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인 금요일 이른 아침, 쿵! 하고 울리는 옆집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다시 잠들 수도 있었지만, 늦잠도 체질인 것 같다. 한쪽 눈을 질끈 감은 채 핸드폰 화면을 켜자 문자 몇 통이 담겨 있었다. 통신비 고지서, 대학교 스터디 클럽 홍보 문자, 그리고 나츠로부터 온 장문의 문자였다. 동양의 예(禮)를 끄집어내서 인간으로 형상화한다면 나츠일 것이라, 어제 같은 술주정은 반드시 후속 연락이 올 걸 알았다. 이럴 것 같아서 유키에게 연락할 필요 없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던 거였는데, 문자임에도 편지처럼 형식을 갖추어 쓰기까지 한 점이 나츠다웠다.
To. 훈에게
훈아, 안녕. 새벽 시간에 완전히 술에서 깨어버리고 쓰는 문자야. 몇 잔 마시지 않아서인지, 기억도 생생한 편이고 숙취도 없어서, 네게 저지른 무례에 대해 사과의 마음을 전해. 이런 식으로 사과하는 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너는 아마 잠들어 있을 것 같고… 서로 머리도 헝클어진 채로 영상 통화하는 것도 조금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고… 미안해. 혹시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 중에 네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야. 만나면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걸 알아주었으면 해.
그래서 너만 괜찮다면, 후쿠오카에 여행 오는 건 어때? 너도 방학 중이라고 들었거든. 내가 정말 맛있는 한 끼 대접할게! 내 기억에 네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가 명란이 들어간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맞지? 후쿠오카의 명물이 명란이잖아. 그것 말고도 우나기동(장어덮밥), 라멘, 초밥, 나베도 있고… 늦은 시간에 횡설수설해서 다시 한번 사과할게. 미안해. 좋은 밤 보내.
오게 된다면, 꼭 연락해줘!
P.S 유키도 내심 너와 노는 날을 기다리는 눈치야!
From. 정신을 차린 나츠
어젯밤, 통화를 마치고 자취방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수박 몇 덩이는 들어갈 법한 택배 상자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발송인은 어머니였다. 수고스럽게 보내지 말라고 했건만. 종종 이렇게 반찬이나 과일을 보내주시곤 한다. 기온이 낮아 상할 우려가 적었지만, 그것들을 곧바로 냉장고 안에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부모의 품에서 빠져나와 자취를 시작했을 무렵, 홀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실감 나게 다가온 건 며칠을 홀로 식사하게 되면서였다. 배고픔이 찾아올 때마다 직접 요리하기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이를 미리 겪어본 ‘경력자’로서 내게 보급품을 보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부모의 피부양자로 살아간다는 것, 끼니마다 차려지는 밥상은 당연하게도, 영원하지 않다. 부엌에 들어가지 않고도 손질되지 않은 재료가 맛깔스러운 요리로 탈바꿈되는 마법은 긴 시간 반복되지 않는다. 수십 년을 부엌에서 마술사로 활동하는 동안, 사직서 한 번 내비치지 않은 그의 존재가 부재가 될 때를 상상했다.
정말 두려운 사실은 이 감정이 또 한 번 구제 불능의 썩어버린 머릿속에서 새까맣게 잊혀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하염없이 후회하고 그리워할 것인가?
상자 바닥 가장자리에서 블루베리가 가득 채워진 투명한 통을 발견했다. “자기 먹을 안주도 부족하면서…” 그것을 집어서 냉장고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두었다. 오늘 밤에는 맥주 한 캔이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