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밖으로 나왔을 시각에는 해가 일말의 잔온기도 없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후였다. 나는 같은 과 동기인 구현과 혜화역에서의 저녁 식사를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걸었다. 구현은 나보다 한 살 많은 남학우였는데, 튀는 성격과 매력적인 외적 요소란 요소는 모두 갖춘 집합체, 즉, 내성적인 나와는 도무지 섞일 수 없는 존재였다. 기본적으로 남과 맞닥뜨리지 않으려는 특성을 가진 내게 구현은 참으로 만화 속 주인공 같은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잠깐 인사나 하고 마는 사이겠거니 생각할 정도의 인기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구현과 식사 자리를 갖고 싶어 했을뿐더러, 무척 외향적인 구현이었으니까. 서양에서는 이런 이를 ‘킹카’라고 했던가. 영국에서 돌아와 ‘경영학 입문’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을 때, 교수의 재량으로 같은 조로 배정됐다. 교내에서 부담스러운 존재로는 1호인 사람과 2인 1조 과제라니. 내심 달갑지 않았던 것은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거부할 용기가 있는 재목도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지 않아도 내 옆자리로 시선이 쏠리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어느 날에는 쉬는 시간이 주어지자, 당연한 절차처럼 구현의 주변으로 사람이, 아니, 인파가 몰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수그리고 핸드폰 화면만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즈음 누군가 내 귓가에 “어수선하게 해서 미안해”라고 속삭였다. 구현이었다. 반사적으로 어색한 표정을 짓고는 괜찮다고 했지만, 킹카가 행실마저 배려심으로 차있는 인간이라면, 정말 질투가 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교수의 호령으로 인파가 흩어지는 것을 보며 숨이 트였다. 알게 모르게 주변 기온도 시원해진 것 같았고. “매번 이런 식이면 피곤하겠어요.” 내가 구현을 향해 말을 꺼냈을 때, 이례적인 그의 모습을 목격했다. 책상 아래로 떨리는 오른팔 손목을 왼손으로 부여잡고 있었다. 얼굴은 ‘모두’가 아는 구현이었지만, 어딘가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나밖에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입고 있던 바람막이를 벗어 그의 손을 가려주었다.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구현은 또 한 번 내게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강의가 끝나고 옷가지를 챙겨 건물 밖으로 나왔다. 동시에 남녀불문하고 구현과 식사 한 끼 해보려는 녀석들이 그에게 종기처럼 붙었다. 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더는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경영학 강의에서 구현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몇 달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에게 식사 제안이 온 것이었다. 부담스러워 거절할까 했지만, 신경 쓰이는 부분도 있을뿐더러 그와 식사할 기회는 좀처럼 흔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승낙했다. 도서관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단거리였지만, 눈이 덜 치워진 곳은 발이 잠기는 것을 감수하고 가야만 했다. 회차지에 정차해 있던 버스 내부는 엔진이 얼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한기가 떠돌았다. 기사는 유일한 승객인 내가 탑승해서야 시동을 걸고 히터를 켰다. 이내 버스는 혜화역까지 달려 나갔다.
역에서 하차 후, 대학로를 걷는 동안 낮보다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눈이 그치고 재난의 범위를 벗어난 시내에서는 모처럼의 휴일로 미뤘던 약속들이 성사되고 있는 듯했다. 술자리의 열기가 길거리 곳곳에 쌓여있던 눈을 녹이고 행인들의 표정에는 생기가 돌았다. 시끌벅적한 술집거리를 지나 골목으로 파고들면 단골이라 자신할 수 있는 수제 돈가스 가게가 나온다. 나는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가 내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남성 둘인지라 내키진 않지만, 안심 돈가스 ‘커플’ 세트를 주문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단품으로 두 개를 시켰을 때보다 비교적 가격이 저렴했다. 장사꾼의 마케팅이겠지. 대학로를 걷고 있을 구현에게 가게 위치와 커플 세트 주문 소식을 메시지로 알렸다. 구현이 오기를,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SNS 세상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릴레이라도 하듯 화려해 보이는 게시글이 이어졌다. 누구는 유럽으로 여행을, 누구는 골프장 라운드에서 찍은 사진을. 이러한 사치들을 계속해서 보다가는 평범한 내 삶이 초라해질 것만 같아 한숨 쉬며 빠져나왔다. 영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며 고민을 달고 온 것도 있지만, 한 가지 보란 듯이 바뀐 건 허영심을 가진 나를 애써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유키의 말대로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아무렴 어떨쏘냐. 오히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내면에서의 허영심을 가진 내 입지가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키는 그러는 편이 내 허영심을 줄일 유일한 방법인 것을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SNS의 허영심을 자극하는 사진들에 더욱이 시선을 들이고 싶지 않다. 부정하지 않는 것이 즐기는 것은 아니며, 인정하는 것이 내려둘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저들의 클럽에 가입해서 함께 자랑해야만 할 것 같은 심리가 생길까, 그 관심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내 모습이 겁이 날 때도 있지만 말이다. 홀로 빠진 고민 중인 나를 빠져나오게 한 건 문이 열리며 나는 종소리였다. 구현이 모습을 드러냈고 밝게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훈! 잘 지냈어? 교환학생 갔었다며.” 의자를 당기며 구현이 말했다.
“네, 뭐. 그럭저럭…” 나는 미리 따라둔 녹차를 홀짝였다. 손이 놀고 있는 상태가 되려 불편하게 느껴져 구현의 컵에도 녹차를 따라주었다. 보온병에서 흘러나오는 녹차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었다.
“영국이라니- 상반기라 날씨도 좋았을 것 같고. 친구는 많이 사귀었나?”
“킹카께서 제 일정도 알아봐 주셔서 영광이네요. 두 명 사귀었어요. 걔들도 친구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보다 어쩐 일이세요? 안 하던 연락을 다 하시고.”
“아- 나 다음 학기부터 휴학신청 냈거든.”
“휴학이요? 어디 가세요?”
“그때 봐서 너는 알겠지만, 몸 상태가 썩 좋지가 않아. 그래서 공기 좋은 곳 가서 약 먹으면서 요양 좀 하련다.”
“왜 그렇게 된 건지 물어봐도 돼요?” 구현은 내 물음에 어두운 미소를 지었다.
“대인기피증.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어.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내가 꽤 인기가… 있는 편이잖아?” 구현이 멋쩍어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인파만 보면 재난이죠.”
“물론 관심을 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난 그저 일반인일 뿐인데 말이야. 심할 때는 집에 들어갈 때까지도 쫓아오는 녀석들이 있었어. 거기에 과장을 보태면 내가 어디에 있든 항상 감시받는 기분이 들더라고. 강의 듣다가 이런 생각이 자라나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나서부터는 식은땀도 나고, 손도 떨리고, 심장도 빨리 뛰고,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해. 그게 망상이었더라도 몸이 느끼는 건 현실이 되어버린 거지. 이런 이야기, 누구한테도 할 수 없었거든. 의도하진 않았지만 이런 모습을 보여버린 너한테라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만나자고 한 거야. 일방적으로 불편한 소식 들려줘서 미안.
사실 네가 발견하기 한참 전부터 증상은 있었어. 진단을 받고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착잡했는데, 신경계 약을 먹고 증상이 억제되는 걸 느끼면서 ‘시간이 지나면 낫겠지.’, ‘수전증이 아니었을까.’ 하면서 안일했던 거지. 그러다, 이젠 낫지 않았을까, 싶어서 하루 끊어봤는데, 네 앞에서 그렇게 된 거야. 증상이 발현하고 나서, 다시 의사를 찾아갔어. 동시에 약도 복용하기 시작했고. 의사는 내게 사람이 없는 곳에서 쉬는 걸 추천해 주더라고. 기계적인 답변이지만 그게 최적의 방법이라면서 말이야. 입원이라도 해야 하는 건지, 참. 솔직히 내 커리어에 공백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흘려들었어. 약만 먹으면 느껴지는 부작용은 없었으니까, 술만 주의해서 마시면 되겠다 싶었지. 이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됐는데… 사람이 넘쳐나는 곳에서의 태연한 나,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약으로 버텨가는 나. 밝고 외향적인 나, 어두운 모습을 가진 나. 이 모순적인 모습들이 모두 ‘나’라고 할 수 있는지,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어. 다시 돌아왔을 때, 답을 가지고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야.” 구현은 테이블 위에 있는 냅킨 한 장을 뽑아 반으로 접더니, 계속해서 반으로 접어갔다. 끝내 더는 반으로 접을 수 없게 되었고 테이블 위로 살포시 내려놓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넓게 펴지기 시작했다. 이내 수많은 주름은 연해지며 본래 모습을 되찾아갔다.
구현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유키 이야기 속 ‘녀석’들을 상상했다. 그들은 구현에게도 있었고, 유키에게도, 나츠에게도 있었다. 그 형태가 다를 뿐 생겨나는 건 잡초만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을 즉심에 넘겨서 강력한 처벌을 받게 하고 싶었으나, 내겐 말 한마디 남길 힘도 없었다. 당장 모조리 합숙시켜 놓고 무언가를 깨달을 때까지 격리라도 시켜두면 되는 걸까. 녀석들은 어째서, 무엇을 그렇게 갈망해서 타인에게 간섭되려 하는 걸까. 내가 듣기에 그들은 형태만 다를 뿐 한 패임에 진배없었다.
“괜찮으면 밥 다 먹고 나가서 술 한잔할래?” 구현이 말했다.
“약 드신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오늘 약은 왠지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신경계 약물 복용 중 음주는 분명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것을 의학에 무지한 사람도 알고 있다. 하여, 극구 반대하며 말렸지만 ‘마지막’이라는 불가항력적인 말과 구현의 적극적인 태도에 나는 두 손 들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갓 나온 안심 돈가스를 먹어치우고, 대학로 술집거리를 걸었다. 구현은 고민할 새도 없이 눈에 띄는 술집으로 들어가려다, 나의 만류로 종로에 있는 익선동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학교에서 떨어진 곳에 그를 앉혀두고 싶었다. 외모가 어디로 도망가는 것은 아니라, 익선동을 지나며 몇 명이나 구현에게 SNS 계정을 물었지만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익선동은 전통 한옥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현대적인 개조가 이루어진 곳이 많은 동네다. 거리는 사람 한두 명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았으나, 그 점이 고즈넉한 느낌을 만드는 듯했다. 기와지붕 위로 두껍게 쌓인 눈이 쏟아지진 않을까 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우리는 그저 자리와 술과 대화가 필요했으므로, 테이블이 남아있는 이자카야에 들어갔다. 구현은 진저 하이볼을, 나는 레몬 사워, 그리고 야키토리 한 접시를 주문했다. 술이 들어가고 나서의 구현은 내가 아는 친우들과 그 격이 다르지 않았다. 여느 이십 대처럼 놀 줄 아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원치 않는 관심을 받을 필요도, 많은 이들이 원하는 완벽한 이미지에 부합할 필요도 없는 이였다. 타인이 보기에 쓸데없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이 내게도 소중한 순간이 있는 것처럼, 많은 이들의 이상향처럼 살아가는 이도 스스로에게는 평범함을 지닌 한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그 괴리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타인에게 무슨 말이든 건넬 수 있을까. 각자가 가진 개성을 단번에 알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현재 속한 그 시공간에서 할 수 있는 한 ‘나’와 ‘너’를 위한 가장 적절한 언행을 해야 한다는 것을 구현을 통해 어렴풋이 알아갔다. 사람의 생명력은 결코 몇 번의 짓밟힘으로 시들어버릴 만한 것이 아니다.
술자리를 정리하고 기분 좋게 취한 구현을 택시에 태워 보냈다. 몸을 못 가눌 정도는 아니었으니 괜찮을 것이다. 나 또한 취기가 올라와 있어, 한옥 거리를 조금 걷기로 했다. 와 본 적 있는 거리지만, 골목마다 숨어있는 작은 가게들이 늘 새로웠다. 처마에 매달려 있는 노란빛의 전등이 과거의 한옥 분위기를 조성하고 수제 공예품, 전통 찻집, 전통 한식의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늘어선 이 거리가 무척 좋았다.
자취방 문턱을 밟았을 때 이미 밤은 이슥해졌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 한 캔과 슬라이스 치즈, 냉동실에 넣어둔 블루베리를 접시에 담았다. 이 조합은 핏줄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어머니는 술안주로 블루베리와 까망베르 치즈를 종종 곁들여 먹곤 했다. 맥주에는 기름진 튀김류를 선호했던 내게는 거부감 드는 조합이었지만. 명절로 친척이 모였던 날, 난생처음 그 조합을 먹게 되었고 예상외로 묘하게 어울린다는 사실을 미각적으로 알게 되었다. 오늘 뜻하지 않게 나와 어울린 나현과 구현이 그랬다. 그들은 내 계획 밖이었고, 접해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나눈 대화는 진솔했고 배려가 녹아 있었다. 외면적인 가치관 또는 그 성향이 다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의외로 사람을 잇는 데 중요한 건 겉치레나 관심 따위보다 우연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때는 보이는 것에 온 신경을 쓰는 것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드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블루베리를 담은 접시가 비워지며 내 입술이 퍼렇게 물들었다. 그 잔향이 얼마 동안은 남아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