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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고장 나 줘야 보이는 것들

지독한 목감기가 지배했던 연휴를 한탄하며

by 진동글

보통 명절이 끝날 때쯤이면 "명절이 너무 짧아!"라며 아쉬워하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그럴 틈조차 없었다. 나는 감기에 걸려 5일 동안 집에 갇혀 있었다.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긴 연휴 동안 편하게 노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쉬는 것도 아니고. 실내 공기만 들이마시며, 목을 부여잡고 침대와 식탁 사이를 오가는 게 전부였다. 외출복을 입어본 게 언제였더라? 옷걸이에 걸린 패딩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옷처럼.



출근 하루 전, 자체 감금 6일 차. 드디어 목소리가 나오고 두통이 사라졌다. A와 나는 6일 만에 집을 나섰다.






단골 카페까지 가는 길은 어쩐지 낯설었다. 한 건물의 간판이 떼어져 있었고, 나는 한참 동안 그 가게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뻔히 알던 공간인데, 텅 빈 간판 하나로 그 공간이 낯설어졌다.


공기는 유난히 상쾌했다. 이른 시간도 아닌데, 새벽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신선했다. 연휴 동안 진행된 공사장도 눈에 띄었다. 연휴에도 일하셨나. 세상은 5일 동안 멈추지 않고 흘렀는데, 나만 정지해 있었던 것 같다.


바람이 조금 춥다고 느끼는 순간, 옆에서 걷던 A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아 패딩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늘 잡던 손인데도 새삼 따뜻했다. 차가운 바람 덕분에 온기가 더 도드라져서였을까.






5일 동안 A와 집에서 많은 것을 공유했다. 아껴뒀던 예능(피의 게임 3였는데, 아주 재밌었다)을 몰아봤고, A가 좋아하는 웹툰을 따라 읽었다. 예능은 역시나 재밌었고, 웹툰은 취향이 아닐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재밌었다. A는 수염을 길러볼 수 있어서 좋다며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깔깔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평소답지 않은 시간들을 보냈다. 내가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면, 아마 우린 순리대로 본가에 내려가 명절을 보냈을 것이다. 이 시간이 아니었다면, 함께하지 않았을 순간들이었다.






카페에 도착해서는 자연스럽게 긴 메뉴를 주문했다.



"따뜻한 라떼에 우유는 두유로 바꿔주시고, 바닐라 시럽은 한 펌프만 추가해 주세요. 그리고 똑같은 걸로 한 잔 더 주문해 주세요."



우리가 늘 마시던 메뉴였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너무 맛있었다.


바닐라 향이 코를 스치며 은은하게 퍼졌다. 따뜻한 두유는 평소보다 더 고소하게 느껴졌다. 몇 모금 마시고 나서야 깨달았다. 감기 덕분에 며칠 동안 못 마셨으니까. 그래서 더 새롭게 느껴지는 거구나.


평소와 달리 몸속에 카페인이 빠르게 퍼지는 느낌도 들었다. 커피도, 길도, 공기도. 모든 것이 살짝 생소했다.






만약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냥 이 길을 걸었을 거고, 그냥 지나갔을 거고, 그냥 마셨을 거고, 그냥 흘려보냈을 거다.


그런데 고작 며칠 멈춰 있었더니,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그러니까 너무 멀쩡하게만 살 필요는 없을지도(?)


물론 이번 감기는 독하기에 감기에 걸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때때로 멈추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뜻밖의 정체가 오히려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 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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