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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랖

by Rey

며칠간 몸을 혹사시켰더니 안 아픈 구석이 없었다.


내 체력이 얼마나 될까에 대한 실험을 하루만 해봐도 될 걸 며칠 한 탓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사실 택시를 타고 집에 가고 싶었지만 너무 멀리 나와 있던 탓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지하철을 탔다.


이제 끔 지하철을 타고 앉고 싶단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너무 간절했다.


오랫동안 서서 갈 생각을 하니 더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지하철 손잡이에 의지한 체 대롱대롱 매달려 거의 감은 눈으로 오디오북을 들으며 가고 있었다.


몇 정거장 지났는데 바로 앞에 사람이 일어나서 자리에 앉게 됐다.


내 옆에는 임산부 배려석이라 비어 있어서 오른쪽이 사람과 닿지 않아 편했다.


눈은 저절로 감기고 깜빡 잠이 들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내 오른편에 누군가 털썩하고 앉았다.


40대 중반정도로 보였는데 겉모습은 전혀 임산부 같지 않았다.


그 뒤에 이어서 앳돼 보이는 여자는 임산부배려석을 한번 힐끔 봤는데 사람이 앉아 있으니 뒤로 물러나서 섰다.


좀 이르긴 하지만 퇴근시간 무렵이라 지하철 안에 제법 사람이 많았다.


옆에 앉은 사람 때문에 잠깐 졸다가 깨서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려는데 사람들 사이에 보이는 게 있었다.


임산부배려석을 한번 봤던 그녀는 가방 끝에 동그란 핑크색 배지를 달고 있었다.


'임산부 먼저'


배지 안에 쓰여있는 문구를 읽지 않아도 그 배지는 누가 봐도 임산부임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거 보면 이런 게 어떤 식으로 인식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이 되니 말이다.


그 배지를 보니 양보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난 오늘만 고생하면 되니, 고귀한 생명을 품고 있는 그녀에게 양보를 하는 게 맞으니, 한껏 힘을 내서 일어났다.


그녀 팔에 옷깃을 톡톡 치면서 자리에 앉으라고 표정으로만 보였다.


살짝 미소를 지은 그녀가 고맙다는 눈인사를 하고 앉으려 하는데 다른 사람이 휙 몸을 돌리더니 앉으려고 했다.


그 사람의 어깨를 톡톡 치고 고개로 임산부를 봤더니 약간 미안한 몸짓으로 얼른 자리를 비켜줬다.


재밌는 건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표정과 몸짓으로 다 알아들어서 조금 웃기긴 했다.


그렇게 자리를 양보하고 서서 몇 정거장 가면 내리는지 확인했는데 9 정거장이 남아 있어서 그냥 서서 졸기로 했다.


임산부배려석에 앉아있던 여자를 다시 한번 봤는데 아무리 봐도 임산부라고 볼 순 없었다.


그렇다고 그걸 의심해 물어볼 수도 없고 뭔가 사정이 있겠지 하고 서서 눈을 감았다.


몇 개의 역이 지나 환승역이었는지 사람들의 움직임이 많아져 다시 눈을 떴다.


임산부배려석에 앉았던 그 여자는 문이 열리자마자 황급히 자리에 일어나 내렸고, 내가 양보해 준 임산부는 임산부배려석으로 자리를 옮겼고 내가 자리를 양보해 준 걸 알고 있는 그 앞에 있던 사람은 자리에 앉지 않았고 임산부는 나를 보면 앉으라고 손짓을 했고, 나는 괜찮다며 눈으로 말해줬고 그러던 중에 멀리서 어떤 여자가 와서 앉았다.


날도 덥고 해서 집에 오자마자 냉장고를 열어 예전에 사다 놓은 맥주 한 캔을 따서 몇 모금 들이켰더니 좀 살 것 같았다.


아마도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면 몸이 어디가 쑤실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긴 했지만 지하철에서 임산부 자리를 양보해 준 게 생각이 나서 한껏 뿌듯했다.


하루를 돌아보면 기분 안 좋았던 일과 기분 좋았던 일들을 복기해 보게 되는데 가장 기분 좋은 일은 남을 배려하는 일인 것 같다.


행복은 나를 위한 게 아니라 남을 위해야 가치가 더 커진다.


몸이 상당히 고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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