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생물이라 한다. 생물 중에는 어떤 생물에 기생하여 숙주로 삼는 기생충도 있다. 지금 민주당은 이 기생충으로 가득하다. 이 기생충은 열심히 크고 있는 숙주에 달라붙거나, 과거의 이름에 기생하여(팔아) 연명해왔다. 어떤 기생충 하나가 당 대표가 되더니 작정하고 당을 장악하려 시도했다. 당원 주권이 어쩌고 이재명도 하려고 했다 어쩌고 하며 1인 1표제로 지금 민주당의 대의원제를 무력화하려 했다. 다행히도 이 기생충은 항체가 되어준 시민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진보와 보수라는 이미지적 이분법에서 벗어난 이들은 기생충으로부터 썩어가는 당을 보호했다. 좀비로, 김어준 교인 수준으로 당원을 바라본 그들은 그 당원에게 오히려 메치기 당한 것이다.
나는 민주 진보세력이 분열되면 그렇게 떨어져 나와 오갈 곳 없는 이들이 이준석이나 극우당으로 향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분열만은 안된다는 생각으로 민주세력이 잘못했어도 그럼에도 잘 고쳐 쓰자며 다독였다. 그러나 내란 이후 극우 세력이 몰락하며 그 걱정이 사라졌다. 이준석의 목소리는 힘을 잃었고 국힘은 극우세력이 되어버린 지금, 진보와 보수라는 캐캐묵은 이분법은 의미가 사라졌다. 지금 진보를 가로막는 이들은 교묘한 얼굴을 한 기생충 곧 죽은 노무현을 얼굴에 쓰고 문재인을 신으로 만들어 김어준의 입을 빌려 말하는 이름들이다. 이들을 고쳐 쓰기에는 인내심이 바닥난듯 하다.
이들은 기득권이다. 단언컨대 썩을 대로 썩은 기득권이다. 잃어버린 권력을 돈으로 바꾸어먹고 이름밖에 남지 않은 가닥을 겨우 붙잡고 있는 꼴이다. 노무현, 문재인, 윤석열, 북한, 코로나, 검찰, 언론이라는 이름들을 붙잡고 나 좀 봐달라고 소리를 질러댄다. 우리 잘했잖아. 예네들 나쁘잖아. 운동장이 기울어졌잖아... 그런데 정작 보여준 건 없다. 오직 이름뿐이 없는, 실채 없는 이미지뿐이다. 묵묵히 일하는 이들 옆에 팔짱을 끼고 웃으며 숟가락을 얹으며 살아왔기에 그것뿐이 없는 것이다. 이들이 지나간 자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00보다는 낫다"라는 공허한 말밖에 없다.
1인 1표제가 과반을 넘기지 못했다는 사실은 니체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친구여, 친구는 없다네" 우리라는 이름 뒤에 숨어 다른 꿈을 꾸고 우리 의지를 갉아먹는 이들이 다행히도 과반을 넘기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나 373중 271찬 102반 이라는 숫자는 꽤나 불안하고 두렵게 다가온다. 이제는 말해야 한다. 거리를 두자. 저 위선적인 자들에게 권력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섞여서 보이지 않는 이들을 상대로 선을 긋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디지털 영토는 이미 오염된 지 오래다. AI가 이 오염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 오염을 극우에 한정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너무도 편협한 시선이다. 극우고 진보의 이름을 한 김어준이고 매불쇼고, 디지털은 실체 없는 이미지로 실재를 살해하기 위해 기획된지 오래다. 주변에도 많이 보이지 않는가. 보지 않고 말하는 사람들 말이다. 이 때문에 선 긋기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결론은 선을 그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촛불 혁명과 빛의 혁명의 차이가 말해준다. 거대한 물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실채를 들여다보면 많은 욕망의 합이다. 한마디로 무수한 색이 섞인 찰흙덩어리다. 이런 욕망 덩어리에 공평한 분배란 불가능한 일이다. 박근혜 퇴진만을 외치던 광장이 지금은 무수한 요구들의 하모니로 바뀌었다. 현실은 다양한 욕망과 요구가 섞여있다. 그러나 어떤 기술자들은 찰흙덩이 일부를 취사선택하여 이리저리 조합하여 마치 거대한 흐름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 숭고한 깃발(이미지)을 들자 우르르 몰려간다. 그리고 그 힘을 통해 누군가 권력을 획득한다. 정작 개선된 건 아무것도 없다. 이 악순환이 반복될 뿐이다.
나 역시 보지 않고 말하는 이미지에 유혹당하고 사는 사람 중에 하나다. 내가 군중이 되어 저지른, 저지를, 나도 모른체 저지르고 있을 일은 계속해서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진실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애초에 존재하는 개념인지도 알 수 없다. 직접 뛰어들어 감각해야만 하는데, 이 역시 오염으로부터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노력할 뿐이다.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떠안은 공통의 안건으로 잠시 모이고 흩어지면서 세상은 점점 더 나은 방향으로 향하는 것 같다. 거대한 흐름 따위는 없었다. 사소한 욕망에 폭력이 더해지면서 커 보일 뿐이다.
내가 할 일은 충분히 아파하고 충분히 공감하는 것 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냥 그렇게 사소해 보이는 곳에서 실천하는 것 밖에는 없다. 후원하고 서명하고 종종 자리를 지켜주고 내가 직접들은 목소리를 주변에 전달하는 것 밖에 없다. 이번 부결도 충분히 아파하고 공감한 이들의 사소한 표가 모이고 모여 만든 결과이다. 한눈팔지 않고 더는 아프지 말자는 정확한 바람이, 특정 세력의 영향력을 희석시키는데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범죄자 윤 씨가 백악관에서 부른걸로 유명한 "American Pie"를 최근에 우연히 듣게 되었다. 상실에 대한 애도. 우리를 우리가될 수 있도록 하나로 묶어주던 공통의 무언가가 사라지고 디오니소스적 광기가 찾아온 세계에서 상실감을 말하는 노래다. 그러나 나는 이 노래를 뒤집는다. 우리를 묶는 근본은 애초에 없다. 영웅이 약속하던 달콤한 미래가 허상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안다. 나는 이재명이 영웅이라고 생각하지도 여기지도 않는다. 그가 대한민국과 청년을 구해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신도 아니고 무슨 뾰족한 수로 세상 모든 이들의 욕망을 깨끗하게 이뤄준단 말인가. 그는 그저 듣고 수행할 뿐이지 신도 영웅도 아니다. 아파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나"들이 모여 요구한 바를 검토하고 수행하는 권력을 가진 선출직 공무원 중 하나다.
음악은 이미 죽은 지 오래다. 그러니 아메리칸 파이를 기쁜 마음으로 떠나보내자. 아파하고 공감하는 자세로 그렇게 "나"들 중 하나로 다시 서자. 다시는 그 누구를 우상으로 삼지 않겠노라고 기만적인 다짐을 하자. 그럴 수 있는 하찮은 실수에 관대하고 알고도 반복하는 실수에 엄격하자. 그리고 한 목소리의 군중이 아닌,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다중 속 나로 씩씩하게 살아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