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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씨 Oct 27. 2024

푸른 생명

6장 : 런던, 신사의 도시


약속된 아르바이트 근무 시간이 끝을 맞이하고 입었던 정장의 반납을 위해 1층으로 갔다. 장여사가 있는 통유리창 옆 구멍에 세탁물을 넣었다. ‘세탁물은 여기에’라는 A4용지가 청테이프 한 조각에 의지하며 환풍구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지친 기색으로 부부에게 인사하자, 둘은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태양은 지면 아래로 숨어버렸고 푸르스름한 하늘이 짙게 깔려있었다. 수영장 락스 냄새는 여전히 풍겨왔다. 자취방으로 가기 위해 호텔 뒷길을 지나 공항 지하철로 걸었다.

공항 내에는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객들과 충전기 포트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휴식을 취하는 객, 항공사 카운터에서 발권을 기다리는 객들로 붐볐다. 그 사이를 걸으면 공항에서만 들리는 소음도 좋지만,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차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좋다. 런던에서의 생활을 떠올리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튜브(Tube)라고 불리는 런던 지하철에서 들려오는 안내 방송, 당장 셜록이라도 내 어깨를 두드리며 나타날 것 같은 플랫폼, 꿉꿉하지만 락스 냄새와 같은 종류로 중독성 있는 향. 내가 지금 서 있는 공항은 쾌적하고 넓다 못해 편리한 것 천지지만, 그 도시의 거리를 상상하면 괜스레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때,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나츠에게 통화가 걸려왔다. 너무도 오랜만이었고 반가웠다. 나는 이 전화가 잘못 걸려오기라도 했을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잠시 기다렸지만, 계속해서 벨소리는 울려댔다.

“여보세요?”

“야! 김훈! 연락 자주 좀 해라!” 나츠의 격양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기겁하듯 놀라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냈다.

“나츠, 실수하지 말고 얼른 끊어라- 아니면, 핸드폰 이리로 내놔.” 유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훈, 잘 지냈어?”

“유키 맞구나. 나츠는 왜 저래?”

“주량을 알고 싶다고 해서… 한국 소주 몇 잔 마셨더니 저렇게 돼버렸네. 본인은 취하지 않았다고 강경하게 주장 중이야.”

“하하… 나츠 술 마셔본 적 없다더니. 앞으로도 마시면 안 되겠는데.”

“얼마나 마실지 몰라서, 호텔에 다섯 병이나 사서 들고 왔는데. 한 병도 힘들겠다… 오랜만인데, 미안.”

“아니야. 마침, 아르바이트 끝나고 인천공항 지나는 길인데, 영국에 있을 때 생각하고 있었어. 텔레파시라도 통한 줄 알았다니까.”

“오- 우리 생각 좀 했나?”

“물론이지.”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공항 지하로 내려가며, 통화를 이어갔다.

“너 여권은 재발급했어?” 유키가 물었다.

“아니, 아직. 긴급여권 반납 처리만 했어.”




귀국까지 나흘 남짓 남겨두었을 무렵, 영국에서의 일화다. 무척 맑은 날씨의 무더위에 우리 셋은 템스강 근처 피자 가게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번쩍거리는 화려한 네온사인이 돋보였다. 매장 내부는 카운터가 있는 지상 1층과 테이블이 오밀조밀 배치된 지하 1층이 있었다. 우리는 지하 1층 중에서도 붙박이 소파에 기댈 수 있는 구석에 앉았다. 나츠와 유키는 나와 마주 본 채로 앉았다. 나는 땀도 조금 흘렸고, 더위를 식히기 위해서라도 메고 있던 크로스백을 좌석 왼쪽에 벗어던졌다. 그 안에는 여권, 보조배터리, 여분의 여권 사진 네 장, 각종 잡동사니 등이 담겨 있었다.

에어컨 바람에 더위가 식어가고, 윤기 있는 치킨너깃 몇 조각을 담은 접시와 콜라 석 잔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다음 행선지인 런던아이(대관람차) 예약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기에 잠시 대화를 멈추고 쉬기로 정했다. 우리는 테이블에 양 팔꿈치를 올린 채 핸드폰 화면에 집중했다. 삼십 여분 동안 내리 시야에 들어온 건 고작 한 손에 들어오는 화면이 전부였다. 너깃을 오물거리고 모바일 공간에 빠져있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좌석을 채우고 떠나기를 반복했다. 약속한 런던아이 탑승 시간이 다가오자 지상 1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맞다. 가방 가져올게.” 나는 크로스백 챙기는 것을 깜박했고, 그것을 떠올리자마자 좌석으로 돌아갔다. 코너를 돌아 앉았던 좌석을 바라봤을 때 크로스백은 있어야 할 곳에 없었다. 그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것도 모자라,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가빠졌다. 애써 당황하지 않으려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 주변에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스스로 믿으려 했다. 결국, 불안감은 부끄러움을 산 채로 잡아먹기 시작했다. 나는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짧은 영어로 양해를 구하며 매장을 샅샅이 뒤졌지만, 흔적조차 없었다.

급한 대로, 카운터 직원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했다. 나름대로 침착하게 말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불안한 안색이었을 것이다. 잠시 기다리자 안쪽 관리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유니폼을 입은 남성은 우리 일행이 앉았던 좌석을 찍고 있는 CCTV 영상을 확인시켜 주었다. 핸드폰을 주시하며 너깃을 오물거리는 동안 왼쪽 테이블에 모자를 푹 눌러쓴 백인 남성 둘이 앉았다. 오 분 정도 지났을까, 그들은 조심스럽고도 은밀하게 일어나면서 오른손은 내 가방을 탐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온갖 불길한 상상은 나를 한없이 약하고 경계하는 소년으로 만들어갔다. 두 눈으로 촬영된 장면을 보면서도 좀처럼 진정되지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는 내게 카운터 직원은 경찰서의 대략적인 위치와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자신의 이름과 매장 전화번호였다. 경찰서에서 진위 증명을 요구하면 자신에게 전화하라는 뜻이었다. 직원으로서도 골치 아픈 일이었을 텐데, 그는 충분한 선의를 보여주었다.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지체할 새도 없이 밖으로 나섰다. 와중에 유키와 나츠에게 런던아이로 먼저 가보라고 권했지만, 경찰서를 함께 찾아가 주겠다고 했다.

이후부터는 런던 시내 곳곳을 전전하며 경찰서를 찾아 헤맸다. 메모에 적힌 구역에서 'Police'가 붙은 건물들을 향해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가방을 찾는다던가, 모자를 눌러쓴 두 남성을 잡는다던가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 불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활보했다. 그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싶었다. 무슨 말이라도 듣기 전에는 다리가 멈춰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러다 순찰 중인 것으로 보이는 경찰 두 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입으로 호흡하느라 말라가는 목으로 침을 삼키고 그들 앞에 섰다.

"도와주세요. 누군가 제 가방을 가져갔어요!" 경찰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자초지종을 듣더니 교차로 건너편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그들이 가리킨 건물 안에 들어서자 지하철역 창구를 연상케 하는 곳에 경찰관으로 보이는 남성이 앉아있었고, 그의 앞에 대기 줄이 있었다. 나는 그 줄 마지막에 서 있는 남성의 뒤로 갔다. 내 앞에는 네 명의 사람이 있었는데, 앞부터 연로한 노인, 풍채 있는 중년의 여성, 검은색 배낭을 멘 젊은 남성 둘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경찰서에 갈 일이 없던지라 접수 방식에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뿐인 창구를 보니 일이 처리되는 속도에 초조해졌다. 대기하는 동안 핸드폰으로 해외도난에 대해서 검색했다. 해외에서 여권을 분실하면 어떡해야 하는지, 귀국은 할 수 있는지 등이 검색 내용이었다. 재발급에 대한 기간이 제각각인 경우가 많았으나, 가장 문제였던 건, 나흘 후에 귀국을 위한 항공편을 탑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 발이 닿아있던 곳은 영국이었으므로, 당연하게도 타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여권이 필요했다. 그것이 통째로 사라졌다. 대기는 줄어들 생각이 없어 보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거듭 무거워지는 짐을 업고 있는 듯했다. 접수 순서가 오기까지 가방을 찾을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막상 창구 경찰관의 입에서 되찾기 어렵다는 말을 듣게 되니 허탈했다. 창구 경찰관은 도난 확인서를 건네주며, 여권에 관해서는 대사관에 방문하라는 답변을 남겼다.

창문으로 보이는 경찰서 밖은 이미 어두웠고, 런던아이 예약 시간은 훌쩍 지나있었다. 대사관 직원도 퇴근했을 것이었고,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사태가 일단락되자, 창피한 감정부터 몰려왔다. 유키에게는 늘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내 모습, 일종의 치부를 들키는 것 같았다. 둘은 내게 되려 위로를 해줬지만, 참으로 창피하고 심란한 밤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내게 짐이라고는 핸드폰 하나였지만 깊은 잠에 빠져들지 못해 쌓인 피로 덕에 온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게으름 피울 여유는 남지 않았으므로, 창구 경찰관이 안내해 준 대로 '주영국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우리가 탑승해야 할 킹스크로스역은 런던 교통수단의 허브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어 곳곳이 승객으로 붐볐다. 영국 지하철역에 오면 이따금 기묘한 분위기가 주위를 맴돈다. 특유의 조명과 공기가 묘한 분위기를 만들었고, 사람이 적을 때는 더 그랬다. 그 분위기 틈에서 송출되는 안내 방송은 꽤 좋아하는 편이다. ‘Please Mind the gap between…(사이에 틈을 조심하세요…)’ 열차가 들어올 때마다 나오는 이 방송은 영국에 있다는 것을 반복해서 상기시켜 주는 것 같아, 듣다 보면 어느새 따라 말하곤 했다.

빅토리아역에서 도보로 십 분, 대한민국 대사관 건물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2층 창가 밖으로 걸린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는데, 국기가 내게 이보다 의미가 있는 날은 거의 없을 것이리라 생각했다. 일본 국적인 유키와 나츠가 출입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근처에서 유명한 크루아상 빵집의 위치를 알려주었다(원래라면 런던아이 관람 이후에 가려고 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대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업무실 앞에 서자 감색 유니폼을 입은 덩치 있는 남성이 다가왔다. 짧은 인사를 건네더니 반입이 허가되지 않은 물품(총기 등)이 있는지 탐지기로 전신을 탐색했다. 고작 스마트폰밖에 없었으므로, 무리 없이 통과했다. 접수증을 받고 창가 쪽 의자에 앉았다. 그러니까, 업무창구를 향한 세 열의 긴 의자가 있었는데, 상담창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지고 창가의 볕이 드는 열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내게는 두툼한 서류들이 쥐어졌다. 긴급하게 여권이 발급이 필요한 경우 도난 경위에 대해서 자세하게 작성이 요구되었고, 어색함과 긴장감을 머금은 손아귀로 근육이 뭉칠 때까지 적어댔다. 곧이어 서류를 업무창구에 제출했다. 한국어 상담이 이렇게 반가운 적이 있었던가. 직원은 여권 분실처리를 먼저 진행해 주었다. 그럼으로써 분실된 여권은 효력이 사라진 종잇조각이 된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한국 귀국까지 사용 가능한 긴급여권을 발행하기 위해서는 여권 사진이 필요했는데, 그마저도 분실된 크로스백 안에 있었다. 직원은 이런 경우가 익숙한지 방긋 웃으며 대사관 건물 근처 사진관을 알려주었다.

나는 일이 풀려간다는 소식을 유키에게 전했고, 부리나케 사진관으로 이동했다. 유키와 나츠는 크루아상을 담은 두툼한 봉투를 들고 사진관 앞에 서 있었다. 이쯤 되니 계획 외로 어디까지 할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액자와 노란 벽지로 도배된 작은 사진관, 사진사는 여권 사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피사체인 나를 잽싸게 카메라 앞으로 데려가더니, 머리와 어깨의 각도를 손봐주고 바로 몇 번의 셔터를 눌렀다. “이제야 표정이 피네.” 나츠의 말에 사뭇 밝아진 표정을 인지했다. 사진사는 잡티를 제거한다든가 하는 일말의 보정도 없이 굉장히 사실적으로 인화된 사진을 작은 사각봉투에 포장했다. 그것을 곧장 대사관 직원에게 전달하자, 그는 오늘 오후 늦어도 내일 오전이면 긴급여권을 받아볼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한국에 귀국하면 긴급여권을 반납 처리하고 여권을 재발급해야 한다는 안내사항을 덧붙였다. 여권 도난 소동은 그렇게 마무리되었지만, 둘에게 민낯까지 드러나 버린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다만, 그것이 기분 나쁜 종류의 것이 아니라, 웬만큼 창피한 모습은 거리낌 없이 보여줄 수 있겠다는 체념과 친밀감 사이의 한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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