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17>
복제 인간 프린터기 폭파 행사에서 미키17이 졸면서 꿈을 꾼다. 일파가 마샬을 프린트하며 미키에게 자기가 만든 소스를 권한다.
“너도 사실 원하잖아.” - 일파
미키는 잠깐 고민하다 “나도 이제 행복해도 괜찮아.”라고 말하며 폭파 버튼을 누른다.
"너도 사실 원하잖아."라는 말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석해도 의미는 통한다.
1) 너도 소스를 원하잖아
소스는 기득권층이 누리는 사치이다.
2) 너도 소스를 제일 잘 맛봐주는 마샬(독재자)을 원하잖아
독재자는 기득권층에게 제일 좋은 지도자이다. 그들에게 제일 좋은 소스가 무엇인지 판단을 내리고 제공할 능력이 있다.
3) 너도 익스펜더블을 원하잖아
소스, 즉 기득권층이 누리는 사치에는 익스펜더블이 가져오는 이득도 포함된다. 익스펜더블은 미키에게도 이득을 제공한다. 죽음을 덜 두려워하게 해주는 것. 그래서 그가 프린터기 폭파 버튼을 누르기 전에 망설인 걸지도 모른다.
프린터기를 폭파시키며 영화는 끝이 난다. 결말을 보면 행복한 이야기지만 영화는 과하게 평면적이고 동화 같다. 그 이유를 알아보자.
멀티플이라는 소재를 가진 원작과 로버트 패틴슨 주연의 예고편을 봤을 땐 대작이 탄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좋은 소재와 배우진의 영화를 봉준호 감독이 맡는다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었다. 재미는 당연하고 멀티플이라는 소재로 어떤 깊은 이야기를 할지 기대했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많이 아쉬웠다. 다시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설령 관객의 기대와 다르더라도 재밌으면 그만이지만 그러지 못했다. 왜 재미없는지 알아보자.
<기생충>을 볼 땐 기택 가족의 잠입이 걸릴 것이라는 긴장감을 영화 내내 느꼈고, 그것이 너무 좋았다. 이는 미키17과 미키18이 멀티플의 존재를 들키는 것은 개의치 않고 복도를 돌아다니는 장면과 대조된다. 마치 영화 전개를 위해 멀티플의 존재를 어떻게든 들키게 하려는 것 같았다.
이와 달리 소설에선 미키들이 존재를 숨기고 공존하며 생활하는 내용이 꽤 나온다. 그들이 배급량을 조절하고 서로 나누어 임무를 나가는 등의 내용들이 생략되었다. 봉준호 감독이라면 이 장면을 재밌게 표현해 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아쉽다.
공존하는 장면이 생략되어서 그런 걸까, 멀티플 탄생의 순간과 들키는 순간 사이의 간격이 너무 짧아져서 그 긴장감을 오래 누리지 못했다. 짧은 순간마저도 긴장감의 강도는 매우 약했다.
어쩌면 멀티플 탄생의 순간 자체가 너무 늦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사실 초반부 내용은 잘 기억도 안 난다. 빼도 될 장면들이 많았던 것 같다.
크리쳐 무리의 지도자는 미키에게 인간 한 명의 생명을 희생을 요구한다. 관객은 인간 한 명의 희생이라면 당연히 마샬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미키18이 마샬을 제압하고 폭발 버튼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다.
관객은 미키18이 버튼을 누르고 마샬과 같이 죽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예상대로 영화가 진행된다. 그래서 긴장감이 전혀 없었다.
전개가 뻔하더라도 관객의 예상과 다른 전개가 이어질 가능성은 항상 열어둬야 된다. 관객은 영화를 보며 다음에 무슨 일이 있을지 예상하게 되고, 그 예상과 다른 일이 일어날 것 같을 때 흥미를 느낀다. 꼭 예상과 다른 일이 일어나야 되는 게 아니라, 흥미를 유발하는 가능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해 줘야 된다는 것이다.
미키18은 폭발 버튼을 누르길 망설인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미키17과 함께 있는 나샤로 향하는 순간 관객은 그가 폭발 버튼을 누를 것이라 확신하게 된다. 여기서 긴장이 탁 풀린다. 미키17이 갑자기 나샤를 밀치고 17버튼을 누르라고 소리치는 장면이라도 이어지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미키17과 나샤는 껌딱지마냥 딱 붙어있다. 떠난 긴장감은 돌아오지 않았고, 미키18의 선택지는 하나라고 관객은 느낀다.
크리쳐 무리의 지도자가 말한 인간 1명의 희생은 당연히 마샬일 것 같고, 마샬을 죽일 방법은 미키18의 몸에 달린 폭탄일 것 같고, 그 와중에 미키17은 나샤와 붙어 있다. 긴장할 수 없는 환경이다.
<괴물>에서 박해일이 1개 남은 화염병을 던지려다 바닥에 떨어뜨리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노숙인의 도움으로 괴물을 기름범벅으로 만든 상황, 화염병만 맞추면 괴물은 죽는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화염병을 던지려다 바닥에 떨어뜨린다. 이러한 예상 못한 장면은 관객을 긴장하게 만든다.
하이라이트 장면의 뻔한 전개는 마샬과 미키18의 대화에 집중하게 만든다. 혹시 그것이 목적이었을까? 그렇다기엔 그들의 대화는 힘이 없다.
버튼을 누르길 망설이는 미키18에게 마샬은 말한다. "너도 죽는 게 두렵지? 너가 인간이라는 증거야."
이는 영화 내내 미키들에게 던져진 질문, "죽는 건 어때?"와 이어진다. 미키들도 죽음을 두려워한다. 진짜 죽음 앞에 선 미키18은 두려워한다. 죽는 건 어떠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던 미키17 대신 미키18은 대답한다. 나도 두렵다고.
다른 작품들을 보자. <기생충>에서 기택 가족과 근세 가족의 공방전이 이어진다. 반지하에 사는 기택이 지하에 사는 근세에게 "이런 곳에서도 살아지나?"라고 묻는 장면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다. 지하와 반지하까지도 구분 짓는 철학적 대화이다.
<설국열차>에선 혁명을 이끈 커티스가 머리칸에서 윌포드와 만나 철학적 대화를 나눈다.
이처럼 극을 이끈 주인공이 반동인물과 대립하며 나누는 철학적 대화는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키18과 마샬의 대화는 느낌이 다르다. 절대악으로 묘사된 평면적인 인물인 마샬의 입에서 나온 철학적 발언은 힘이 없다. 영화 내내 근세와 자신을 구분 짓던 기택이나 혁명을 이끌며 꼬리칸에 도달한 커티스와 달리 마샬에겐 발언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편했다. 니가 뭐했다고 그런 대사를 뱉냐. 차라리 대사 없이 미키18의 표정 연기에 맡겼다면 어땠을까.
대부분의 인물이 평면적이라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이 없다. 그나마 미키18이 미키17을 죽이려다가 마음을 바꾸는 정도? 이마저도 극적인 변화 같진 않는다. 마치 동화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평면적인 인물들뿐이다.
특히 너무 익숙하고 진부한 절대악 캐릭터 마샬의 등장은 거부감이 들 정도다. 복제인간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기대한 관객에겐 더 그러할 것이다.
극을 이끄는 것은 양면적인 인물이다. 양면적인 인물이 고뇌 끝에 내리는 선택에 놀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평면적인 인물의 예상 가능한 행동은 관객에게 지루함만 줄 뿐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수동적인 주인공이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보러 영화관에 가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좋아하는 영화의 주인공을 떠올렸을 때 수동적이거나 평면적인 인물인 경우는 없다.
+
미키18이 미키17에 비해 능동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멀티플의 등장이 늦어진 만큼 미키17의 수동적인 모습을 지켜보는 시간이 길었던 것도 아쉬운 점이다.
다리우스로부터 도망쳐 익스펜더블이 되고, 익스펜더블로써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임무에 던져진다. 미키18의 등장 전까지 미키17이 능동적으로 뭔갈 하는 장면이 없는 만큼(능동적으로 한거 생각해보면.. 나샤한테는 먼저 말걸었나? 기억이 안 나네) 미키18의 등장은 큰 전환점이 된다. 멀티플의 등장 타이밍이 확실히 아쉽긴 하다.
멀티플을 일찍 등장시키고 둘이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는 장면을 늘렸다면 재미를 챙길 수 있었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