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사당역, 서울역. 4호선 중에서도 원래라면 유동인구가 많은 역에 변화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러니까, 시간대에 상관없이 밀려드는 승객들로 빼곡하게 채워지던 분주한 플랫폼이 한적했다. 습관처럼 늘 탑승하던 위치에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내부에 들어서자 어디서부터 왔을지 모르는 백발의 남성 노인이 눈에 띄었다. 해진 외투를 겹겹이 두른 채 좌석 끝 팔걸이에 기대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알루미늄 페인트 통이 있었지만, 동전 몇 개만이 굴러다녔다. 행색으로 보아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열차 안으로 들어온 것일 터였다. 같은 열 좌석 반대편에는 진녹색 교복 위로 검은색 긴 패딩을 두른 여학생이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을 뿐이었다. 노인은 히터의 열기에 노곤해졌는지 고개를 푹 숙인 자세로 하염없이 졸았고, 여학생은 유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한 번씩 고개를 까딱이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열차가 한강 위를 지날 때, 창밖으로 아침 해가 빛을 쏘아댔다. 기력을 모조리 빼앗겨 차갑게 식어버린 도시가 온기 실은 빛을 받아 회복하는 듯한 풍경을 바라보다, 지하철이 움직임에 따라 내 시선은 여학생에게로 갔다. 그것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찰나였지만 눈이 마주쳤다. 곧바로 고개를 천장에 달린 전광판으로 틀었다. 괜한 오해는 사절이다. 그런데, 기어코 바라지 않던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여학생이 이어폰을 빼고 내게 걸어오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아침부터 변태 취급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 따지고 들면 어떻게 해명해야 하지,라는 혼란을 겪는 동안 순식간에 내 앞에 당도했다.

“저기요-” 여학생은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쳐다보려고 본 건 아니에요.”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차, 내가 잘못짚었다는 걸 깨닫고는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아니에요. 말씀하세요.”

“여기는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아세요?” 여학생은 핸드폰 화면의 주소를 가리키며 물었다.

“혜화역 근처인 것 같은데, 저도 마침 혜화역으로 가는 길이니까 내릴 때 알려드릴게요.”

여학생은 간지럽던 부분이 해소된 듯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이 근처는 처음이세요?” 내가 물었다.

“네! 제주도에서 친척 집으로 놀러 왔는데, 폭설이 와버려서 비행 편이 결항된 거 있죠… 다시 돌아가는 길인데… 지하철도 몇 번 안 타봤고, 지리를 잘 몰라서…”

“지하철 노선도가 조금 복잡하죠? 익숙해지면 다닐만해요. 곧 혜화역이니까 안심하세요.” 안심한 건 오히려 내 쪽이었지만.

“감사합니다! 답례라고 하긴 뭐 하지만, 이거 드실래요?” 여학생은 패딩 주머니에서 레몬 맛 사탕 하나를 꺼내 건넸다. 노란색 비닐에 온기가 묻어있었다.

“잘 먹을게요. 모처럼 놀러 왔는데, 눈이 이렇게 내려서 마무리가 아쉽게 됐네요.”

“학교도 며칠 더 쉬게 됐으니까, 괜찮아요.”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어색함을 풀기 위해 형식적인 대화를 몇 번이나 주고받았다. 결국은 어색한 정적이 흘렀지만 말이다. 무슨 말이라도 할까 하던 차에 여학생이 입을 먼저 열었다.

“제가 서울 와서 찍은 사진 보실래요?” 미소를 띠며 핸드폰 사진첩을 들락날락했다.

“좋죠.” 나는 사탕의 비닐 껍질을 벗겨서 입안으로 넣었다. 신맛이 퍼지는가 싶더니 이내 달콤함이 입안을 채웠다.

“이건 경복궁이고, 여긴 남산타워.”

“하나 같이 잘 찍었네요. 사진 찍는 걸 좋아하나 봐요.”

“에이- 요즘은 다 찍잖아요. 이유가 있나요- 핸드폰 성능도 좋아졌고, 카메라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 저는 제주 토박이라, 큼지막한 건물들 보면 막 설레더라고요. 어릴 때 수영을 자주 해서 그런지 피부도 꺼뭇꺼뭇한데, 서울에 처음 …”


‘이유가 있나- 그냥 좋아서 하는 거지-’


“왜 웃고 계세요? 제 말 안 들으셨죠!”

“아, 미안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했네요.”

유키의 말이 이런 데서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유키, 나츠. 그 둘과 영국에서 몇 달이란 시간 동안 지냈으니, 가끔 뇌리에 말이 스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유키에게 ‘잡초’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다시는 그 화제와 관련된 무엇도 듣지 못한 채 헤어졌다. 억지로 끄집어낼 동기도 없었지만. 연락처는 알고 있었지만 귀국한 이후에도 잘 지내라는 안부 말고는 메시지 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그 이야기는 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 같다.

곧이어 혜화역에 다다랐다는 안내 방송이 나와, 여학생과 하차했다. 출구로 나가는 동안 빵집에서 풍기는 달콤한 빵 냄새 덕에 치즈 빵까지 하나씩 들고나갔다. 루크 씨는 잘 지내시려나, 하며 런던의 추억을 떠올렸다. 화창한 날이면 걸었던 리젠츠 공원, 유키는 공원 안쪽 레스토랑에서만 판매하는 옥수수 피자와 라즈베리 주스를 특히 좋아했다. 바깥공기에 빵 냄새가 옅어지자, 내 회상도 흩어져갔다. 더는 눈이 내리지 않고 있었다. 지도에 적혀있던 주소는 역에서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주고 여학생과도 작별을 고했다.

“이름이 뭐예요?” 여학생이 물었다.

“훈, 김훈이에요.”

“통성명이 늦은 감이 있지만… 저는 이나현이라고 해요. 길…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나현은 제주도에 놀러 오면 가이드 역할로 불러 달라며, 연락처와 온기 묻은 레몬 사탕을 한 개 더 남기고 오르막길 초입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 또한 곧바로 학교 캠퍼스로 향하는 버스에 발을 올렸다. 캠퍼스로 가는 도로는 이미 제설 작업이 완료되어 있었다. 학교는 넓은 부지를 필요로 해서인지 지대가 높은 곳에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경영학을 수강하고 있는 경영관 건물은 가장 꼭대기에 있었다. 이런 이유로 전망을 보기 위해 가끔 옥상에 올라가기도 했다. 강추위를 머금은 바람에 역시 오한을 타버리고 마는 몸뚱이였지만 말이다. 한겨울의 전경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옥상까지 오를지 말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이제 생각해 보니, 나는 모든 ‘처음’에 강한 호기심을 느껴버리는 인간임에 틀림없다.

옥상에는 그득하게 쌓인 눈을 누군가 난간 방향으로 밀어낸 흔적이 다분했다. 예상대로 살갗이 빨개질 정도의 추위에 패딩 지퍼를 목 밑까지 단단히 잠갔다. 그리고 눈이 쌓이지 않은 난간 앞으로 다가갔다. 멀리에 보이는 전망대, 그 아래로 크고 작은 건물의 군집을 보며 내가 서 있는 곳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저 중에 나현의 친척 집도 있을 것이었다. 작더라도 도움을 주었다는 점에서 오는 묘한 뿌듯함, 좋은 일을 하면 내게도 좋은 일이 생기진 않을까 하는 기대감. 무엇인가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단편적으로 선순환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건 내가 아직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무른 것일까. 서울의 과열된 분주함이 하얗게 쌓인 눈에 식어가는 듯했다.

이전 03화 푸른 생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