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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동맥 조영술

by Rey

어쩌다 보니 한계는 반드시 넘어야 한다는 그릇 된 생각으로 살았다.


지나서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을 넘는다는 게 미친 짓이었는데 난 항상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런저런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으니 난 누구에게나 있는 것들을 항상 인내하고 넘어야 뭐가 되는 줄 알았다.


너무 멍청한 생각이었는데, 아마도 그때는 나를 잡아 줄 무언가도 없었고 뭔가 있다 하더라도 내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그때의 나에게 말을 전하라고 한다면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


'그만 노력해, 충분해, 더 이상 하면 큰일 나!'


심장 관련 다큐멘터리 하나 보다가 문득 생각나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난 관상동맥 조영술을 다섯 번 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필요하니까 했을 테다.


그중에 황당하게 기억나는 게 있어 이게 나한테만 적용이 되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 누구에게 물어보질 않았으니, 아니 주변에 나와 같은 사람이 없으니 물어볼 수도 없고 아무튼, 조금 웃기는 일이 있었다.


중환자실에 있을 때 일이다.


양팔에는 어떤 주사를 놔도 괜찮게 바늘을 다 찔러놨고 몸에는 뭔가 덕지덕지 붙여 기계와 모니터에 연결해놓고 있어 옴짝달싹도 못하는 상태였다.


잠을 좀 편하게 잤으면 좋겠는데 내 기계뿐 아닌 다른 환자들의 기계에서 나는 소리들이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으니 이건 중환자실이 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중환자실은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있는 환자들이 드문데 나만 정신을 차리고 있어서 온갖 것들에 신경이 쓰이는지도 모르겠다.


내 정신은 멀쩡한데 손과 발도 멀쩡한데 스스로 화장실을 가면 안 되는 그런 상황인 게 중환자실이라 그런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내 몸상태나 내 몸에 부착되어 있는 것들을 보면 이걸 다 어떻게 하고 화장실을 가야 할까.


'화장실 가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구한테 부탁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수시로 마스크를 한 간호사들이 와서 뭔가 몇 가지를 만지고 그냥 갔다.


빈도수는 거의 20분에 한 번이다.


시간을 재보고 싶진 않았지만 난 멀쩡하니까 계속 시계만 쳐다봤으니 확실했다.


'아 정말, 화장실 가고 싶으면 어쩌지?'


생각했는데 이것도 너무 바보 같은 생각인 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소변줄이 삽관이 되어 있는 상태라서 난 화장실을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웃긴가.


내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고, 난 괜찮아, 를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소변줄을 만져보니 화장실 안 가도 괜찮겠다 생각하고 안심했다.


바로 옆 환자는 오토바이를 타다 교통사고가 나서 경추가 골절 됐다고 했다.


물론 내게 말한 건 아닌데 하는 얘길 들었다.


어떤 주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얘길 하는데 두서가 없는 걸로 봐서는 마약성 진통제나 뭐 이런 종류였을 것 같았다.


새벽 두 시였다.


젊은 의사가 내게 왔다.


"환자분! 제 얘기 들리세요?"


난 눈을 뜨고 의사가 온 걸 봤는데 왜 그렇게 부르는지 의아했다.


"네, 말씀하세요"


"오전에 관상동맥 조형술을 할 건데 대퇴동맥으로 할 거라 제모를 해야 하니까 좀 할게요"


"네, 그렇게 하세요"


그러더니 또 누군가 등장해서 내 바지를 내렸고 사타구니의 털을 면도기를 밀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남자에게 내 바지를 내린 것도 처음이고, 아니, 내려진 것도 처음이고, 뭐랄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는데 생각해 보니 여자친구가 왁싱을 했다고 얘기를 들었을 때 그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털이 밀리고 아침이 되었다.


옆 교통사고 환자는 환각 내지는 환청이 지속되는 것 같았다.


말이 되지 않는 얘기를 계속하는 통에 정신이 멀쩡한 나는 잠을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다른 환자들의 의식상태는 내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중환자실이니 시끄러워도 뭐라 할 게 없었을 것이다.


옴짝달싹도 못하는 내 몸은 누군가들의 손에 이동할 수 있는 것에 옮겨졌고 난 천정만 바라볼 수 있으니 움직임이 얼마나 일사불란한지 몸소 체험했다.


엘리베이터도 기다림이 없었고, 병동을 지날 때도 멈춤이 없었다.


"지나갈게요!"


이 소리면 반복해서 들었다.


내가 탄 배드에 '멈추면 죽어요!'라고 쓰여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뭔가의 검사실에 들어갔다는 걸 느낀 건, 공기와 냄새가 달랐다.


그리고 천정 색이 달랐고 라이트가 엄청나게 많았다.


이제 검사 시작인가 보다.


나이 지긋한 사람이 들어와서 얘기하는데 목소리가 기억나는 게 주치의였다.


"자 준비 하자고"


이 소리와 함께 여러 가지가 일사불란하게 나를 중심으로 움직여졌다.


뭔가 주사는 하도 많이 맞아서 이제는 별 감흥도 없었다.


그런데, 아프면 아프다고 얘기해줄 만한데 난 고통을 못 느끼는 사람 취급을 하는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나도 아파요!'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냥 인상만 찡그릴 뿐이었다.


여러 가지 준비를 마치고 이제 시작을 할 것 같은데 바지를 내리라는, 혹은 바지를 내리는 그런 행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내 손목을 잡고 한두 번 돌렸다 제자리로 놨다.


"자 들어갑니다"


손목이었다.


대퇴동맥으로 할 수도 있고 요골동맥으로 할 수도 있는데, 난 그날 요골동맥으로 진행되었다.


이해는 한다.


모든 것에 대한 가능성은 열어두고, 혹시 모를 문제에 대비하고 그래야 하니까 말이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지는 물어보진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관상동맥 조영술은 항상 손목으로만 진행했고 사타구니에 털을 밀린 건 그때 중환자실에 있었을 때 딱 한번뿐이었다.


끔찍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너무 허무했고 살았지만, 살아서 뭐 하나 하는 생각들을 상당히 많이 했다.


그럴 때마다 웃긴 생각을 한다.


사실 웃기지도 않지만 웃기게 생각하면 엄청 웃기다.


그래서 지금도 분위기가 쳐져있거나 그러면 웃긴 말을 한다.


아주 중요한 회의 전에도 항상 그런 얘기들을 해서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준다.


너무 중요하게 생각되는 일들이 다가올 때, 막상 보면 별거 아닌데 그걸 기다리는 시간은 미칠듯한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중요한 게 위트다.


아주 심각한 것들을 가벼움으로 중화시킬 수 있다.


이상하게 밝은 사람은 신경을 많이 써줘야 한다.


아주 중대한 사안을 가볍게 바라보는 사람은 인생에서 그 보다 더 중대한 일들을 많이 겪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나도 제대로 살 수 없는 게 인생인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걸 보면, 이것 또한 감사하다.


인생은 기본이 고통이다.


그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한테만 리셋을 한번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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